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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2(2018)년 08월 16일 목요일
마성스님의 ‘불교란 무엇인가’ ( 7 ㆍ끝)
마성스님의 ‘불교란 무엇인가’ ( 7 ㆍ끝)
  • 한국불교신문
  • 승인 2018.04.26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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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간의 수행 끝에 완전한 깨달음 이루고 입멸 직전까지 끊임없이 교화 활동 펼쳐

     제 7강 간추린 붓다의 생애

사꺄무니 붓다(Sakyamuni Buddha)는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와 어머니 마야(Māyā, 摩耶)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캬무니 붓다의 성(姓)은 고따마(Gotama, 喬答摩, ‘가장 좋은 소’라는 뜻)이고, 이름은 싯닷타(Siddhattha, 悉達, ‘목적을 성취한 자’라는 뜻)이다.

석가족(釋迦族)이 세운 왕국의 수도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 迦毘羅城)였다. 그곳은 현재 네팔과 인도의 국경 근처 따라이(Tarai) 분지의 띨라우라꼬뜨(Tilaurakot)로 추정된다. 석가족(Sakya, Śākya)은 까삘라왓투를 수도로 하여 일종의 공화정치 체제로 운영되던 자치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꼬살라(Kosala, 憍薩羅) 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붓다의 탄생지는 룸비니(Lumbinī)라고 전해지는데, 1896년 퓨러(A. Führee)가 네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에서 발견한 아쇼카 왕의 석주(石柱)에는 “여기에서 불타 석가모니가 탄생하였다.”라는 뜻의 글이 새겨져 있어 붓다 탄생지에 대한 초기성전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싯닷타는 탄생한 지 7일 만에 어머니 마야 부인을 잃고 그 후는 이모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i Gotami)에 의해 양육되었다. 성장하여 16세에 결혼하여 29세에 아들 라훌라(Rāhula, 羅睺羅)를 얻었다. 부인의 이름은 남방의 전승에서는 라훌라마따(Rāhulamātā, ‘라훌라의 어머니’라는 뜻)로 불렸지만, 북방의 전승에서는 야소다라(Yaśodharā, 耶輸詫羅, ‘영예를 지닌 여성’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청년시절 붓다의 생활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것 같다. 만년에 붓다가 회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초기경전에서는 겨울․여름․봄 세 계절에 어울리는 세 가지 종류의 궁전[三時殿]이 지어졌다는 등 유복하고도 호화로운 생활이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붓다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생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일찍부터 늙음․병듦․죽음에 대해 고뇌했다고 한다.

싯닷타는 29세에 마침내 출가하여 사문(沙門)이 되었다. 사문이 된 붓다는 남쪽으로 향하여 마가다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에 들어갔다. 그곳은 자유롭고 혁신적인 사상이 가장 성행했던 곳으로 많은 사문들이 모여 있었다. 붓다가 라자가하에서 탁발할 때 마가다의 빔비사라(Bimbisāra, 頻婆娑羅) 왕이 환속하기를 권유했지만 붓다는 이를 거절했다고 오래된 경전은 전하고 있다.

붓다가 출가하여 최초로 가르침을 구한 것은 수행자 알라라 깔라마(Āḷāra Kālama)였다. 그로부터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배웠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다른 수행자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āmaputta)를 찾아가서 그로부터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배웠지만, 붓다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수행은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스승을 떠난 붓다는 계속해서 고행의 방법을 시도했다. 고행은 당시 아지비카(Ajivika)나 자이나(Jaina) 교도들이 즐겨 실천하던 수행방법이었다. 그는 혼자서 여러 가지 고행을 실천했다고 한다. 그는 죽음에 직면할 정도로 육체를 괴롭혔으며, 그러한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강한 의지를 확립하여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했다. 이러한 고행은 6년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역시 궁극의 해탈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붓다는 고행이 해탈하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이것을 포기했다. 그런 다음 먼저 극도로 쇠약해진 신체를 회복하기 위해 수자따(Sujāta, 善生)라는 여인이 주는 우유죽을 섭취했다.

체력을 회복한 붓다는 라자가하 남서쪽 가야(Gayā) 교외, 우루웰라(Uruvelā)의 세나 마을(Senāpati, 將軍村)에 있는 네란자라(Neranjarā, 尼連禪河) 강 근처에 있는 앗삿타(assattha) 나무 아래 홀로 앉아 명상에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거기서 ‘완전한 깨달음’(無上正等覺)을 얻어 붓다(Buddha, 佛陀), 즉 각자(覺者)가 되었다. 이것은 붓다가 35세 때 일이다. 뒷날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이곳을 붓다가야(Buddhagayā, 현재의 보드가야)라고 명명(命名)하였으며, 앗삿타 나무를 보리수(菩提樹)라고 부르게 되었다.

붓다는 성도 후 5주 동안 보리수와 그 주변의 나무 밑에서 결가부좌한 채 해탈의 기쁨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때 따뿟사(Tapussa, 提謂)와 발리까(Bhallika, 波利)라는 두 상인이 붓다께 공양을 올렸다. 이 두 상인은 불(佛)과 법(法) 이보(二寶)에 귀의한 최초의 재가신자가 되었다.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법을 설할 것인가를 망설였다. 그때 범천(梵天, Brahman)이 나타나 세 번이나 간청하므로 비로소 설법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바로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설화이다.

설법을 결의한 붓다는 처음 출가하여 수행할 때 선정(禪定)을 가르쳐 준 두 스승에게 법을 설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래서 예전에 함께 고행했던 다섯 명의 고행자에게 법을 설하기로 했다. 그들은 바라나시(Bārāṇasī, 波羅奈城, 현재의 베나레스)의 미가다야(Migadāya, 鹿野苑)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은 ‘선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이시빠따나(Isipatana, 仙人住處)로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래서 붓다는 우루웰라를 떠나 미가다야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도중 우빠까(Upaka, 優波迦)라고 하는 아지비카 교도와 만났지만 그는 붓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붓다가 미가다야에 도착했을 때 다섯 명의 고행자들은 처음에는 맞이하지 말 것을 서로 약속하였지만 붓다의 위의에 감동되어 결국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이 최초의 설법을 흔히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며, 그 내용은 <전법륜경(轉法輪經)>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의 핵심 내용은 쾌락과 고행 두 가지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붓다가 행한 최초 설법의 내용이다.

초전법륜지 사르나트(Sarnath)에 세워져 있는 다메크 수투파(Dhamek Stupa)의 모습이다. 범어로는 다르마라지까(Dharmarajika Stupa)라고 한다. ‘법으로 다스리는 탑’이라는 뜻이다.
초전법륜지 사르나트(Sarnath)에 세워져 있는 다메크 수투파(Dhamek Stupa)의 모습이다. 범어로는 다르마라지까(Dharmarajika Stupa)라고 한다. ‘법으로 다스리는 탑’이라는 뜻이다.

붓다의 설법을 듣고 다섯 명의 수행자 가운데 가장 먼저 가르침을 이해한 이는 꼰단냐(Koṇḍañña, 憍陳如)였다. 그는 붓다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최초의 출가 제자가 되었다. 나머지 네 명도 구족계를 받았다. 이것은 상가(saṅgha, 僧伽)가 성립하여 비로소 불(佛)․법(法)․승(僧) 삼보가 갖추어진 것을 의미한다.

녹야원에서의 설법을 계기로 붓다의 교화활동은 급속히 전개되었다. 빨리어 율장 「대품」에서는 그 후의 활동 일부를 순서대로 전하고 있다. 먼저 바라나시에서 장자(長者)의 아들 야사(Yasa, 耶舍)가 교화를 받고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으며, 그의 부모와 아내도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재가신자가 되었다. 야사의 친구 네 명과 50명의 옛 친구도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때 붓다는 60명의 제자들에게 전도의 길을 떠나라고 했다.

그리고 붓다는 다시 우루웰라로 향했다. 돌아오는 도중에 30명의 제자를 얻었으며 우루웰라에 와서는 결발(結髮)의 행자(行者) 우루웰라 깟사빠(Uruvela Kassapa)를 신통력으로 항복시키고, 나디 깟사빠(Nadi Kassapa)와 가야 깟사빠(Gayā Kassapa) 및 이 세 명의 깟사빠 형제가 이끄는 제자 천 명을 귀의시켜 교단을 비약적으로 확대시켰다. 붓다가 천 명의 제자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가니 빔비사라 왕은 자진해서 재가신자가 되었다. 그 무렵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명인 산자야의 제자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가 250명의 무리와 함께 불교로 개종했다.

붓다는 성도한 후 입멸에 이르기까지 45년간 인도 각 지방을 유행하며 교화활동을 펼쳤다. 붓다의 교화활동은 먼저 마가다국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수도 라자가하에는 죽림정사 외에도 의사 지와까(Jīvaka, 耆婆)가 기부한 망고 숲(Jīvakambavana) 등 몇 군데의 승원(僧院, 精舍)이 이루어졌다.

라자가하 부근의 바라문 가정에서 태어난 마하 깟사빠가 제자가 되었던 것은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귀의한 직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는 붓다 입멸 후 교단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붓다의 만년에는 돈독한 신자였던 빔비사라 왕이 그의 아들 아자따삿뚜(Ajātasattu, 阿闍世)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새로운 왕 역시 얼마 후 잘못을 뉘우치고 붓다에게 귀의했다고 전한다.

꼬살라 국에서의 붓다의 교화활동은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 給孤獨, ‘고독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자’의 뜻)라 불리던 사왓티의 장자 수닷따(Sudatta, 須達)의 귀의를 계기로 비로소 이 나라에서의 교화의 거점이 확보되었다. 장자 미가라(Migāra, 彌迦羅)의 어머니(鹿子母)로 불렸던 위사카(Visakha, 毘舍佉)가 동쪽 교외에 녹자모 강당(鹿子母 講堂)을 지어 상가에 기부했다. 붓다는 성도 후 20년이 지난 후부터 입멸하기 한 해 전까지 25년간의 안거를 거의 기원정사와 녹자모 강당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것은 붓다가 사왓티를 중심으로 하여 교화생활의 후반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pasenadi, 波斯匿)도 왕비 말리카(Mallika, 末利) 부인의 인도로 붓다께 귀의했다.

붓다의 고향인 까삘라왓투에서의 교화도 두드러진 자취를 남겼다. 붓다는 성도 후 몇 차례 이 땅을 방문했는데, 붓다의 교화를 듣고 많은 석가족 청년들이 출가했다. 그 가운데, 붓다의 아들 라훌라(Rāhula), 배다른 동생 난다(Nanda, 難陀), 사촌동생 아난다(Ānanda, 阿難),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 이발사 우빨리(Upāli, 優波離)가 있었다. 붓다의 양모 마하빠자빠띠(Mahāpajāpatī)가 아난다의 주선으로 출가를 허락받은 것은 조금 후의 일이지만 이로써 비구니승가(比丘尼僧伽)가 성립되었다. 붓다 만년에는 꼬살라국의 빠세나디왕의 아들 비두다바(Viḍūḍabha, 毘琉離)가 석가족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까삘라왓투를 공략하여 살육을 저질렀다.

붓다의 입멸을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 ‘완전한 열반’의 뜻)’ 혹은 ‘대반열반(大般涅槃, mahāparinibbāna)’이라고 부르는데, ‘위대한 죽음’이라는 뜻이다.

남전의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붓다가 입멸하기 몇 개월 전 라자가하를 떠나 최후의 여정에 오른다. 날란다(Nālandā)를 지나 빠딸리(Pāṭali) 마을에 도착하여 건설 중인 도시(城塞)를 보고 장래의 번영을 예언했다. 이곳이 후일 마가다국의 수도 빠딸리뿟따(Pāṭaliputta, 華氏城, 현재의 빠뜨나)이다. 붓다는 여기서 갠지스 강을 건너 왓지국의 수도 웨살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멀지 않은 베루바(Beluva, 竹林)라고 하는 마을에서 우안거(雨安居)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병을 얻어 격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붓다는 고통을 참고 견디어 병을 극복했다.

우안거(雨安居)가 끝나자 붓다는 웨살리를 뒤돌아보고 아쉬워하면서 북쪽으로 길을 재촉했다. 마을과 도회지 몇 군데에서 설법하고 말라국의 빠와(Pāvā, 波婆)에 들어가 금세공업자 쭌다(Cunda, 純多)의 공양을 받았다. 쭌다가 베풀어 준 수까라 맛다바(Sūkara-maddava)라는 음식을 먹고 심한 병에 걸렸으나, 고통을 참으며 계속 여행하여 꾸시나라(Kusinārā)에 도착했다.

붓다는 꾸시나라 교외 숲속의 두 그루의 사라(sārā) 나무(yamakasārā, 沙羅雙樹) 사이에서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오게 하여, 두 발을 포개고 조용히 옆으로 누웠다. 점차 최후의 시각이 다가옴에 따라 붓다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입멸 후 교단이 나가야 할 자세에 대해 훈계하고 아직도 어떠한 의문이 남아 있는지를 물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모든 제자들에게 의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현상(諸行)은 소멸해 가는 것이다.  게을리 하지 말고 노력하라.

   Vayadhammā saṅkhāra appamādena sampādetha.

이것이 붓다의 최후 유훈이다. 붓다가 입멸하자 동시에 대지가 진동하고 천고(天鼓)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붓다의 유해는 7일 후 화장되었다. 늦게 도착한 마하깟사빠 일행도 다비(茶毘, jhāpeti)에 합류했다. 유골(舍利)은 여덟 개로 나누어졌으며, 또한 유골을 담았던 항아리와 재를 얻은 자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여덟 개의 사리탑(舍利塔)과 병탑(甁塔), 회탑(灰塔) 등 모두 열 개의 탑(塔, stūpa)이 각지에 건립되었다.  

 

     마성스님 <철학박사 ㆍ 팔리문헌연구소장 >

 

 

 

 * '마성스님의 불교란 무엇인가'는 신문사 내부사정으로 이번 7강으로써 연재를 마치게 됨을 알려드립니다. 필자 마성스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