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의(논문)의 목적은 불교경전어로서의 불전한문(佛典漢文)교육의 전문성과 현대적 응용에 관하여 살펴보고 그 의의와 방안과 개선점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다.
한문교육을 보다 심화시켜 한역경전을 바로 이해하고 터득하여 불타의 교법과 인도에서 흥기한 대승불교철학을 적확하게 인식하고 동아시아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친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통하여 전해진 불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한문은 불교ㆍ유교ㆍ도교의 경전어

 문어문(文語文)인 한문은 중국 고래의 문어체로서 문장을 말한다. 한국의 유교나 불교에서 다루는 한문 역시 이 같은 문어체의 문장이다. 중국에서도 순한문은 고대 중국의 고전문어문법으로 쓴 것을 말한다. 이것을 순수 한문, 정칙한문(正則漢文)이라고 하며, 현대중국에서는 文言文이라고 부른다.

이에 반하여 변체한문(變體漢文)은 순한문이 아닌 변칙적인 문법의 한자문장이다. 보통화(普通話)나 국어에서 현대중국어문은 한문을 간체자(簡体字)인 ‘한문(汉文)’으로 부른다. 한자의 번체자와 간체자에 대한 논쟁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대두된다. 따라서 한자에 의한 한문 문장 역시 순한문이냐 아니면 변칙한문이냐에 대한 논란이 자연스럽게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불교경전어로서 다루고자 하는 한자한문은 번체자에 의한 순한문이다. 하지만 지금 중국을 비롯한 일부의 나라들에서는 간체자에 의한 중국어 구어체인 보통화로 불교경전이 간행되고 있다. 간체자에 대한 대책이 전무한 우리의 어문정책상 특히 한문 경전에 의지하고 있는 한국불교가 당면한 현안 문제이다.

한역대승불전인 《화엄경》 《금강경》 《능엄경》 《법화경》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할지라도 장차 이 문제는 한국불교의 경학연구와 교학발전과 현대적 응용에 크나큰 이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중국의 근대학자이면서 사상가인 호적(胡適)은 순한문의 문어문보다는 구어인 보통화의 간체자 사용을 주장한 바 있지만, 한역경전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는 이 순한문을 모르고서는 한역경전의 진의(眞義)파악이 어렵다고 본다.

한역 경전어인 한문을 논구(論究)하면서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을 연계하지 않으면서 한문불전만을 독립해서 고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문은 불교만이 아닌 유가와 도가의 기본 경전어이다. 중국에서 한문과 관련해서는 유가나 도가가 불교보다도 먼저이다.

한문은 유불선 3교의 기본 경전어인 것이다. 따라서 한문의 위상은 불교 경전어만이 아닌 유가 도가의 경전어임을 간과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한문은 유가나 도가의 경전이 먼저 성립시킨 유선(儒仙)의 경전어이다. 유가적 도가적 사고와 언어적 이해력으로 불교를 수용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문불전은 인도 유럽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한자한문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유교(儒教)는 공자를 시조로 하는 사고와 신앙체계이다. 기원전 중국에서 흥기하여 2천년이상 동아시아를 지배했다. 학문적 측면에서 보면 유학은 사상적으로는 명교(名敎) 예교(禮敎)라고 할 수 있다. 대성자(大成者)는 공자라 ‘공교’ ‘공자교’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철학 사상적으로 유가사상이라고 한다.

실크로드 북쪽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인 투루판에 있는 대불사의 현재 모습. 현장법사가 머물며 '인왕반야경'을 설법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백성들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법문을 들었다고 한다.
실크로드 북쪽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인 투루판에 있는 대불사의 현재 모습. 현장법사가 머물며 '인왕반야경'을 설법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백성들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법문을 들었다고 한다.

동주 춘추시대에 노나라 공자가 요ㆍ순, 문무ㆍ주공(堯ㆍ舜, 文武ㆍ周公)의 군자의 정치를 이상으로 하여 이 시대와 사람들에게 인의와 도를 실천코자 했다, 상하질서에 대한 유가사상은 한대(漢代)에는 국가의 교학으로 인정받았다. 유의 기원에 관해서는 호적(胡適) 선생이 1924년에 쓴 논문 「설유(説儒)」에서 은나라 유민으로서 예를 가르친 선비(士)에서 유래한다고 했다. 근년에는 관혼장제(冠婚葬祭), 특히 장송의례(葬送儀礼)를 전문으로 하는 집단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공구(孔丘 孔子, 기원전 551~479년)는 실력주의가 횡행하던 시대 즉 신분제가 무너진 주나라 말기에 노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주나라 초의 복고적인 신분제질서의 재편을 위한 인도정치를 주장했다. 공자제자들은 공자사상을 신봉하여 교단을 형성했으며, 전국시대에는 유가의 제자백가들이 공자와 제자들의 어록을 《논어(論語)》로 찬했다. 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공자제자는 3천명이며 6예(六芸)를 통한 자가 70명이요, 제자 등은 3천명 이었다고 한다.  덕행(徳行)은 안회(顔回)ㆍ민자건(閔子騫)ㆍ염백우(冉伯牛)ㆍ중궁(仲弓)이며, 언어는 재아(宰我)ㆍ자공(子貢)이고, 정사(政事)는 염유(冉有)ㆍ자로(子路), 문학(文学:学問)은 자유(子游)와 자하(子夏)가 있었다. 효의 실천에는 증삼(曾参, 曾子)이고, 그의 제자에는 공자의 손자로서 《중용(中庸)》을 지은 자사(子思) 가 있다.

공자 사후인 전국시대(기원전 403~221)에는 유가 8파로 맹가(孟軻=孟子)는 성선설(性善説)을 주장하고 공자의 인의 덕목을 칭송하며 인의사상을 주장하였고, 순자(荀子)는 성악설(性悪説)을 주장하면서 예치주의(礼治主義)를 주장(主張)했다. 《시(詩)》 《서(書)》 《예(礼)》 《악(楽)》 《역(易)》 《춘추(春秋)》는 주나라의 서물(書物)로서 육경(六経)이라고 하는데, 유가의 경전이다. 유가의 해석학(解釈学)적인 입장에서 《예기(礼記)》나 《역전(易伝)》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伝)》 《춘추공양전(春秋公羊伝)》 《춘추곡량전(春秋穀梁伝)》에 대한 주석서와 논문집을 정리하여 한대에 완성시켰다. 진대(秦代, 기원전 221~206년) 진시황은 6국을 통일하여 법가사상을 존숭하고, 자유로운 사상활동을 금지시켰다. 분서갱유를 일으키고, 박사관(博士官)에 보존된 서물을 제외하고 유가의 경서를 전부 불태웠다. 초한의 전화를 겪으면서도 한나라에 전해졌다.

전한(前漢: 기원전202년)은 다시 통일되었지만, 한초에 유행한 사상은 도가계(道家系)의 황로형명(黄老刑名)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숙손통(叔孫通)이 한의 궁정의례(宮廷儀礼)를 정하였고, 육가가 남월왕(南越王)으로부터 조공(朝貢)을 받고, 복생(伏生)이 《금문상서(今文尚書)》를 전하였다. 진나라 박사관에 있던 유자들이 활약했다. 문제 아래서는 가의(賈誼)가 활약했고, 무제(武帝) 시대에는 현량문사 동중서는 유학을 정통 학문으로 오경박사를 설치할 것을 헌책하여 무제는 건원 5년(기원전136년) 오경박사를 설치했다. 이때 유교가 국교로 채택되었다고 하지만, 전한 말부터 후한 초까지가 유가사상이 국가 학문사상으로 오경박사를 설치하고 유가의 경서를 국가가 공인하여 교수하였다. 관학화한 것이다.

구법여행을 하는 현장법사. 일본 가마쿠(1192~1333) 시대 전기.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구법여행을 하는 현장법사. 일본 가마쿠(1192~1333) 시대 전기.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유가관료가 서서히 전한 말에는 유자가 중신으로 지위를 점점 차지했다. 전한의 경학은 전문 유파를 중시했다. 전한 말에는 재이사상(災異思想) 신비주의적으로 경서를 해석하는 위서(緯書)가 횡행했고, 신(新)의 왕망(王莽)도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도 참위(讖緯)를 이용하였다. 환담(桓譚)과 왕충(王充)이라는 사상가는 무신론(無神論)을 합리주의적인 입장에서 참위를 비난했다. 정현(鄭玄)은 한대(漢代) 경학(経学)을 집대성(集大成)했다.

도가(老荘思想, Taoism)는 철학적이며 종교적으로 2천년이상을 동아시아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장사상(老荘思想)은 중국산 사상으로서 도가의 대가인 노자와 장자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도가의 중심사상이 펼쳐진 시대는 위진 남북조시대였다. 노장사상의 ‘道’는 ‘天’과 동의어였다. 도가에서는 《노자》 《장자》 《주역》을 삼현(三玄)이라고 부르며, 학문은 현학(玄学)이라고 부른다. 현학은 위나라 왕필(王弼)ㆍ하안(何晏)과 서진(西晋)의 곽상(郭象)이 창시했다. 노장사상은 노자로부터 시작해서 장자가 심화시켰다. 노장이라는 이름 이전에는 ‘황로(黄老)’라고 했다.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초까지 유행했다.

유교가 국교가 되고나서도 노장사상은 중국인의 정신의 그림자에 잠재되어 있어, 유교의 윤리사상에 피로할 때, 노장을 생각하면서 탈출했다.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부터는 정쟁이 격렬했다. 고급관료들은 몸을 보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계해야 했던 그들은 유교보다는 노장사상의 철학적 문답을 교환하는 청담(淸談)에 침잠하게 됐다. 노장사상은 불교와 특별히 선종(禅宗)에 접근(接近)하고, 유교(朱子学)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문경전어로서의 최초의 한역경전은 《42장경》이다. 물론 선진시대에도 불교가 중국에 전해졌다는 전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해로를 통한 접근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기원전에 이미 한반도 남단인 가락국에 불교가 전해진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인도와 아랍 등의 문헌을 더 천착해야할 과제가 남아있지만, ‘전연 아니다’라고 단정할 일은 아니다. 불교가 한나라 이전에도 전해졌다는 설은 전설상의 이야기다. 하지만 몇몇 고대 문헌들을 통해서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는 과정을 추정해 볼 수가 있다.

경전어로서의 한문불교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역불교의 경로를 천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실크로드 불교를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이 불교와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동한(東漢)의 제2대 황제인 한(漢) 명제(明帝:  28~75년)때이다. 불교는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에 전해졌다. 실크로드(The Silk Road)는 동서무역路이다. 아시아 대륙인 동남서(東南西) 아시아에서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와 유럽까지 연결되는 광범한 지역을 연결하는 무역 네트워크였다. 일명 ‘비단길(Silk Routes)’에는 비단만이 아니고 다른 많은 제품들을 포함한다.

이 길은 문화와 무역인들의 길이었다. 대상(隊商)과 순례자들과 승려와 종교적 전도(傳道)와 군인들이 수천 년간 중국에서 지중해까지의 유목민과 도시인들의 생활과 사치에 필요한 상품과 비단 사향 루비 다이아몬드 진주 대황 등의 물질적 재료와 정신문화인 지식과 사상과 문화와 질병을 전달하는 수도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중국과 인도와 중앙아시아는 8천km에 이른다. 실크로드는 중국과 인도와 페르시아, 이집트, 로마와 중요한 문명교류의 파이프 역할을 한 동맥이었다.

처음으로 ‘실크로드’란 말을 사용한 것은 1877년 독일인 학자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에 의해서다. 중국의 비단무역에서 찾은 것이다. 실크로드는 육로만이 아닌 해로도 있다. 중국의 동한 시대에 월남의 하노이에서 말라카 해협을 통해 스리랑카 인도 페르시아 만 홍해와 로마까지 연결됐으며, 이밖에도 향 루트, 차마고도(茶馬高道) 같은 다양한 무역로가 개척되어 있었다.

비록 실크로드란 단어가 비단의 이름에서 유래되기는 했지만, 실크로드는 정신과 물질이 교환되면서 유통되는 지속적인 문명과 문화의 최첨단 시장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순수한 여행길이기도 했다. 아주 소수의 여행자들은 끝에서 끝까지 여행도 불사했다. 대개는 중간의 무역시장이나 오아시스 도시들에서 교역을 할 뿐이었다. 중간에 무역 에이전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의 ‘법현’이나 ‘현장법사’같은 구법승들은 장안에서 실크로드를 따라서 인도까지 다녀오는 이들도 있었다.

중국 쪽에서 실크로드 무역로를 개척한 사람은 장건(張騫; Zhang Qian)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중앙아시아의 무역로는 기원전 114년에 이르면 보다 확대된다. 실크로드는 중세후기까지 번영하다가 해로에 의한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실크로드를 통한 중국으로의 불교 전래는 기원후 1세기부터다. 타림분지는 중앙아시아의 중심지역이다. 한나라가 이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실크로드가 개척되고 동서 문명의 교류가 시작되는 교착지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원 응  (주필ㆍ종립 동방불교대학 총장)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