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떠러지 나뭇가지 하나에 이 몸이 걸린 생사처럼 오직 하나인 마음을 찾아야 찾아지는 것이 ‘마음’

 

        방거사와 단하선사

방거사와 단하선사의 도담(道談)의 진전이 맷돌의 위아래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아 돌고 돌다가 끝에 단하선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때에 말이 없는 것을 양구(良久)라 한다. 양구는 오랜 고요의 머무름이다. 고요의 오랜 머무름은 말과 침묵의 끝이요, 긍정과 부정의 끝이다.

또 긍정과 긍정, 부정과 부정의 평정이다. 선가(禪家)에서 칠통타파(漆桶打破)의 방편의 표현으로 할(喝)을 쓰기도 하고 봉(棒)을 쓰기도 하며 양구를 쓰기도 한다. 단하선사가 양구를 하니 방거사는 일구(一句)를 말하면 우리의 거래(去來)가 원만해질 것이라 하였고 일구를 말할 사람이 없다 하였다.

일구란 세속에서는 여러 문장 속에 한 구절이라 하는 것이 통례이겠지만 불가 선문(禪門)에서는 오종선(五種禪)이 있고 그 중에 최상승선(最上乘禪)이 있으며 최상승선 중에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으로 구분하고 그 조사선에서 최요(最要)를 말한다.

이 일구는 삼구(三句)중의 하나이다. 제일구(第一句)는 조사선에서 조사의 심인(心印)을 받아 지니는 것이니 확철대오에 이르러 역대전등(歷代傳燈) 제대조사에 인가를 받음이다. 몽매간(夢寐間)에 화두일여(話頭一如)하여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하였다 하여도 일구에 막히면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하는 것이다.

선조사(禪祖師) 스님들의 오도송(悟道頌)이 오언(五言)이나 칠언(七言)의 절구(絶句)로서 종지(宗旨)를 보이게 하지만 그 안에 일구가 들어있어 이 일구가 있으면 살고 일구가 없으면 죽는다 한다. 오증(悟證)하는 선지식(善知識)이 점검(點檢)함에 어떤 것이 제1구냐고 묻는다. 이 때에 제1구를 망설임 없이 바로 내려놓아야 한다.

삼구 중의 제이구(第二句)는 여래선(如來禪) 또는 여래 청정선(淸淨禪)으로 <능가경>에 있고 부처님이 말씀한 교선(敎禪)이 하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제삼구(第三句)는 하택신회의 본원불성(本源佛性)으로 의리선(義理禪)이다.

하택신회(荷澤神會, 685~ 760)는 14세에 승려가 되고 육조혜능의 조계(曹溪)에서 오래 수행했다. 육조스님이 열반한지 20년간이나 돈지(頓旨)가 침몰되어 점문(漸門)만 성행할 때 남돈북점(南頓北漸)의 양종(兩宗)을 정하여 <현종기>를 지어 구분하였다.

다시 말하면 돈(頓)은 찰나, 즉 잠깐 사이라는 뜻인데 깨달음은 찰나에 오는 것으로 해가 뜰 때 먼저 높은 곳을 비치는 것 같고, 점(漸)은 점진적으로 수행의 차례를 밟아나가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한다. 교(敎)에서는 <화엄경>이 돈교(頓敎)이고 근기에 맞추어 점차로 <아함경>, <방등경>, <반야경>, <원각경> 등 여러 경이 점교(漸敎)이다. 하택종(荷澤宗)은 돈오(頓悟)를 주장했으나 우리 중생의 근본이 불성이므로 불성에 들어가는 절차에 의리(義理)를 따져 들어가는 선(禪)이다.

이 삼구를 평하되 제1구에 깨달으면 오히려 부처와 조사스님의 스승이요, 제2구에 깨달으면 모든 사람과 하늘세계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 자기 자신도 구하지 못한다 했다. 깨달음이란 이치를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서 취사선택하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모양은 같은 공부 같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도 못 구한다는 말이다.

또 3구의 깊이를 말로 하자면 제1구는 상신실명(喪身失命)이고 제2구는 미개구착(未開口錯)이며 제3구는 똥을 키로 까불거나 땅을 비로 쓰는 것 같다 했다. 상신실명은 몸이 죽고 생명을 잃었다는 글자해석이지만 제1구의 종지로는 본래 무일물(無一物)이니 본래 생사(生死)가 없으므로 상신실명이 제1구가 된다.

임제의현(臨濟義玄, ? ~ 867)조사는 “제1구는 3현문(玄門)을 갖추고 그 1현 중에는 반드시 3요(要)를 갖춘다.”고 하였다. 현은 1현이 체중현(體中玄)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2현은 구중현(句中玄)으로 말과 생각과 이론을 떠난 경절어구(徑截語句) 즉 곧바로 끊어버린 말이나 글귀이다.

이는 달마대사가 혜가스님에게 “마음을 가져오너라!” 하니 혜가스님이 “마음을 찾아도 마음이 없습니다.”하자 달마대사가 “마음을 마쳤느니라”한 것과 같다. 또한 양무제가 “어떤 것이 제일성제의(第一聖諦義)입니까?”하니 달마대사가 “확연무성(廓然無聖)입니다” 라 답한 것과 같다.

또 어떤 스님이 육조혜능 대사에게 “불법은 누가 압니까? 하니 육조대사가 “불법을 아는 자가 아느니라”고 하니 그 스님이 다시 “스님은 불법을 아십니까?”라는 물음에 “나는 모르노라”하며 화살처럼 바로 쏘아 끊어버린 경절어구이다.

제3현은 현중현(玄中玄)이니 조사가 법상(法床)에 올라 양구, 즉 말없이 가만히 있거나 주장자로 치거나 할, 한소리를 크게 외치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3요 중의 제1요는 도장을 허공에 찍는 것 같고 제2요는 도장을 물결위에 찍는 것 같으며 제3요는 도장을 진흙에 찍는 것 같다.

지혜와 우치의 차이는 백지 한 장 차이지만 결과는 하늘과 땅의 거리이다. 지혜는 근본이 하늘을 감싸 안은 근본이고 우치는 근본이 있으나 근본을 모르고 현상계에 휘둘리다 소멸하는 결과이다. 따라서 완전한 지혜는 평범 속에 하늘같은 이치가 들어있다. 그러나 중생은 하늘 같은 이치를 알지 못하는 우치한 존재이다.

웬만한 사람이면 다 마음을 찾아본다. 그러나 순간에 지나지 않거나 어쩌다 찾거나 찾기로 작정을 했으나 헛되이 세월만 보내기 쉽다. 하지만 전지하고 철저하게 생사(生死)를 걸고 생명을 다해 마음을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낭떠러지 나뭇가지 하나에 이 몸이 걸린 생사처럼 오직 하나인 마음을 찾아야 찾아지는 것이 마음이다.

달마대사가 혜가스님에게 “마음을 가져오너라” 하니 혜가스님이 “마음을 찾아도 마음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달마대사가 “마음을 마쳤느니라” 했다. 이 대화는 아무라도 할 수 있는 일상의 대화 같지만 하늘같은 지혜의 종지(宗旨)가 들어있는 말이다.

달마대사가 “마음을 가져오너라” 하는 것이 그 마음이다. 혜가스님이 “마음을 찾아도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한 것은 철저하게 찾아 궁극에 이른 마음의 적적요요(寂寂寥寥)하여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경지이기에 굳이 대답을 하자면 없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긍정과 부정을 떠난 부정의 부정이다. 마음은 있다 없다 의 판단 이전의 처음이요 ,마음을 마음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모든 것이 포함이라 끝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마음을 마음이라 해도 맞지 않다고 한 것이다. 달마대사가 혜가스님에게 “마음을 마쳤다”고 한 것이니 도(道)를 이루어 완성한 것을 증명하였다.

종지의 완성은 전했으나 전한 바가 없고 전해 받았으나 전해 받은 바가 없다. 명명백백(明明白白)하지만 자취가 없다. 이를 무한청풍(無限淸風)이라 했다. 염화시중(拈花示衆)과 가섭의 미소(微笑)가 그러하고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에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가 그러하며 불조(佛祖)와 산하(山河)를 입 없이 다 삼켜버렸다 함이 바로 그러하다. 이가 바로 허공에 도장을 찍는 일이요 다음은 물결 위에 도장을 찍는 일이며 다음이 진흙에 도장을 찍는 일이다.

이러한 까닭에 단하(丹霞)선사가 방거사에게 제일구 가운데 현중현의 양구를 보이므로 방거사가 말하기를 “일구를 말하면 우리의 거래가 원만해질 것”이라 한 것은 3현문과 3요를 다 갖춘 것을 말함이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부처의 스승이고 조사의 스승이라 했다. 부처가 최고이고 조사가 목표인데 부처 위에 또 스승이 있고 조사위에 또 조사가 있다니 깨닫는다 함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가없고 끝이 없다할 것이다. 방거사가 석두(石頭)화상과 마조(馬祖)화상을 찾아가 만법(萬法)과 짝하지 않는 자가 누구냐고 묻는 그 질문에서의 대답이 제1구의 깨달음이다. 

 

  지허스님 (순천 금둔사 조실, 원로회의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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