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세계로의 전개가 유전(流轉)이고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는 게 환멸(還滅)
대승불교의 깨달음 목적은 중생구제, 요가철학의 깨달음 목적은 홀로 독존"

지광스님(서울 범혜사 주지)은 2월 23일 열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2017학년도 학위수여식에서 불교문예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불교와 요가(Yoga)철학의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 비교연구―대승기신론과 요가수뜨라를 중심으로’ 이다

이 논문은 불교와 요가철학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대승기신론과 요가수뜨라를 중심으로 비교 연구한 것이다. 특히 불교와 요가철학의 유사성과 상이성에 초점을 맞춰 유전문과 환멸문을 비교했다.

대승기신론의 삼세(三細)와 육추(六麤)상으로의 유전적 전개 과정과 상캬 ・요가철학의 유전적 전개 과정을 비교한 것과 깨달음으로 향하는 환멸단계 즉 기신론에서의 시각의 네 가지 모습과 요가수뜨라에서의 유상/무상삼매와 유종자와 무종자삼매의 비교는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의 문제에 있어서 대승기신론의 깨달음은 전적으로 중생구제에 맞추어져 있는 반면, 요가수뜨라의 깨달음은 철저하게 뿌루샤(puruṣa)의 독존에 맞추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수행체계와 종착점도 다르게 나타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두 사상체계가 추구하는 종착점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수행해야 하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불교와 요가철학의 유사성과 상이성을 확인함으로써 두 사상체계를 더욱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편집자 주>




    流轉과 還滅의 유사성과 상이성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와 철학은 인간이 당면한 실존적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립되었다. 따라서 인도의 종교와 철학의 궁극적 목적은 괴로움에서 벗어난 해탈을 얻기 위함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인도의 종교와 철학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불교의 사상체계는 고(苦)의 원인(原因)과 고(苦)의 소멸(涅槃)이라는 두 가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의 고의 원인에 대한 전개과정을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하고, 후자의 고의 소멸에 대한 전개과정을 환멸문(還滅門)이라고 한다. 상캬(Sāṃkhya)와 요가(Yoga)철학의 사상체계도 두 가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이 불교와 상캬・요가철학의 사상체계가 유전과 환멸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불교와 상캬・요가철학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상캬와 요가철학에서는 뿌루샤(puruṣa)와 같은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만, 불교에서는 뿌루샤와 같은 절대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교리적으로 불교의 연기설(緣起說, paṭiccasamuppāda)과 상캬의 전변설(轉變說, pariṇāmavāda), 인중유과설(因中有果說, sāktāryavāda)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불교와 요가철학의 유전문

먼저 기신론에서는 ‘훈습(熏習, vāsanā)’이라는 개념에 의해 유전과 환멸의 두 가지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 훈습이란 스며들어 물들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진여(眞如)와 무명(無明) 사이에 ‘상호훈습(相互熏習)’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즉 진여가 무명의 영향을 받아 오염되어가는 것을 염법훈습(染法熏習)이라 하고, 무명도 진여가 영향을 주면 깨끗하게 변해가는 것을 정법훈습(淨法熏習)이라고 한다. 염법훈습은 유전문이고, 정법훈습은 환멸문이다.

이처럼 중생심에는 염법과 정법이 동시에 함장(含藏)되어 있다. 따라서 염정(染淨)이 함께하는 중생심은 그 근본의 본성이 불생불멸인 자성청정심이다. 그런데 중생은 무명으로 인하여 자성청정심을 자각하지 못하고 생멸 유전하게 된다. 생멸 유전하지만 그 속에는 여래의 성품이 감춰져 있다. 이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신론에서는 여래의 성품과 생멸심이 화합되어 있는 것을 알라야식이라고 하여 이 둘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한다.

여래장을 심체로 하는 알라야식은 ‘각(覺)’과 ‘불각(不覺)’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나타난다. 불생불멸의 진심・여래장의 성질이 알라야식에 나타나면 각이 되고, 무명에 의해 생멸하는 마음이 작용하면 불각이 된다. 이처럼 알라야식에는 무명이 전제되어 있으며, 이 진여성을 무명이 훈습하여 意[末那識]와 意識[六識]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 불각에는 근본불각(根本不覺)이 있고 지말불각(枝末不覺)이 있다. 근본불각은 진여(眞如)를 모르는 무지를 말한다. 이 진여를 모르는 무명으로 인해 지말불각이 일어난다. 이 지말불각은 삼세(三細)와 육추(六麤)라고 불리는, 세 가지 미세한 불각의 모습과 여섯 가지 거친 불각의 모습이다.

먼저 미세한 것에는 무명업상(無明業相), 능견상(能見相), 경계상(境界相)의 모습이 있다. 마음이 무명에 의해서 홀연히 움직인 것이 무명업(無明業)이며, 이 업상의 움직임에 의하여 능견상인 주관이 나타나며, 능견(能見)에 의해 경계가 허망하게 나타난 것이 경계상이다. 곧 이것은 대상인 객관이며, 알라야식이 형성한 경계상이다. 이 삼세상(三細相)은 미세하여 의식상에 드러나지 않아 불가지(不可知)이다.

알라야식이 형성한 경계상에 의해 여섯 가지의 거친 상인 지상(智相), 상속상(相續相),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計名字相), 기업상(起業相), 업계고상(業繫苦相)이 생긴다. 그중 첫 번째가 지상인데, 이 지상은 알라야식의 경계상을 인연으로 하여 마음이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음의 분별을 일으키고, 알라야식을 보고 ‘나[我]’라 하고, 알라야식에 의해 드러난 경계의 모습[境界相]을 보고 ‘내 것[我所]’ 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이 ‘지상’을 유식의 말나식과 동일하게 보며, 의식상에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라 하여 잠재의식으로 분류한다.

두 번째 상속상(相續相)부터는 의식에 해당한다. 상속상은 고(苦)와 낙(樂)의 느낌에 따라 생각을 일으키고, 매 순간 변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 상속상은 지상의 미세한 분별과는 달리 거친 분별이므로 원효(元曉)는 이를 오온(五蘊)중의 식(識)으로 보았다.

세 번째 집취상(執取相)은 지상의 호오(好惡)와 상속상에서의 고락(苦樂)의 인식에 대하여, 즐거움의 대상은 이를 지속시키려 집착하고, 고통의 대상에 대하여는 이를 피하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원효는 이를 오온중의 수온(受蘊)에 배대하였다.

네 번째 계명자상(計名字相)은 경계에 대한 망집으로 경계를 보다 명확하게 분별하기 위해 여러 가지의 이름과 말을 적용, 이를 분별하는 것이다. 원효는 이를 오온 중의 상온(想蘊)에 배대하였다.

다섯 번째 기업상(起業相)은 대상에 대하여 일상적인 행위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원효는 이를 행온(行蘊)에 배대하였다. 여섯 번째 업계고상(業繫苦相)은 업에 매여서 고통이 일어나는 모습이다. 원효는 이를 상온(想蘊)에 배대했다.

이것을 정리하면 무명에 의해서 한 생각이 움직여 업상, 능견상, 경계상을 형성하는 알라야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알라야식의 경계상을 보고 지식(智識)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제7말나식이며, 그리고 의식인 상속상, 집취상, 계명자상, 기업상으로 전개되어 현실의 업을 받고 살아가는 업계고상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것이 기신론에서 말하는 유전문이다.

한편 상캬와 요가철학에서는 ‘훈습’이라는 용어보다는 ‘전변(轉變, pariṇāma)’이라는 용어로 현상세계의 성립에 관한 이론, 즉 유전문을 설명하고 있다. 전변이란 “상주(常住)하는 근본질료인(根本質料因)으로부터 일체의 현상・결과가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전변설이란 “실체는 불멸이면서 다양하게 변화한다는 사상”이다.

상캬와 요가철학에서는 정신원리[뿌루샤, 순수정신]와 물질원리[쁘라끄리띠, 근본물질]의 두 실재를 상정하는 이원적 실재론이다. 즉 순수한 초월의식인 뿌루샤가 근본물질원리인 쁘라끄리띠를 바라봄으로써 쁘라끄리띠의 전변이 시작된다. 이것은 쁘라끄리띠의 속성인 삼질(tri-guna)의 위상변화로 인하여 현상적 경험 세계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첫 번째가 사뜨와(sattva) 속성이 강한 붓디(buddhi, 또는 mahat)가 발생된다. 이것은 우리가 분별하고, 숙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기능이다. 이 붓디에 의하여 우리는 주관과 대상, 자아와 비아, 경험주체와 경험대상을 구분한다. 이와 같이 붓디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적 핵심을 이루며 인간의 모든 삶의 기반을 제공한다. 이 붓디는 대승불교 유식사상의 알라야식과 비견될 수 있으며, 기신론의 알라야식과도 많은 부분에서 유사성이 확인된다.

두 번째는 붓디(buddhi)로부터 전변되어 나오는 것이 자아의식인 아항까라(ahaṃkāra)이다. 이것은 ‘나’, ‘내것’이라는 관념의 근원이다. 이 아항까라는 유식불교의 제7말나식(mano-nāma-vijñāna), 즉 아치(我痴), 아만(我慢), 아애(我愛), 아견(我見)의 네 가지 번뇌에 물든 염오의(染汚意)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이 아항까라로부터 두 무리가 전개된다.

첫째, 다섯 감각기관과 다섯 운동기관, 그리고 마음(manas, 의근)이다. 둘째, 미세한 것과 조대한 것의 두 형태를 가진 다섯 물질적 요소이다. 여기에서 다섯 감각기관과 다섯 운동기관은 우리의 의식생활에 관련된 것이며 따라서 아항까라의 삿뜨와의 요소로부터 일어나고, 다섯 미세 원소인 오유(五唯)와 거친 원소인 오대(五大)는 아항까라의 따마스의 요소로부터 발현된다. 아항까라의 라자스의 측면은 그 자체로서 어떤 대상도 생출(生出)시키지 않고 다만 다른 두 구나가 각각의 대상을 생출시키도록 에너지를 공급한다.

마나스는 다양한 외부세계로부터의 감각자극들을 지각표상으로 종합하는 기능을 지닌다. 이것은 지각과 행동 모두에 해당한다. ‘마나스의 기능은 분별하는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나스는 다섯 지각기관과 다섯 행위기관으로부터 오는 감각이나 인상을 결정하거나 정돈하여 ‘아항까라’를 통해 ‘붓디’에 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마나스는, 한편으로는 붓디, 아항까라, 다른 한편으로는 다섯 지각기관과 다섯 행위기관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바깥세계와 내면세계를 연결해주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논의한 것을 정리하면 쁘라끄리띠와 뿌루샤의 만남으로 인해, 쁘라끄리띠로부터 붓디가 생성되고, 붓디로부터 아항까라가 생기고, 아항까라로부터 오유(五唯)와 11근이 생기고, 오유로부터 지 ․ 수 ․ 화 ․ 풍 ․ 공의 오대(五大)가 출현한다. 이것이 상캬・요가철학의 유전의 전변이다.

이처럼 두 사상체계에서 알라야식에서의 주관과 객관, 그리고 뿌루샤와 붓디의 주관과 대상의 관계가 갖는 기능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상과 아항까라 양쪽 모두 ‘이것은 나다’라고 하는 주관의식과 알라야식과 붓디를 의지처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또한 기신론의 의식과 상캬철학의 마나스는 다양한 외부 세계로 부터의 감각자극들을 지각표상으로 종합하는 기능을 지닌 것으로 유사하다. 이처럼 기신론과 상캬철학이 현상세계로 전개되는 과정이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와 요가철학의 환멸문

기신론의 ‘환멸’은 육바라밀수행과 같은 오문(五門)의 수행으로 정진하여 범부각(凡夫覺)・상사각(相似覺)・수분각(隨分覺)을 거쳐 구경각(究竟覺)에 이르러 깨달음을 이룬다. 요가수뜨라의 환멸은 8지칙의 수행을 통해 유상삼매(有相三昧, saṃpra jñāta-samādhi)에서 무상삼매(無相三昧, asaṃprajñāta-samādhi)로, 유종자삼매(有種子三昧, sabīja- samādhi)에서 무종자삼매(無種子三昧, nirbīja-samādhi)의 수행으로 식별지(識別知)를 얻어 깨달음을 이룬다.

먼저 기신론에서는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여 망심이 청정한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정법훈습이라고 하며 환멸에 해당한다.

중생은 누구나 본래 깨어있는 마음인 본각(本覺)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본각을 지키지 못하고 연을 따라 움직여 망념을 일으켜 깨어있지 못한 불각의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불각의 상태임을 자각하고, 실천적 수행을 통하여 본래 깨어있는 마음인 본각을 회복하는 것이시각(始覺)이다. 시각의 단계가 깨달음으로 향하는 환멸이다. 범부의 계위를 떠나서 성자의 계위로 들어가는 과정으로 염(念)을 소멸해 가는 정도에 따라 불각・상사각・수분각・구경각으로 나눈다.

먼저 한 생각이 일어나 생겼다가 머물렀다가 달라졌다가 멸하는 과정을 생 · 주 · 이 · 멸이라고 한다. 여기서 멸의 단계가 불각인 범부각으로 감각식 수준에서의 멸상을 깨달은 상태이다. 앞생각이 잘못 됐다는 것을 지나고 난 다음에 알고 반성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게 지위로 보면 열 가지 믿음[十信]의 단계이다. 십신에 들어가기 전에는 살생(殺生) · 투도(偸盜) · 사음(邪淫)의 세 가지 몸에 관련된 행위와 악구(惡口) · 양설(兩舌) · 망어(妄語) · 기어(綺語)의 네 가지 입에 관련된 행위로 악업을 일으켰으나 신위(信位)에 들어가서는 일곱 가지 악업이 실로 나쁜 것임을 깨달아 멸상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다음 상사각은 범부각을 넘어서 이승(二乘)과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의 경지로 의식차원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념이 바뀐다는 것 또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념에 이상(異相)이 없게 된다. 이 이상은 무명이 주상(住相)과 화합하여 계탁할 때 아(我)와 아소(我所)가 공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탐(貪) · 진(瞋) · 치(癡) · 만(慢) · 의(疑) · 견(見)을 일으킨다. 이 계위에서 깨달음은, 깨달음이긴 하지만 완전한 깨달음은 아니고 비슷하다 하여 상사각이라고 부른다.

수분각은 법신보살의 깨달음이다. 법신보살은 초지(初地)내지 2지 이상의 지상보살(地上菩薩)이다. 이 단계는 의식을 넘어 말나식 차원의 깨달음이다. 염이 머무름[念住]을 깨달아 주상이 없게 되는 단계이다. 이 수분각은 자아의식이라는 아치, 아만, 아애, 아견 이렇게 네 가지 번뇌가 있는데 이것을 타파 하는 수행단계이다. 이것은 ‘내다’, ‘내 마음밖에 경계가 따로 존재한다’는 인아집(人我執)과 법아집(法我執)이 타파되는 단계이다. 그래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이공(二空)에 통달하여 인무아와 법무아를 이루어서 주상이 없는 것이다.

보살지를 다 완성한 보살은 제10지를 넘어 불지(佛地)로 나아가려는 보살로, 이 단계는 념에서 생상(生相)을 없애는 단계이다. 이것은 알라야식 수준에서의 깨달음이다. 시각의 모습이 말나식을 지나 알라야식의 미세망념인, 업상, 전상, 현상을 넘어 마음이 처음 생한 곳을 깨닫고 보니, 마음에는 처음의 상이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나아갈 바 없이 궁극에 이른 것이므로 이를 구경각이라고 한다.

한편 요가철학에서의 요가는 산란하여 밖으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안으로 고요하게 가라앉게 하는 의미라고 한다. 이렇게 산란하던 마음이 고요하게 몰입되어 마음이 안정화된 상태를 삼매라고 부른다.

요가수뜨라에서는 삼매에 대해 하나는 유상삼매와 무상삼매로 구분하고, 다른 하나는 유종자삼매와 무종자삼매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유상삼매는 거친 대상을 인식하는 삼매인 유심삼매(有尋三昧), 미세한 대상을 인식하는 삼매인 유사삼매(有伺三昧), 즐거운 마음의 삼매인 환희삼매(歡喜三昧), 순수정신과 대상의 동일성을 의식하는 아상삼매(我想三昧)의 단계로 깊어져 간다. 그리고 무상삼매에 도달하면 의식속에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이나 분별이 모두 끊어져, 어떠한 분별도 남아 있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잠세력은 남아 있는 상태이다.

다음으로 유종자삼매에서는 거친 대상을 동반한 유심등지, 거친 생각을 동반하지 않는 무심등지, 미세한 생각을 동반한 유사등지로 깊어져간다. 무사등지에 도달하면 마음이 청정해지며, 마음이 직관적인 지혜[慧, prajñā]로 채워진다. 이 직관적 지혜에 의해 생긴 잠세력(saṃskāra)은 다른 잠재인상(vāsanā)이 일어나는 것을 차단한다. 이렇게 무사등지에 의해 생긴 상스까라 마저도 억제될 때 무종자삼매(nirbīja-samādhi)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유상/무상삼매에서의 무상삼매와 유종자삼매에서의 무사등지는 둘 다 잠세력을 지우는 단계로 보아 둘을 같은 단계에 배대하였다.

이렇게 삼매지혜에 의해 형성된 잠세력은 번뇌를 소멸 시키고 마음을 자유롭게 하여 뿌루샤와 쁘라끄리띠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이 식별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지혜를 얻었더라도 그것에 조차도 어떤 경우에도 아무런 욕망을 내지 않는 자에게는 식별지로부터 법운삼매의 경지가 나타난다. 이처럼 법운삼매의 경지를 얻은 자는 참된 지혜를 통해 무지로 말미암은 여러 번뇌들이 완전히 차단되며, 따라서 과거로부터 잠재해 있던 잠재업들이 완전히 일소된다. 이렇게 번뇌의 업이 모두 사라질 때 지혜를 가진 사람은 살아 있으면서도 해탈하는 생전해탈(生前解脫, jīva-mukti)이 성취된다.

이상에서와 같이 기신론과 요가수뜨라에서 환멸되어가는 과정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먼저 기신론에서는 범부각을 넘어 상사각까지의 깨달음은 이승의 깨달음으로 의식의 세계가 완전히 정화되는 단계이다. 그리고 수분각인 말나식의 단계에서부터 잠재의식이 점점 소멸되어가서 구경각인 아뢰야식 단계에서 잠재의식과 무의식이 차단되어 모든 번뇌가 소멸하면 불지에 이르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다음 요가수뜨라에서는 유상삼매의 네 가지 삼매와 유종자삼매의 유심, 무심, 유사등지 까지가 의식이 소멸하고, 잠재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무상삼매와 유종자삼매에서의 무사등지까지가 잠세력이 없어져가서 무종자삼매에 와서 완전히 차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두 사상체계가 번뇌가 소멸되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불교와 요가철학의 깨달음

기신론에서는 보살의 모든 수행을 다 한 이들이 구경각에 가서 깨닫는 것이 근본지(根本智)를 얻는 것이고, 그 다음에 후득지(後得智)를 얻어 중생 구제하는 것이 기신론의 깨달음이다.

기신론에서의 본각에는 지혜의 맑은 모습인 지정상(智淨相)과 도저히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보인 모습인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있다. 먼저 지정상(智淨相)의 모습은 안으로 번뇌를 만나면 번뇌를 없애주는 역할[法力薰習]을 한다.

 이렇게 지정상이 청정한 본성을 회복하면, 지혜가 맑아짐(智淨相)에 의하여 모든 뛰어난 경계를 짓고, 무량한 공덕의 상이 항상 끊어짐이 없이 이어져,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상응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 이익을 얻게 한다. 이러한 불가사의한 작용력이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다. 지정상은 안으로 자기 번뇌를 없애는 지혜(智慧)의 모습이고, 부사의업상은 밖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慈悲)의 모습이다.

한편 상캬 · 요가철학에서는 쁘라끄리띠의 활동의 목적은 붓디(buddhi)로부터 다섯 거친 원소에 이르기까지 쁘라끄리띠의 전개활동은 전적으로 뿌루샤의 해탈을 위한 목적론적인 것이다.

요가철학에서는 요가의 8단계의 수행을 통하여 무지를 제거하고 뿌루샤와 뿌라끄리띠가 다름을 아는 것은 식별지를 통해서이다. 이러한 식별지를 얻은 요가행자는 근본속성은 본래 상태로 회귀하여 균형을 이루고, 진정한 자아로 상정된 뿌루샤는 현상적 자아를 떠나 본래의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이 독존이다. 그러므로 요가철학에서 뿌루샤가 독존을 성취했다는 것은 쁘라끄리띠도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불교는 한마음이 공(空)이기도 하고 불공(不空)이기도 하다. 기신론에서는 인연관계를 설하기 때문에 깨달음을 성취한 진여가 번뇌가 나타나면 자타의 번뇌를 제거하고, 중생이 구제를 요청하면 중생구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요가철학에서는 해탈을 하고 난 이후에 대한 설명은 없다. 독존만이 설명되어 있다. 이것이 불교와 상캬 · 요가철학의 차이이다. 

      

           지광(智光)스님 약력

    · 1991년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졸업(미술학사).

    · 1996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 졸업(교육학 석사)

    · 2012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졸업(인문학 석사)

    · 2018년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졸업(불교문예학 박사)

    · 2017년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한문아카데미 수료

    · 2003 ~ 2006년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출강

    · 현 서울 범혜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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