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 선암사 대웅전.
조계산 선암사 대웅전.

최근 조계산 선암사의 소유권을 두고 광주고등법원이 결정문을 통보해 종단이 이에 대해 ‘선암사의 지위에 관한 태고종의 입장문’을 발표한 바 있다. 선암사 사찰 소유에 대한 태고종의 기본 입장은 첫째, ‘선암사는 원칙적으로 현 조계종과 무관한 태고종의 고유한 근본 사찰이다’, 둘째, ‘1962년 정치권력이 주도한 통합종단은 태고종과는 무관하다’, 셋째, ‘조계종은 선암사에 대한 부당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 ’라고 정리했다. 앞으로 끝없는 법리논쟁과 법정공방이 예고되어 본격적인 소송전이 전개되겠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등기명의에 의한 소유권을 떠나서 사자상승(師資相承 : 스승이 제자에게 물려주는)의 관점에서 접근해 보자.

선암사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기를 거치면서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춰 갔다. 고려-조선시대에 가람으로서의 규모를 갖추고 많은 고승석덕을 배출한 유서 깊은 사원으로 성장했다. 조계산을 끼고 있는 선암사는 역사와 전통이 쌓이면서 한반도의 명승고찰로서의 위상을 정립했을 뿐 아니라, 이름난 고승들을 배출하는 유명세를 타게 된다. 조계산 선암사의 이러한 역사와 전통은 구한말시기에 나타난다.

조선조는 숭유억불 정책을 실시하면서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 승니(僧尼)들에게 도성(서울) 출입을 금지시켰다. 물론 조정과의 업무나 고관대작들과의 공무 또는 사적인 업무가 있을 시엔 어느 정도 출입이 허용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도성출입을 금지, 불교는 산중에서 자생적으로 존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삼국시대나 통일 신라 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의 불교는 도성 안이나 근교에 있었고, 도성과 거리가 먼 명산대천의 절이라고 할지라도 항상 도성과 연결선상에서 수행 포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태고총림 선암사에서 봉행된 제 42기 합동득도 수계산림 회향식.
태고총림 선암사에서 봉행된 제 42기 합동득도 수계산림 회향식.

불교가 인도에서 처음 형성될 때, 사문(비구)이나 사원은 왕성(王城)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첫째 도성 근처에 있어야 먹는 문제가 해결되었고, 특히 당시의 사문들은 걸식(乞食)해서 해결하였다. 식사를 직접 준비한다거나 자급자족하려면 수행에 많은 부담이 되어서, 이들은 애초부터 얻어먹으면서 도를 닦았던 것이다. 처음에 불교 비구들은 독립적인 수행단체가 아니었고, 사문(沙門)에서 시작됐다.

사문은 산스크리트어로는 쉬라마나(Śramaṇa)라고 하며, 빨리어로는 사마나(samaṇa)라고 불렀다. 대강의 뜻은 ‘찾는 자’이다. 무엇을 찾는다는 것인가. 황금(돈)이나 명리(名利)를 찾아다니는 ‘꾼’이 아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리를 찾아다니는 수행자’이다. 수행자이면서도 드러내놓고 성직(聖職)을 과시하면서 여기저기 배회하는 그런 성직의 종교꾼이 아닌 그야말로 소박하고 내핍과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면서 은둔 수행을 위주로 하는 구도자가 바로 사문의 본래 의미이다. 이 사문들은 자이나교나 불교 이전 베다시대부터 존재했던 인도 고대의 은둔 수행자들로부터 유래한 전통이다.

이들 사문들은 자연스럽게 왕성 주위에서 살아갔다. 개중에는 저 멀리 히말라야의 산록이나 외진 곳에서도 은둔 생활을 했겠지만, 대체적으로 도성근교의 궁성 주변에서 맴 돌면서 뭔가를 찾아다니는 진리를 닦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사문들이 단순히 염세주의나 세속 삶의 실패자들이 아니라 뭔가 진리를 찾아 능동적으로 출가사문의 길로 나선, 구도자들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대개 이들 사문들은 식자층(識者層)이었다. 인도 고대사회의 상층에 속했던 브라만 계급에서, 어느 정도의 세속 삶을 영위한 다음에 실천적 수행을 통한 형이상(形而上)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였다. 나중에는 브라만이라는 상층의 지식층만이 아닌 다소 중하층의 사회적 신분을 지닌 사람들까지도 합류하게 되었지만, 사문의 정신과 근본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불교의 사문들은 고오타마 싯다르타의 정각(正覺)으로 시작되었지만, 사문의 정신이나 전통은 변하지 않았다. 불교의 비구형제들에 대한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초기엔 고오타마 붓다 사문들이라고 칭했다. 사문은 사문이지만, 고오타마 붓다 사문으로 불렀다. 기존의 베다사문이 있고, 자이나교 사문이 있고, 고오타마 붓다 사문이 있고, 기타 다양한 사문단체들이 존재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오타마 붓다 사문은 독립적인 형태의 사문 단체로 정립되고 비구승가가 형성되면서 불교승가란 새로운 종교단체로 독립, 발전하여 불교란 큰 종교로 성장했다.

이제 다시 구한말의 조선불교계로 이동해 보자. 산중불교란 자생불교시대에서 도성과는 담을 쌓고 있었던 조선불교계에는 큰 변화의 물결이 닥쳐오고 있었다. 조선 왕조는 이런 도도한 외세의 물결에 빗장을 잠그고만 있을 수는 없었고, 왕성의 문을 여는 것과 함께 사회 각 분야에서 문호를 개방하고 개화(改化)의 시대에 대처하지 않으면 생존마저 위태할 지경이었다.

“조선왕조 제26대 고종 32년(1895년)4월에 승려들의 성안(城內) 출입금지가 해제되었다. 성안 출입을 금지한 것은 실은 서울 성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국 승려들의 하산(下山) 금족령과 다를 바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산문 안에서만 갇혀 살다시피 하였던 승려들이 산에서 내려와 세간사회에서의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길이 트였으니, 이로 인해 자율적 근대 종단의 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太古宗史> p89.

경운당 원기 대선사 진영. 선암사 성보박물관 소장.
경운당 원기 대선사 진영. 선암사 성보박물관 소장.

조선왕조에서 불교에 선심을 베푼 것 같지만, 사실은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를 해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상황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이 무렵이면 이미 “외국의 선교사와 일본의 승려들이 들어와 서울 성안에서까지 각기 종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승려들이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요처에서 활발하게 포교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우리 승려들은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러한 모순을 목격한 일본 일련종의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가 당시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에게 ‘조선 승려의 성안 출입을 허용하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는데, 총리대신이 이 건의문을 국왕에게 아룀으로써 비로소 국내 승려의 서울 성안 출입을 허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太古宗史> p89.

승려의 도성 출입이 허용되고 나서 10여년이 지나면서, 새로운 종단이 출현했는데, 그것은 원종(圓宗)의 성립이다. 원종은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을 꾀하면서 큰 반발에 부딪치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임제종의 성립이다. 원종 종정 이회광의 매교(賣敎)적 처사에 격분한 호남의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서 1910년 승려대회를 열었다. 호남승려들은 영남의 승려들과 합세하여 한용운(韓龍雲).오성월(吳惺月) 등의 유세(遊說)와 격문을 돌려 홍보활동을 전개한 다음, 1911년 1월 15일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임제종 임시 종무원은 송광사에 두고, 임제종 관장(종정과 같음)으로 선암사(仙巖寺)의 김경운(金擎雲)스님을 선정하였다.

설명에 따르면, 김경운 스님은 연로해서 만해 한용운스님이 관장대리로 활동했다고 했으며 북쪽(서울)의 원종과 대치하면서 조선불교의 정통을 견지하려 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 선종(禪宗)이 고려 태고국사(太古國師)이래로 임제종 계통이었기에 임제종을 세웠다는 것이다.

우리는 작금의 선암사 소유권 문제에 직면하면서 선암사의 김경운스님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선암사와 김경운 스님의 이야기는 차회에서 더 상론하겠다.

 

 원응스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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