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태고종의 창종주이며 불이성 법륜사의 중창건주인 진종대륜 대종사 열반 제 39주기 추모 다례가 2월 3일(음력 12월 18일)  불이성 법륜사 대불보전에서 봉행됐다. 대륜 조사님은 한국불교 뿐 아니라 태고종의 창종주로서 근 현대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진종대륜 대종사 열반 제39주기를 맞아 한국불교신문 논설위원 원응스님이 불이성 법륜사와 태고종 창종을 중심으로 대륜 대종사를 재조명하는 글을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보살계 수계법회에서의 대륜스님(사진 상단 좌석 오른쪽에서 첫 번째).
보살계 수계법회에서의 대륜스님(사진 상단 좌석 오른쪽에서 첫 번째).

 

            대륜 대종사 연구와 근현대 한국불교

이제 대륜 대종사에 대한 연구 분야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그동안 단편적으로 대륜 대종사에 대한 전기적 연구는 진행되어 왔다. 불이성 법륜사 내에 ‘대륜 · 덕암 불교문화연구원’에서 완벽하진 않지만 일종의 승전(僧傳) 형식의 전기적 연구는 몇 분에 의해서 발표된 바 있다. 또한 법륜사와 관련한 대륜 대종사의 포교활동에 대해서도 일부 단편적인 연구 발표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륜 대종사가 근현대 한국불교 교단사적 범주에서의 연구라든지 금강산 불교에서의 위상은 전연 연구가 없다고 해야 하겠다. 다만 불교분규 시기에 등장한 대륜 대종사의 활동이나 위치에 대해서는 신문지상을 통한 보도에 대한 자료 정도이고, 태고종 창종 시기에 종정으로서의 공식적인 ‘종정교시’에 나타난 자료 등이다.

앞으로 불이성 법륜사는 물론이지만 ‘대륜 · 덕암 불교문화연구원’에서의 연구 진행도 체계적으로 예산을 세워서 진척되어야 할 뿐더러 종단 차원에서 대륜대종사를 비롯한 역대 종정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라고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근 현대 법륜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고승들에 대한 연구 또한 당연히 이뤄져야 하며 태고종 역대 총무원장이나 종회의장 등 현대 태고종 지도급 스님들에 대한 연구도 부수적으로 연구되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대륜 대종사의 연구에만 국한해서 담론해 본다면, 첫째 대륜 노사가 출가하고 성장한 금강산불교와 유점사에 대한 연구가 전제돼야 한다. 둘째는 경성(서울)불교와 불이성 법륜사에 대한 연구, 셋째는 불교분규 시기의 대륜 대종사의 활약과 위치에 대한 연구, 넷째 태고종 창종과 열반에 이르는 연구 순으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대륜 대종사의 불교사상과 현대한국불교에서의 위상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2017년 10월 13일 '한국불교태고종의 전법과 포교 활동'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심준보 금강대학교 연구교수가 '법륜사와 현대포교- 대륜화상을 중심으로'를 발표하고 있다.    한국불교신문 자료사진.
지난 2017년 10월 13일 '한국불교태고종의 전법과 포교 활동'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심준보 금강대학교 연구교수가 '법륜사와 현대포교- 대륜화상을 중심으로'를 발표하고 있다. 한국불교신문 자료사진.

금강산 불교 연구가 왜 중요하냐 하면, 대륜 노사가 활약했던 시대의 불교는 조선시대 말기의 불교로서 산중불교로서 자생불교 시대이다. 조선조 시대의 숭유억불 시대에도 금강산 사찰들이 일정한 사격을 유지하면서 불교신앙과 수행전통을 이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왕실과의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정부의 종교정책과는 무관하게 왕실은 금강산의 주요 불교사찰들인 건봉사, 신계사, 유점사, 표훈사 등을 왕실 기도처로 삼아서 적극 지원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대륜스님이 당시 안변 석왕사 포교소를 매입해서 유점사 경성 포교당으로 개설했던 배경은 왕실과의 관계를 십분 활용했을 개연성을 전연 배제할 수 없다.

지금의 입장에서 한국불교계는 전국이 평준화 되었다가 불교세가 최근에 이르면 영남 지방으로 기울고 있는 현상이다. 해방 이전만 해도 금강산 불교는 조선의 승니(僧尼)들에게는 불교성지로서의 이상향이었다. 물론 남한지역에도 유명 사찰이 많이 있고, 기도처나 선방 등이 많았지만, 조선 후기나 대한제국 시대에 불교 수좌들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마하야나=대승) 선방에 가서 한 철(안거) 나는 것을 전통과 영광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대 이름난 선사나 고승치고 마하연을 거치지 않은 선승은 없을 정도로 마하연 선방은 너무나 유명했던 것이다. 통도사 경봉스님의 제자로서, 중앙종회의장을 역임했던 벽안스님의 회고기인 ‘40년 전의 금강산 <마하연>’을 소개해 보자.

“四十年前의 금강산 ‘마하연’

나의 선방 첫 철은 금강산 ‘마하연’이다. 기묘년 여름철이니까 지금부터 약 四十년이 되는가 한다. 그때 결제 대중은 七十명으로 기억한다. 청담스님이 입승이었고 정말 발심납자만이 운집해 있었다. 기억나는 대로, 지금 해인총림의 방장이신 성철(性徹)스님도 있었고, 서울 삼성암의 본공(本空)스님, 얼마 전에 입적하신 성호(嚴性昊)스님, 지원(志圓)스님, 해인사 주지로 계시던 지월(指月)스님, 모두가 쟁쟁한 용상(龍象)들이었다. 조실스님은 정화 때 종정이시던 설석우(薛石友)스님이었고 주지를 겸하셨다.

밥 먹고 살아가는 생활이 오직 참선 하나에 묶여진 생활이어서 세 때 공양이 끝나면 양치하고 선방에 돌아앉기가 바빴다. 거의 모두가 그러했다. 입 방선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모두가 공부에 열을 내는 바람에 선방에는 항상 고요한 가운데 더운 열기가 넘쳐 있었다. 꼭 정해논 것은 없었어도 많은 수효가 잠자는 시간도 버리고 참선하고 있었으니 밤에는 일부는 자고 일부는 앉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조실스님의 상당설법은 결제와 해제 때뿐이었고 혹 의심이 있는 사람은 도반에게 묻거나 영원암에 머무시던 조실스님께 찾아갔었다. 선방 살림살이는 감사인 우봉(愚鳳)스님이 맡아 했다. 그때의 신도들의 정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대중이 七十명인데 매일 각지에서 대중공양이 모여들었다. 주로 서울 신도로 기억한다. 그때의 선방의 외호 역활을 하여 큰 화주 몫을 단단히 하신 분은 고인이 된 최원허(崔圓虛)스님과 지금 서울 간동 교당에 계신 박대륜(朴大輪)노사다. 이 스님들은 많은 외호활동을 하셨던 것이다. 선방이 바로 부처님을 탄생시키는 곳이라는 신앙은 신도들 간에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서로 다투어 외호하고 공양하려고 하였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찌 스님들의 정진이 소홀할 수 있었겠는가. 정말 발심납자들만 모인 성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대중 속에는 처사님도 七·八인 있었는데 각지에서 모여든 발심한 불자였다. “

이상의 글을 보면 현대 한국불교의 기라성 같은 스님들의 법명이 등장하고, 마하연 외호 역할로서 간동 교당(금강산 유점사 경성 포교당 불이성 법륜사)에 계신 박대륜 스님이 등장한다. 이런 회고기도 대륜 대종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런 자료 수집을 위해서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연구원을 채용해서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의욕이나 구두(口頭)의 주창만으로 일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문도에게만 이 일을 맡겨 놓는 것도 역부족이다. 종단적인 차원에서 문도들과 결합하여 함께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위원회가 결성되어야 한다.

대륜스님이 16세때 출가했던 금강산 유점사의 예전 모습.  6 ·25전쟁 때 모두 소실돼 현재는 터와 석탑만 남아 있다.
대륜스님이 16세때 출가했던 금강산 유점사의 예전 모습. 6 ·25전쟁 때 모두 소실돼 현재는 터와 석탑만 남아 있다.

예로부터 금강산을 보고 여행기를 남겼는데, 조선시대에는 농암이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근현대에 와서는 조선 말기의 문신 조성하(趙成夏)가 《금강산기(金剛山記)》를, 육당 최남선이 《금강예찬》을, 춘원 이광수가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의 기행수필을 1922년 3월∼8월까지 ≪신생활(新生活)≫에 발표했다고 하는데, 이광수 전집에 실려 있다.

이제 대륜 대종사의 출가 본사이고 대륜 노사가 성장한 금강산 유점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일별해보자. 필자는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와 《금강예찬》을 읽으면서 많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육당 선생의 《금강예찬》은 금강산 불교를 공부하는데 더 없는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楡岾寺는 金剛 四寺의 最大者로, 31本山에 列한 一方의 巨刹입니다. 뒤에는 靑龍山, 앞에는 南山, 어디를 보든지 푸근한 맛이 들이쟁여서, 마치 볏가리에 둘린 長子집 마당에를 들어간 것 같으며, 오직 西로 彌勒峰의 큰 주먹이 雲間에 툭 불거져 겨우 金剛山的 奇秀味를 가졌습니다. 시내를 눌러 지은 山門인 山映樓에는 오르면, 일본의 산수화 같은 둥글뭉슬한 사방의 景色이 한눈에 다 들어옵니다. 뾰족뾰족에 날카로왔던 신경이 금시에 沈靜하여짐을 깨닫습니다.”

이 짧은 글 속에는 금강산과 유점사가 그림처럼 소개되고 있다. 이런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금강산 유점사를 상상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런가하면 조선 후기의 학자요 문신이며 숙종 때 대사성 등의 관직을 지냈던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 의하면 마하연과 유점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마하연(摩訶衍)은 산의 정중앙에 있는데 뒤로는 중향성을 지고 있고 앞으로는 담무갈의 여러 봉우리를 안고 있다. 신라의 의상 법사(義湘法師)가 창건하였다. 동쪽에는 묘길상암(妙吉祥菴), 반야암(般若菴), 불지암(佛地菴)이 있고 남쪽에는 보덕암(普德菴), 금수암(金須菴), 은적암(隱寂菴)이 있으며 동북쪽에는 상중백운암(上中白雲菴), 성불암(成佛菴)이 있고 서쪽에는 만회암(萬灰菴), 칠보암(七寶菴)이 있다. 혹 무너져서 터만 남아 있거나 혹 옛 이름만 전하는 것들은 지금 상세히 밝힐 수는 없다.”

“사찰로서 가장 큰 것은 유점사(楡岾寺)인데, 동남쪽에는 명월교(明月橋), 백운교(白雲橋), 단풍교(丹楓橋), 삽협교(三峽橋)가 있다. 또한 환희점(歡喜岾), 장항구점(獐項狗岾), 니대(尼臺)가 있으며 동북쪽에는 정륜암(正崙菴), 흥멸암(興滅菴), 흥덕암(興德菴)이 있다. 서쪽에는 적조암(寂照菴), 명적암(明寂菴), 백련암(白蓮菴), 자월암(紫月菴)이 있다.”

이처럼 이런 글들을 통해서 금강산 불교와 사찰을 유추하고 재구성해서 시나리오를 다시 재구성하면서 대륜 대종사를 중심에 놓고 연구하는 작업이 당장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원응스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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