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를 추구하는 것은 혼자 있으나 누가 있으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여일해야 한다”

   방거사와 제봉선사

어느날 제봉선사와 방거사가 만나 나란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방거사가 한 발 앞에 나가며 “나는 선사보다 한 걸음 능가했다” 하니 제봉선사는 “뒤도 없고 앞으로 향할 것도 없다. 이 늙은이가 선수(先手)를 치려 하는구나.”하였다. 이에 방거사가 “괴로움 중의 괴로움은 이와 같은 한마디가 아니겠지” 하니 제봉선사가 “이 늙은이가 만약 만족하게 여기지 아니한 것을 두려워 하는구나.”하였다.

방거사가 “이 늙은 것이 만약 알게 여기지 않으면 제봉선사는 무엇을 견디어 내려는가”하니 선사는 “만약 몽둥이가 손에 있었더라면 박살나게 때려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방거사는 선사를 주먹으로 한 대 때리면서 “심한 것은 안 좋은 것이야.” 하였고 선사는 비로소 몽둥이를 잡아 방거사 앞에 세우고 말하기를 “이 도적이 오늘 한바탕 대궐이 무너졌구나. 내가 옹졸한 것인가, 방거사가 재주가 있는 것인가”라고 하자 방거사가 손뼉을 치면서 “비겼다, 비겼다.” 하였다.

방거사와 제봉선사가 나란히 걸어갔다. 혼자 걸어도 이유가 있고 둘이 걸어도 이유가 있다. 설령 이유가 없더라도 이유 없는 것이 이유이다. 방거사와 선사는 두 사람 다 오래 수행하며 도(道)를 구하는 노련한 수행자들이다. 이들이 나란히 걷는다는 말은 두 사람이 똑같이 도(道)의 동반자이며 그 도의 수준이 나란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동반자, 즉 친구는 머물러 있거나 퇴보하면서 정을 나누는 것은 진정한 관계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와 속가의 가족관계까지도 나란히 진전하지 않으면 바람직하지 않다.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나아가고 정비해야 한다. 목표가 같거나 같지 않거나 선의(善意)의 경쟁이 밝고 건강한 사회를 이룬다.

방거사가 나란히 걸어가다 갑자가 선사보다 앞서 걸으며 한걸음 능가했다고 하는 것은 걸음이 아니라 도(道)가 한 발 앞섰으니 선사도 나를 앞서라는 말이다. 그리고 도를 추구하는 것은 혼자 있으나 누가 있으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여일해야 하는 것이니 방거사가 선사에게 이를 건드려 본 것이다.

이에 제봉선사는 “내가 추구하는 도(道)는 뒤도 앞도 없고 앞으로 나갈 것도 없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꾸준하다. 그런데 방거사는 공연히 선수를 치려한다”고 대꾸하였다. 이 대답에 방거사는 우리의 괴로움은 지금 주고 받는 이 말이 아니라 구도자(求道者)의 문제는 몽매간(夢寐間)에 항상 분명한 향상을 구하려 하는 것일 뿐이라 했다. 이 말에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선사가 말한 것은 만족은 정지된 관념이니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구도자의 만족은 철두철미한 정진에 있고 정진하지 않는 스스로를 경계한다.

구도자는 ‘도’라는 과녁을 향해 활을 떠난 화살이기에 방거사는 제봉선사에게 내가 선사의 도정(道情)을 긍정하지 않으면 선사가 도(道) 이외에 어떠한 것을 견디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방거사가 도에 철저한 정진이 없다면 견디지 못하고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을 한다.

두 사람 중 하나라도 나태하다면 도반(道伴)을 상실하므로 몽둥이로 경책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경책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에 방 거사는 경책의 방법으로 몽둥이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경책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다.

제봉선사는 기존의 모든 제불조사에 도전하기 위해 제불조사의 정법을 본받으려는 것은 도의 도적이라 할 수 있기에 도적이 삼세제불의 무상심심미묘법의 대궐을 법으로 무너뜨렸다고 하였다. 선사는 이 도의 행위로 일어난 책임이 내가 옹졸해서 일어난 일인 것인지 방거사의 재주가 좋은 것인지를 묻는다. 옹졸하다는 것은 오직 도(道) 밖에 모르는 외길의 판단이란 뜻이고 재주가 좋다함은 이 천지 생기기 전부터 있어왔고 천지가 없어진 후에도 변함이 없는 대궐을 무너뜨리니 재주가 좋은 것이다. 옹졸과 재주 좋은 것은 도(道)에서 한 가지이니 방 거사의 책임이기도 하고 내 책임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방거사가 비겼다함은 승부가 없다는 말이고 승부가 없음은 두 분의 공동 책임이란 뜻이다. 정말 이 경지에서 손뼉을 치고 웃지 않고 누가 견디겠는가. 그러나 또한 비긴 것은 끝난 것이 아니라 재 대결해야 한다는 선전포고이기도 하다.

방 거사와 제봉선사는 과거칠불의 최초 부처님인 비바시불(毘婆尸佛)에 이르도록 도를 겨룰 도반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누가 승속(僧俗)이 있다 하겠는가. 어떤 분별에도 구애됨이 없이 방거사와 제봉선사처럼 돈독한 수행정진을 해야지 자칫 귀중한 인생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우리의 주인이 되어야겠다.

어느 날 제봉선사를 만나 방거사가 “여기에서 상봉(上峰)까지 가는 데는 몇 리나 됩니까?”하고 묻자 선사는 “그대는 어느 곳에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방거사가 이르기를 “탄탄하고 준엄해서 물어볼 수가 없도다” 라고 했다. 이에 선사가 “어느 정도인가?” 하니 방거사가 말하기를 “1, 2, 3”이라 했다. 이어서 선사가 “4, 5, 6” 이라고 하였다. 방 거사가 다시 “7은 어찌 말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선사는 “7을 말하면 곧 8이 나올 테니까.”라고 하였고 방거사는 “그만.”이라 하였다.

다시 선사가 “첨가하여 취하는데 맡기노라” 하니 방거사가 할(喝)을 하고 곧 방에서 나가버렸고 선사도 또한 할(喝)을 하였다.

이 대화는, 방거사가 선사에게 제봉의 도(道)가 얼마나 높으냐고 물은 것이다. 제봉선사가 방거사 그대의 도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되물으니 방거사가 이 날카로운 반문에 깜짝 놀라 물어볼 수 없다 하였고 제봉선사가 다시 어느 정도냐고 묻자 방거사가 ‘1, 2, 3’ 이라 했다.

방거사가 마지막에 할(喝)을 하니 제봉선사도 할(喝)을 하였다. 할(喝)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광대무변한 경지를 한 소리를 내어 칠통(漆桶)의 무명(無明)을 부수는 소리다.

할(喝) 이전에 도를 밝히는 전제(前提), 즉 먼저 내세우는 기본이 있어야 하고 할을 먼저 쓰면 할 이후에 할을 받침할 4구(四句)가 활구(活句)로 나와야 한다. 이를 4구 100비(四句百非)라 한다. 사구백비는 요즘말로 하면 변증법(辨證法)의 형식이다.

첫 번째 구는 정립(定立)이요, 두 번째 구는 반정립(反定立)이고 세 번째 구는 긍정종합(肯定綜合), 네 번째 구는 부정종합 (否定綜合)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유(有)와 공(空)으로 정립할 때 첫 번째 구는 현실 존재에 정하고 두 번째 구는 존재의 반대인 공에 정립하며 세 번째 구는 존재하기도 하고 무(無)이기도 하며 네 번째 구는 존재도 없고 무도 아니므로 부정적 종합이다.

처음과 둘째 구는 존재와 공(空)이 따로 있고 셋째 넷째 구는 존재와 무(無)에 비추어 존재도 아니요 무(無)도 아니라는 것이다. 백비는 부정을 거듭함으로써 참으로 사물의 진상을 알기 어려운 중생들에게 유무(有無)의 견해에 걸림이 없게 한다. 이를 구시구비(俱是俱非)요 쌍조쌍비(雙照雙非)라 한다.

그러나 할(喝)을 바로 쓰면 사자소리라 일체의 사견망상이 자취가 없고 할을 바르게 쓰지 못하면 풋강아지 방귀소리라는 옛말이 있다. 방거사와 제봉화상처럼 써야할 적소(適所)에 써야 할이다. 아무 데나 난발하는 것은 할이 아니다. 폭탄을 던질 때는 능히 폭파해야할 상황이 충분할 때 쓰는 것과 같다. 조사구는 불멸(不滅)의 소리이다. 이를 활구(活句), 즉 살아있는 말이라 했다.

조사구에 의심이 나면 활구를 어느 정도 알아듣는 사람이고, 의심이 돈독하면 깨달음으로 가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람이 불어도 느끼지 못하는 감각이 없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육조혜능 대사가 행자 시절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하셨는데 어디가 본래이고, 한 물건은 어떤 물건이며, 왜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인지 의심해야 한다.

어째서 방거사와 제봉선사가 할(喝)을 외쳤는지 의심해야 한다. 그러나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의심이 아니다. 이론적 언어에 불과한 말은 사구(死句), 즉 죽은 말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떤 것이 활구이고 어떤 것이 사구인 것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있어 조사가 계계승승한데 그 조사들의 말이 2600년이 넘도록 살아있다니 도대체 어떤 말인지,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말에 죽은 말과 산 말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은 어째서인지 의심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이를 알면 옛 조사구 (祖師句)를 듣거나 먼지 낀 책장을 넘기다 보더라도 실로 간담이 움츠러든다.

                            지허스님 (순천 금둔사 조실, 원로회의 의원)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