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태고종의 창종주이며 불이성 법륜사의 중창건주인 진종대륜 대종사 열반 제 39주기 추모 다례가 2월 3일(음력 12월 18일) 오전 11시 불이성 법륜사 대불보전에서 봉행된다. 대륜 조사님은 한국불교 뿐 아니라 태고종의 창종주로서 근 현대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진종대륜 대종사 열반 제39주기를 맞아 한국불교신문 논설위원 원응스님이 불이성 법륜사와 태고종 창종을 중심으로 대륜 대종사를 재조명하는 글을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불이성 법륜사와 금강산 불교

한국불교태고종의 창종주이며 불이성 법륜사의 중창건주인 진종대륜 대종사.
한국불교태고종의 창종주이며 불이성 법륜사의 중창건주인 진종대륜 대종사.

지금 대한민국은 평창동계올림픽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북한선수들이 참가하고 남북이 공동선수단을 출전시켜 하나의 한국(Korea)을 세계에 알린다는 홍보 전략이다. 남북 간에 정치적 목적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세계인들의 동계올림픽 축전에 남북한이 하나 되어 세계인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다. 남북한이 동시에 평창올림픽 축제에 참가하면서 금강산에서 남북한 공동 문화공연이 예정되어 있다가 취소되었는데, 아직 개최 날짜가 더 남아 있어서 어떤 변수가 있을지 알 수는 없다.

차제에 우리는 대륜 대종사님의 열반 제39주기를 맞이하면서 이제는 아득히 잊혀져 가는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의 불이성 법륜사와 대륜 대종사 그리고 금강산 불교를 주마간산격이나마 간략하게 재조명해 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필자는 1960년대 중반에 남도의 한 본사에서 입산출가해서 10여년 정도 삭발염의 생활을 하다가 도심에 조그마한 포교당을 열고 포교를 하다가 태고종과 인연이 닿게 되었다. 태고종에서 발행하던 월간<불교>지 편집장을 몇 년 하다가 태국에서의 비구 연수를 위해서 태국 행을 했는데, 가기 전에 태고종으로 전종을 해서 승적을 얻어 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대륜 노사의 손상좌였던 남허스님에게 건당입실까지 한 상태였다. 사람의 팔자란 기구해서 본의 아니게 조 · 태종의 승적을 가졌었고, 태국 비구승적까지 취득하는 참으로 국제적인 승적을 갖는 특이한 이력을 지니게 되었다.

고래희의 나이에 다시 태고종으로 귀환하는 이변이 연출되었는데, 인연치고는 너무나 얄궂은 인연이 아닌가 한다. 나의 인생행로는 나 자신이 생각해 봐도 너무나 이상스럽다고 하겠다. ‘70년대 중후반 편집장을 하면서 대륜 종정을 직접 친견한 것은 물론이고, 열반에 드셨을 때는 직접 입적 기사와 다비 문안 작성 등을 했다. 나중에는 간략한 ‘대륜노사의 일대기’를 <불교>지에 연재하기도 했었다. 지금 그 때의 ’연재기‘를 찾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나 경황이 없어서 그때의 기억과 노사의 행장에 의해서 글을 엮어보려고 한다.

‘70년대 불이성 법륜사에서 남허스님의 안내로 친견했을 때, 첫마디가 “머리 깎아!”란 한마디였다. 당시 나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고, 태고종에는 유발 승려들이 많았는데, 노사는 유발승들을 볼 때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머리 깎아!”라고 일갈하셨다. 그 당시 노사의 시봉을 종묵(홍제)스님이 하고 있었는데, 머리 기른 유발승들을 보기만 하면 다짜고짜로 “머리 깎아!”라고 소리치신다는 귀띔이었다.

대전 보문중 · 고 교장을 역임했던 용봉(이재복)스님, 광주 정광중 · 고 교장 월하(최태종)스님과 동국대 총장을 지내시고 태고종 종정을 역임하신 보성스님(정두석 박사), 그리고 총무원장을 지낸 운제스님(이영무 건국대학교 교수)에게도 아마도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총무원장을 역임한 운산(이규범)스님은 당시 유발승으로서 총무원 총무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만날 때마다 “머리 깎아!”라고 일갈하신다는 말을 수시로 들었다.

전승관을 짓기 전 불이성 법륜사의 모습.
전승관을 짓기 전 불이성 법륜사의 모습.

대륜 노사는 철저한 출가사문이셨다. 법륜사가 지금은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에 의한 전승관 3층에 대불보전과 함께 종무소가 있지만, 그때는, 요사채는 옛 구옥(舊屋) 형태였고, 대웅전 건물이 따로 있었다. 대륜 노사는 요사채 3평 남짓한 구들 장판방에서 기거하셨는데, 너무나 검소한 삼의일발(三衣一鉢)의 무소유 생활을 하셨다.

다닥다닥 붙은 옆방에는 정암 · 동산 · 인공 스님 등이 함께 있었다. 늦게 출가한 혜암스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붓글씨를 잘 쓰는 서예의 대가였다. 그리고 손자 상좌급 스님들도 10여명 이상이었다. 덕암스님은 아차산 영화사(화양사)에, 남허스님(수원 법흥사), 혜초스님(일본 유학, 상도동 영평사) 등은 수시로 법륜사에 오셔서 노사를 시봉하면서 종단을 이끌어 가셨다.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불이성 법륜사는 한국불교계의 고승대덕 스님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사랑방 같은 포교당이요, 사찰이었다. 특히 금강산에서 내려온 스님들의 집결처가 바로 불이성 법륜사였다. 지금이야 금강산 출신 스님들이 다 열반에 들고 말았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금강산 출신 스님들은 영향력이 있었다. 유점사 석왕사 건봉사 출신 스님들이 주로 불이성 법륜사를 드나 드셨던 것 같다.

대륜 노사는 1884년 강원도 간성에서 출생했으며, 1898년인 16세시에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하셨다. 10여 년 간 금강산 유점사를 비롯한 금강산 일대의 선방에서 교학과 안거를 마치고, 1908년 경, 상경(서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의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 3층과 4층이 불이성 법륜사이다.
현재의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 3층과 4층이 불이성 법륜사이다.

처음엔 각황사(현 조계사) 감원으로 취임하여 6년간 근속하였고, 1915년 34세 시에는 평양으로 옮겨서 유점사 포교당을 개설했으며 일본 불교를 견학하고 조선각지를 만행하기도 했다. 이후 1929년 48세 때, 현재의 불이성 법륜사에 전법도량을 개설했는데, 그 때는 안변 석왕사 포교당이었다. 당시 6천원에 포교당을 인수해서 불이성 법륜사로 개칭하여 도심 포교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이성 법륜사는 88년의 역사가 누적된 포교공간이다.

그때 이미 불교부인자은방생회를 조직하고 초대 포교사로 가야산 해인사 출신인 보담강백(寶潭講伯)을 초대해 포교사 겸 화엄산림(華嚴山林)의 회주(會主)로 모시고 법회를 개설했다. 후에 덕암노사께서 <화엄경>을 역경하여 출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륜노사의 뜻을 받들어 역경불사를 한 것이다. 당대의 대 학승들인 포명강백(抱明講伯)과 고경(古鏡) 스님 등을 포교사로 영입하여 법회를 개최했는데, 그야말로 불이성 법륜사는 한국(조선)불교의 중심이었다.

대륜 대종사님의 열반 제39주기 추모 다례에 즈음하여 지금 아쉬운 것은 이런 근현대 한국불교의 역사적 공간에서 불이성 법륜사와 대륜 대종사님의 위상이 실종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1950년대에 이르러서 불교분규(법난)가 발생하면서 불이성 법륜사와 대륜 노사의 행적과 활동은 ‘불교정화’란 프레임에 의한 ’대처 측‘이란 이미지만 남겨진 결과가 되었는데, 이제 대륜 법손들은 불이성 법륜사와 대륜 화상의 근 현대 불교사적 공간에서의 위상과 지위를 찾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 

 

     원응 스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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