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매일 매일 오로지 먹을 양식을 구할 뿐
확실히 얻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방거사와 제방의 선지식

방거사는 가족과 함께 속가 생활 속에서 견성오도(見性悟道)한 후 당대의 대종사 석두(石頭) 화상과 마조(馬祖)화상에게 인가를 받고 제방의 선지식과 법거래(法去來)를 하여 자기가 닦은 선지를 두루 들어보였다. 이를 살펴보려고 한다.

  1) 방거사와 약산유엄 선사

앞에 약산유엄 선사(藥山惟儼, 745~ 828)를 찾아 갔다가 약산 선사의 제자 10여명으로부터 배웅을 받은 자리에서 방거사가 “좋은 눈 하나하나가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고 꼭 제자리에 떨어지는구나”로써 선지(禪旨)를 보인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약산 선사와 직접 만나 법거래한 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날 약산 선사를 찾아가니 선사가 묻기를 “일승(一乘)중에 이것의 일을 확실히 얻었는가?” 하였다. 일승(一乘)이란 최상승(最上乘)의 도(道)로서 일불승(一佛乘)을 말하고 이는 부처를 이루는 유일한 교법이다. 유일한 교법에 들어가서 이것의 일이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여 모양을 그릴 수 없고 말하려 하면 입 열기 전에 틀리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이것’이라 하고 이것이 활활자재(活活自在) 하기 때문에 이 일이라 했다.

약산 선사가 방거사를 보고 일을 확실히 얻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얻었다든지 못 얻었다고 말하면 향상(向上)의 대답이 아니다. 미급해도 안 되고 대등한 대답도 안 되기에 그래서 도를 말로 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써도 안 되고 동문서답(東問西答)도 안 되며,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안 된다. 오로지 자기의 일을 진실하고 사실대로 말해야 제대로 된 대답이다.

방거사의 대답은 이러했다. “저는 매일 매일 오로지 먹을 양식을 구할 뿐 확실히 얻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 말은 오로지 하루하루 돈독한 정진이 있을 뿐이고 일상의 생활이 있을 따름이지 부처를 이루었는지 못 이루었는지 측정하고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약산 선사가 다시 “거사는 석두화상을 만나 보지 못했다고 말해도 좋은가?” 라고 물었다

방거사가 처음 석두화상을 찾아가 “만법(萬法)과 짝하지 아니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고 석두화상이 방거사의 입을 막아 이로 하여 크게 깨치고 송(頌)을 바침으로써 오증(悟證)을 얻은 일을 하찮게 여기는가 하고 물어본 것이다. 이에 방거사가 “하나는 잡고 하나를 놓으면 좋은 솜씨가 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나는 석두화상에게 방거사가 인가(認可) 받은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구도정진(求道精進)하는 수행자의 기본이니 방거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천하 선지식(天下善知識)에게 두루 인가를 받고 삼세(三世) 제불의 가피를 입었다 하더라도 수행자의 진전하는 자세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다만 그 광명이 천하를 두르고 서늘한 기운이 법계에 충만할 뿐이다.

약산 선사가 “노승(老僧)은 주지이기에 일이 번잡합니다.” 하므로 방거사가 물러가려 하자 약산 선사가 다시 “하나를 잡고 하나를 놓으면 참으로 좋은 솜씨로다.”

약산 선사의 이 말은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는 말이다.

방거사가 답하되 “애석하게 일승(一乘)의 종지(宗旨)를 문답(問答)함에 오늘은 실각(失却)했습니다.” 하니 약산 선사가 “과연 이렇고 이렇구나. ”하였다. 실각이란 자리를 잃었다는 뜻이고 오늘의 문답은 일승의 종지에 못 미친다 했다. 약산 선사의 ‘이렇고 이렇다’는 것은 이를 긍정하고 방 거사의 도를 짐작했다는 뜻이다.

참으로 약산 선사와 방거사의 도(道)가 서로 조금도 기울지 않고 대도(大道)가 시방삼세에 묘지의 눈이 앞이 탁 트여 시원하다 아니할 수 없다.

약산 선사는 석두화상의 수법제자로서 육조스님의 제자 청원행사(靑原行思)의 손제자(孫弟子)이다. 처음 석두를 찾아 뵙고 수행하다가 마조에게 가서 참학(參學)하라 하므로 가서 여러 해가 지나 다시 석두화상에게 와서 법을 이었다

육조스님 문하에 5 제자가 있었고 그 중 남악회양(南嶽懷讓)에게는 마조도일(馬祖道一)이요, 청원행사에게는 석두희천(石頭希遷)이 당대에 걸출한 양대 문중이었다. 약산 선사는 석두화상에게 참학하다가 석두화상의 권유를 받아 마조에게 가서 참학하고 석두화상에게 돌아와 법을 이었다. 방거사는 석두화상에게 처음 수행의 기량을 내보이고 인가를 받은 후 마조화상의 법을 이었다. 그러므로 약산 선사와 방 거사는 서로 반대 경로를 거쳐 참학하고 인가 받아 법을 이은 것이다.

약산 선사와 방거사는 동시대의 공부인(工夫人)으로 법거래(法去來)가 밀접했던 것 같다. 법은 가고 옴이 있어야 온전해진다. 온전하지 못한 법은 허약하고 사사로워 소멸하고 만다. 석두화상의 회상에 약산이 공부인으로 걸출하기에 석두화상이 친히 권고하여 약산을 마조화상 회상에 보내어 가풍이 다른 견처를 경험하게 하므로써 향상을 도모하게 하였다. 약산은 이에 오증한 마조화상에서 참학한 뒤 스스로 다시 석두화상에 돌아와 법을 이었다.

한편 방거사는 석두화상에게 나아가 법을 물어 인가를 받았으나 마조화상에게 오도함을 연마하여 법을 이었다. 이는 봄곡식이 온화한 날씨 속에서 자라 무더운 여름에 익고 여름 곡식은 무더운 날씨에 자라 서늘한 가을에 익는 것과 같다. 또한 흰색은 검정색이 있어 희고 검정색은 흰색이 있어 검은 것과 같다. 비록 이름이 다르다 하지만 같은 곡식이요, 비록 색이 다르다 하나 다른 색이 있어 자신의 색이 독특해지는 것이다. 회상(會上)이나 문중(門中)은 가풍이 달라 생기는 것이지 도(道)가 달라 생기는 것은 아니다. 방거사 시대와 그 이후 5가지 7종이 있는 것은 가풍(家風)이 달라서 생긴 것이다. 도(道)라는 것은 우주만유의 근본이 되는 뜻이고 통찰하여 깨닫는 경지이다.

   2) 방거사와 제봉선사

어느 날 방거사가 제봉선사(齋峰禪師) 가 조실로 주석하고 있는 선원에 들어가려 하니 선사가 방 거사를 보고 “이 속인이 선원에 자주 찾아와 무엇을 찾는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방거사가 좌우를 돌아보며 “누가 그렇게 말하는가? 누가 그렇게 말하는가?”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정면으로는 말할 수 없는가?”하였다. 제봉선사가 머리를 돌려 “보아라, 보아라” 하자 방거사가 말하되 “좀도둑이 크게 졌다. 좀도둑이 크게 졌다” 하였다 한다.

제봉선사는 마조화상에게 법을 받은 분이니 방거사와 사형사제간이다. 깊은 물에 뛰어드는 사람에게 죽지 않을 각오와 수단이 서 있는 것처럼 속인(俗人)인 방거사가 감히 스님들만 참선정진하는 엄격한 선원에 들어갈 때에는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이 선원을 관리 감독하고 지도하는 조실인 제봉선사는 속인이 여기가 어디라고 왔으며 무엇 때문에 왔는지 여지없이 제지했다. 이에 방거사가 곧바로 좌우를 돌아보며 선사를 무시하고 의식의 대상이 아닌 듯 누가 무엇이라 하는지 말소리가 난 곳을 따로 찾았다. 이에 제봉선사는 다른 곳을 보지 말고 정면을 똑바로 보라고 엄명한다. 다시 방거사가 앞뒤 없이 두루 봐야 바로 보는 것인데 앞을 보라 하면 뒤의 것은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다. 이에 제봉선사가 이것저것 그만두고 그냥 보기만 하라고 강조한다.

결과는 방거사가 말한 “좀도둑이 크게 졌다”는 데에 있다. 좀도둑은 작은 도둑이니 져도 크게 질 리 없다. 크게 지는 도둑은 큰 도둑이란 말이니 여기서 큰 도둑은 누구며 작은 도둑은 누구냐. 또 진 것은 누구며 이긴 것은 누구냐.

그렇다면 큰 도둑도 작은 도둑이고, 판단할 수 없는 같은 도둑이고 지고이기는 것도 한바탕 다툼이니 종국에는 승부가 없다. 그런데 하필 도둑이라 한 것은 부처와 조사가 밝혀준 도를 수행자가 수행으로 성취하려 하는 것을 말한다.

방거사와 제봉선사가 만나 서로 취할 것이 도(道)밖에 없고 불조(불祖)의 법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묻고 답하는 것이 도이니 이 도는 아승지겁 전에도 있었고 천지만유가 없어진 뒤에도 손색이 없다. 삼세일체불이 다 여기에 있고 역대전등(歷代傳燈) 조사가 여기에 포함된다.

                   지허스님 (순천 금둔사 조실, 원로회의 의원)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