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파자파티 고타미의 출가정신 되살려야

지난 12월 15일 오후 1시 태고종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 3층 대불보전에서 태고종 전국비구니총회가 열렸고, 총회 후에는 연수교육이 실시됐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비구니스님들의 총회 모습이 어떤지를 한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비구니스님들의 자체 총회는 보지 못했지만, 연수교육은 참관할 수 있었다. 비구니스님들께서 진행하는 총회의 이모저모와 발언들을 좀 들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연수교육 시간에만 참석하게 되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비구니스님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무언가 비구니스님들에 대해서 담론을 전개하고 싶은 의욕이 발동했다.

지난 12월 15일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 3층 대불보전에서 전국비구니회 총회가 열렸고, 총회 후에는 연수교육이 실시됐다.
지난 12월 15일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 3층 대불보전에서 전국비구니회 총회가 열렸고, 총회 후에는 연수교육이 실시됐다.

내가 한국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위촉 받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종단의 분위기를 익힐 겸 또한 평소 비구니스님들에 대한 관심이 커서 연수교육 장소에 동참했다. 내가 종단에 관여했던 1970년대에만 해도 태고종단에 비구니승가는 미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손에 꼽을 정도의 소수의 비구니스님들만이 존재했었는데 지금은 1천여 명의 비구니스님들이 적(籍)을 두고 있다고 해서 정작 속으로 놀랐다. J종의 경우, 비구니스님과 비구스님의 수가 거의 동수라는 통계가 있지만, 태고종도 천 단위가 넘었다는 것은 나에게는 대단한 충격과 관심이었다.

지난 40여 년 간 국제 불교 활동을 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불교를 접하고 비구, 비구니스님들을 보면서, 한국의 비구니스님들과 비교도 해보는 등 전 세계비구니 스님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동안 세계 불교계에서 비구니스님들의 위상을 보면서 다소 단편적인 담론을 피력한 적은 있지만, 한국불교의 비구니스님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해 왔다. 이제는 뭔가 비구니 스님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타이밍이 온 것 같아서, 태고종의 비구니스님들에 국한해서, 비구니스님에 대한 일반론적 역사와 현황을 한번 짚고 넘어 가는 글을 작성하고자 한다.

어디까지나 세계 비구니스님들에 대한 정보와 태고종의 비구니스님들은 어떤 정체성과 위상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표현해 보고픈 충동에서 어렵다면 어려운 주제를 택해 봤다.

총회를 마치고 연수교육을 받는 자리에서  편백운 총무원장스님은 종무방침을 연술하고 비구니스님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했다.
총회를 마치고 연수교육을 받는 자리에서 편백운 총무원장스님은 종무방침을 연술하고 비구니스님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했다.

글이란 글을 쓸 찬스가 있는 것이고, 그 찬스를 놓치면 글에 힘이 없고 맥이 풀린다. 또 쓰고 싶을 때 글을 써야지, 쓰지 못하면 어딘지 마음에 꺼림칙함을 느끼게 된다.

또한 세계 불교계에서 우리나라처럼 비구, 비구니가 양성평등을 이루고 있는 나라도 없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비구니스님들이 권익을 보장받지 못하고 활동 범위가 축소되어 있음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전국비구니스님들이 총회를 마치고 연수교육을 받는 자리에서 편백운 총무원장스님은 종무방침을 연술하시고 비구니스님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했다. 말씀 가운데서 총무원장스님께서는 비구니스님들에 대한 배려와 기대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구니스님들을 존중하고 앞으로 종단 발전을 위해서 더 나아가서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서 비구니스님들의 큰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기대 섞인 말씀에 적극 공감하면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1. 최초의 비구니 승가

2. 동아시아불교에서의 비구니 위상

3. 한국불교와 태고종의 비구니

란 소주제로 나눠서 고찰하기로 한다.

이글은 어디까지나 ‘시론(時論)’으로서 ‘태고종 비구니스님들의 정체성 및 향후 역할과 진로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바람에서 작성한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연수교육을 받고 있는 전국비구니회 스님들.
연수교육을 받고 있는 전국비구니회 스님들.

    최초의 비구니 승가

 불교역사상 교단사적으로 최초의 비구니 승가는 부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비구 승가는 부처님께서 5비구와 재회한 사르나트(녹야원)에서 시작되어서 승가가 형성되었지만, 비구니 승가는 한참 후에 형성되었는데, 그것은 고오타마 싯다르타의 이모요 양모였던 마하파자파티 고타미(Mahāpajāpatī Gotamī)로부터 비롯되었다.

마하파자파티는 ‘대애도(大愛道)’란 뜻이고 고타미는 성씨이다. 고오타마의 여성명사인 것이다. 빨리어로는 고타마, 산스크리트어로는 고오타마로 발음한다.

주지하다시피 싯다르타를 낳았던 마야부인은 마하파자파티와는 자매간이며 콜리야 족의 공주들이었다. 석가족으로 시집온 것이다. 이 두 부족은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두고 각기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석가족은 카필라와수투(카필라城) 쪽에 살고, 콜리야족은 네팔의 룸비니 쪽에 살고 있었다. 당시의 풍습은 아마도 언니가 죽으면 동생이 대신 양모의 역할을 하면서 왕비가 되었던 모양이다.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이모요 양모인 마하파자파티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고, 나중에는 난다 라는 동생을 두게 된다. 결국 이복형제인 난다도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마하파자파티는 120세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비구니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자.

마하파자파티의 출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버전이 있다. 빨리율장(律藏)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근본설일체유부(根本說一切有部)파에 이에 대한 기록이 전해 온다. 또한 산스크리트어 본(本) 아슈바고샤(Aśvaghoṣa:馬鳴)의 서사시 붓다짜리따(Buddhacharita)인 《불타의 생애》를 종합해서 시나리오를 엮어본다면,

마야부인과 마하파자파티는 자매간으로서 함께 슈도다나(Śuddhodana) 왕에게 시집갔다고 했다. 마야부인과 슈도다나 왕 사이에서 고오타마 삿다르타가 탄생되어서 나중에 출가하여 부처님이 되었다. 슈도다나는 중국에서 정반왕(淨飯王), 백정왕(白淨王), 진정왕(眞淨王)이라고 한역(漢譯)했다. 마야부인은 싯다르타를 낳은 지 7일 만에 죽게 되었고, 마하파자파티는 양모가 되면서 그녀 자신이 아들 난다와 딸 난다를 낳게 된다.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출가 고행 6년 후에 성도하여 부처님이 되셨는데, 성도하고 나서 일 년 후에 정반왕과 마하파자파티 왕비께서 한번 보고 싶다는 전갈을 받고 카필라와수투의 고향방문을 하게 된다.

고향을 찾은 부처님은 먼저 부왕인 슈도다나(정반왕)와 왕비를 알현하고 일가친척을 접견했다. 인도 풍습에 의하면 비록 아들이나 형제이지만,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깨달은 분(붓다:Buddha)이 되었기에 속가의 형제(兄弟)와 자매 일가친척들은 모두 삼배와 공양을 올렸다.

다만 전부인인 야소다라만은 예외였다고 한다. 오히려 라훌라를 시켜서 재산상속을 요구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드라마’이다. 한 여인에게 전 남편의 종교적 성취는 그녀의 실질적인 삶의 경계에서는 영역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부처님은 라훌라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사리푸타(사리불) 존자에게 사미로 입문하도록 해서, 7세의 라훌라는 불교역사상 최초의 사미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눈물겨운 가족사이다.

이때 석가족의 많은 형제들이 출가의 길을 택하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세속적 삶을 방기(放棄)하고 출가사문의 길을 택해 종교적 해탈을 얻어서 니르바나(열반)를 성취한다는 구도적 열정이 1차적인 목적이었지만, 석가족의 공화국이 코살라국에 거의 흡수되는 상황에서 실의에 빠진 친가와 외가의 일가친척 형제들이 이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담론할 기회가 있으리라 보고, 최초의 비구니 승가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알아보자.

부처님의 고향방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반왕은 돌아가시고, 석가족의 여인들은 실의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석가족 남편들이 출가사문이 되는 바람에 다수의 여인들은 졸지에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마하파자파티 고타미는 이 여인들을 데리고 카필라와수투(Kapilavastu)를 출발해서 수 백 km를 걸어서 바이샬리에 머무르고 있는 부처님을 만나러 갔다. 여인들의 모습은 너무나 비참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마하파자파티가 출가의 뜻을 비치자, 부처님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출가사문의 길은 고행 그 자체여서 여인들에게는 힘든 수행과정이기에 출가의 길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하파자파티와 5백여 명이나 되는 여인들은 모두 삭발하고 노란 옷을 입고 부처님에게 수계를 받고 비구니가 될 것을 간청했다. 부처님은 계속 거절했다. 이에 옆에서 지켜보던 아난존자(Ānanda)의 중재로 물꼬가 트였다.

아난존자가 누구인가.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분이지만, 부처님과는 사촌지간이었고, 당시 부처님의 ‘예경실장(시자)’이었다. 아난존자의 중재에 의한 요청으로 마하파자파티를 비롯한 5백 여 명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비구니로서의 수계를 받고 여인들도 견성 성불하여 아라한(聖人)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인가(認可)를 받게 된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8조목의 단서조항을 말씀하셨다. 그것이 바로 아따 가루담마(aṭṭha garudhamma:八敬法)이다. 비구니가 지켜야 할 여덟 가지 규범을 말한다.

(1) 보름마다 비구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2) 비구의 지도에 따라 안거(安居)해야 한다.

(3) 안거(安居)의 마지막 날에는 비구를 초청하여 그 동안에 저지른 자신의 허물을 말하고 훈계를 받아야 한다.

(4) 식차마나(式叉摩那)는 비구 · 비구니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 한다.

(5) 비구를 꾸짖어서는 안 된다.

(6) 비구의 허물을 말해서는 안 된다.

(7) 무거운 죄를 저질렀을 때는 비구에게 참회해야 한다.

(8) 수계(受戒)한 지 100년이 지난 비구니라도 방금 수계한 비구에게 공손해야 한다.

이 8경법은 비구니스님들에게는 승가입문의 조건이면서 또한 수 천 년 간 족쇄와 같은 멍에가 되고, 한편으로는 영광뿐인 상처와 같은 구속 사유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양성평등(젠더)문제로까지 이슈화되어 있고, 특히 서구출신 비구니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무튼 이 문제는 다음 회에서 더 담론하겠지만, 이와 같은 눈물겨운 과정을 거쳐서 비구니 승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계속>

       원응스님 <한국불교신문 논설위원>

원응스님(한국불교신문 논설위원)
원응스님(한국불교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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