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전득의 생애와 원융사상

성철(태고학회 회장, 중앙승가강원 총동문회 교육위원장)

 

성철스님
 

 

1. 들어가는 말

“한국불교 태고종의 대표적인 스님은 누구 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면 한국불교 태고종을 창종한 대륜세영 스님과 제자인 덕암전득 스님을 누구나 지칭하게 된다.

이 두 분의 스님을 거론하지 않는다면 한국불교 태고종이라는 거대종단을 설명하고 거론하는데 있어서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고 볼 수가 있다.

한국불교태고종 창종주인 대륜세영과 중창주 칭송 되어지는 덕암전득은 한국 불교계에 커다란 한 획을 장식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분과 관련하여 체계적인 연구와 사상의 선양사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논자는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논자는 먼저 덕암전득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그 첫 번째로 발걸음을 내딛어 보고자한다.

덕암전득은 득도 후 31세부터 포교 일선에 설법제일인 부루나 존자라는 칭하여지면서 설법으로 많은 불제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덕암전득은 태고종 창종의 주역으로 한국불교 태고종 총무원장, 종정, 태고총림 선암사 방장으로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신 분이시다.

생전에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국제무대에 나아가 중국과 일본, 미국에 까지 한국불교를 널리 펴시며 원융불교의 실천적 삶을 사시면서 대승보살도의 구현에 앞장서 오신 분이시다.

덕암전득의 사상은 원융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대승불교라고 대변할 수가 있다. 1995년 3월 대륜불교문화연구원을 설립하여 태고의 원융사상을 현대에 적용하여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는 한국불교는 태고보우의 법맥으로 이루어져 그 현재에 이르렀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불가, 승가의 효행인 스승에 대한 유업을 유지 발전시키기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한국불교 태고종 중앙강원에서 『한국불교 태고종의 전법과 포교활동』이라는 주제로 제1차 세미나를 개최함에 맞추어, 한국불교태고종의 중창주로 추앙되며, 대본산 금강산 유점사 서울포교당인 불이성 법륜사의(이하 불이성법륜사라 칭한다) 중창주인 덕암전득을 살펴보고자 한다.

 

2. 탄생과 출가수행

가. 탄생과 성장

경상북도 문경군 농암면 삼송리(현,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에서 부친은 순흥 안씨인 문옥과 모친은 진주 강씨인 보옥의 육남매(삼남삼녀) 가운데 막내로 1913년 음력 8월 27일 출생하였다.

덕암 스님의 생가의 큰 아버님은 스님으로서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독실한 불제자 가정이었다. 이러한 환경이 자연적으로 붓다에게 향하는 마음이 발현되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덕암스님의 전기에서 자신의 태몽에 대한 것을 찾아 볼 수가 있다.

하루는 진주 강씨인 어머님이 시어머님께 말씀 하셨다.

“어머님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애야, 무슨 꿈이냐?”

“구름 속의 둥근달이 갑자기 저의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 참 좋은 꿈을 꾸었다. 누구에게도 함부로 말하지 말라.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을 꿈이다.”

보옥 여사는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뭉클 할 정도로 뿌듯함을 느꼈다.

과연 꿈은 헛되지 않아 음력 계축년 (1913년) 8월 27일 토란 같은 아들을 낳게 되었다.

태몽을 태어날 아이의 미래를 예측하는 부분이 있음을 우리 전통문화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덕암스님의 미래도 예측하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러한 태몽을 가지고 태어난 덕암전득을 조부가 보시고, 이름을 일어날 흥(興), 큰 덕(德)의 흥덕이라고 지어주시면서, “큰 덕의 종자이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전득의 속가 형제들은 모두가 건강하고 평화스러운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으나, 막대로 태어난 전득은 몸이 쇠약하여 갖가지 보약과 보호에도 효과 없었다. 모친인 보옥은 사랑하는 흥덕이 걱정되어서 장래를 물어보게 된다. 흥덕의 장래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동쪽사람을 피하고 부처님 전에 지극히 정성을 드리고 남에게 적선을 많이 하여 주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복을 덜고 명을 감하게 될 것 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모친은 어렵게 얻은 자식의 성공을 바라고 있는데, 혹시 중도에 잘못 된 길을 걸을까 근심과 걱정 앞서게 된다.

전득은 약관의 나이인 여섯 살부터 한문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계몽편까지 한문 공부를 한 전득은 해주보통학교에 진학하여 현대교육을 접하게 된다. 현대교육은 전인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않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다. 현대교육은 전득에게 있어서 자기 고집에 빠진 소인병이 아닌 세상을 널리 보고 서로 교통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전득은 대 실업인의 꿈을 나고 해주 직업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나, 몸이 날로 쇠약해지고 정신마저 아득해져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입산을 결심하게 된다.

전득은 속가의 배움 속에서 글을 읽으면 정신이 없고,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서 속가와의 인연이 없었다. 조모는 청화산 원적사에 가서 전득이 열 살이 넘도록 기도를 올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편을 해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하루는 큰아버지가 출가자의 길을 가고 있는데, 큰아버지(福首座)의 은사스님으로 도행이 청결하고 점잖으신 석교(石橋)이 오셨다. 석교스님이 전득을 보시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성스러운 사람은 속가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체질상 병을 많이 않는 수가 있으니

병이 나으면 출가시킬 것을 발원하는 혜명발원(慧命發願)을 해보시오.”

속가의 인연이 없으므로 출가를 권유하는 내용이고, 삼보전에 출가를 약속을 하여 구병을 하게 하는 말이었다. 이에 가족들은 전득을 위한 기도를 올리니 전득은 쾌차를 한다. 구병이 이루어지니 부모는 전득과 함께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그러다 충북 제천의 원각사를 창건하신 최벽산(태현)과 김영하 스님이 왕래를 하면서 전득을 출가하게 하는 말을 하였다.

   “부처님에게 거짓말을 하면 더 큰 병을 얻는다.”

불제자라면 누구나가 익히 알고 있고, 또는 외어서 염송하는 천수경에서 십악 참회라고 하는 가운데 “거짓말을 하지 말라”라는 구절과 십계 가운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한 구절이 있다. 이 외에도 많은 경전에서 거짓말을 매우 중시하게 여기며 하지 말 것을 설하고 있다. 하물며 구병을 위하여 부처에게 기도를 올려서 쾌차이후에 마음을 달리하여 출가를 않는다고 하는 것은 삼보전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스님의 충고는 매우 시기적절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이기에 출가시키기로 한다.

나. 출가득도와 배움의 길

전득의 출가사찰은 대본산 금강산 유점사(이하 유점사라 칭한다.)이다. 은사스님은 최벽산(태현)으로 스님은 유점사 대중이셨다. 흥덕은 은사스님을 따라 유점사로 향하면서 은사스님의 금강산 설명을 들으면서 나아갔다. 이는 어린 흥덕이 먼길을 가는데 있어서 지루하고 불제자의 길을 가기위한 발걸음을 가볍게 하여주기 위한 방편이었다.

벽산스님의 금강산에 대한 설명과 이에 비추어 흥덕의 수행의 길을 도와주고 흥미를 같게 하기 위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흥겹게 설명하고 있다.

“금강산에서 1년만 살다보면 온 천하의 변화무쌍한 진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흥덕이 묻기를

“어찌하여 금강산은 이름이 계절마다 바뀝니까?”

벽산 스님이 답하기를

“그 산세의 기절한 모습 때문이다. 짙은 봄빛 속에 화려한 불당에 금강의 전리(殿裏)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금강이라 하고, 온 산의 짙은 녹음 속에 하늘 땅을 모두 갈무려

옛 전설에서 듣던 신선들이 나와서 노는 곳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여름 금강산은

봉래라 하는 것이며, 그름 하넘 없는 맑은 하늘에 첩첩한 기봉(奇峰)들이 서로 그

뛰어난 모습을 자랑하여 붉고 누른 단풍으로 물들이므로 가을 금강산은 풍악이라

한단다. 그리고 赤裸裸(적나나) 赤灑灑(적쇄쇄) 나뭇잎 하나 없는 산천이 온통 꾀

벗은 듯이 怪異沈痛(괘이침통)한 모습으로 변화하여 칠백여종의 갖가지 수목들이

뼈다귀만 앙상한 모습을 보여주므로 겨울 금강산은 개골이라 부르는 것이다.

벽산 스님은 금강산의 이름을 계절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른 이유를 설명하주면서 흥덕에게 흥미를 일으키도록 하고 있다.

또 유점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여 주면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도록 하고 있다.

“신라 2대 남해 차차웅(南海 次次雄) 원년에 세운 것이라 하나,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법왕 3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당인 능인보전(能仁寶殿)에는 5불이 안치

되어있고 주위에는 般若, 白蓮, 明寂등의 암자가 푸른 하늘의 별처럼 흩어져 있다.

고성 부근에는 해금강이 절경을 이루고, 해금강 북쪽에는 삼일포(三日浦, 남쪽에는

적벽강이 있고, 이 강을 건너면 영랑호(永郞湖) 현종암(縣鐘巖) 船巖 등이 있고,

다시 온정리(溫井里)로부터 고성바다로 나가면서 입석. 불암. 송도. 사암. 칠성

등 바다의 만물상을 형성하고 있다. 그럼로 예로부터 금강산을 보지 아니한

사람은 산을 말할 수 없다고 하고, 천하의 명상은 금강산이 제일이다 하는 말이 있다.”

흥덕이 벽산스님의 유점사의 유래와 금강산 주변의 절경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금강산을 향하여 갔다. 차후 은사가 되어 흥덕의 승려로서의 나아갈 길을 이끌어주시고자 많은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천하제일 명산인 금강산에서 흥덕이 훌륭한 승려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흥덕에게 당부의 말을 한다.

“너는 이처럼 훌륭한 산에서 중노릇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안 일이냐.

부처니 말씀에 ‘人生難得이요, 佛法難逢이라’ 하였으니 사람 몸 얻는 것과

불법 만난 것을 다행으로 알고 공부 잘하기 바란다.”

이런 당부의 말을 들으면서 흥덕은 벽산스님과 함께 고향은 충북 괴산에서 유점사까지의 먼 길을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을 한다. 유점사에 도착한 날이 인연인가 필연인가. 이날이 바로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이었다.

이렇게 승려, 불제자의 길을 걷고자 길고도 긴 3년간의 행자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행자로서 흥덕이 제일 먼저 접하고 배우게 된 것은 승려로서 반드시 익히게 되는 『沙彌律儀』을 배웠다. 안진호스님이 토를 달아 놓은 『沙彌律儀』를 비록 21장에 불과하고 6306자하나 익히 한문 공부를 한 흥덕이지만 4개월에 걸쳐 배웠다. 이후에 바로 『初發心自驚文』을 배우면서 흥덕은 마음속으로 훌륭한 스님이 되기를 다짐하게 된다. 바로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발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미련한 놈이 배우지 아니하면 교만심만 더하고

어리석은 자가 수양 없으면 아상 인상만 기른다.

빈 배에 마음만 높으면 주린 호랑이와 같고

앎이 없어 놀기 좋아하면 넘어진 원숭이 같이 된다.

이 구절을 공부하던 흥덕은 출가자의 길을 가면서 항상 마음을 다짐하게 되는 구절이 되었다.

또 가장 깊은 감명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치문경훈의 면학편의 一日一善과 自然學이다. 사람은 아무리 미련하여도 하루에 글자한자는 기억할 수가 있다. 그러니 10일이면 열자요, 한 달이면 30자이다. 이렇게 일 년을 공부하면 360여자 되니, 이렇게 공부하면 이 세상에 어떤 글자도 알 수가 있게 된다. 또 착한 일도 마찬가지이니 하루에 한 가지씩 착한 일을 생각하고 행하면 부족함이 없을 거라는 구절에 흥덕은 깊은 감명을 받는다. 바로 이 구절이 덕암전득이 평생 살아가면서 인생의 좌우명 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어서 흥덕은 행자의 신분으로 득도 후에 배우게 되는 사집을 배우고 익히게 된다. 이렇게 사집까지 배우게 된 흥덕이 행자로서 유점사에 입산한지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은사이신 벽산스님이 이제 때가 되어서 계를 받고 스님이 되어도 되겠다고 하여, 유점사에 입산 한 날과 같은 날인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날 득도식을 하여 계를 받으라 명하였다.

이날은 1930년 음력 4월 8일로 흥덕이 차후에 한국불교계에 거목으로 성장하게 하는 날이 되었다. 유점사는 초파일 행사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날 득도식을 행하는 것도 특별하다고 볼 수가 있다. 초파일을 겸한 득도식에 멀리 충북 괴산에서 부모님도 흥덕이 정식으로 계를 받고 승려가 되는 것을 축하해 주고자 참석을 하였다. 흥덕의 득도식은 이렇게 부모님의 참석과 유점사 대중, 그리고 초파일 행사에 동참한 모든 사부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히 진행되었다. 박운암 스님이 계사로 계를 설하시고, 새 이름 법명을 전득이라 하셨다. 이어서 법복을 입고 부처님께 맹세하고, 삼보와 계사, 은사스님과 합원 대중에게 예를 올렸다.

전득은 승려로서의 첫 발걸음을 큰 법당으로 나아가서 천수주문을 외우면서 발원을 한다. 그 발원문을 살펴보면,

“대자비로서 중생들의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보호해 주시는 관세음보살님,

당신의 사랑스런 그 모습을 사모하는 일체중생에게 한량없는 이익을 주시니

이 어둡고 캄캄한 세상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해 가겠습니다.

옴, 지혜로써 세상을 살펴주시는 님이시여, 기억하고 생각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속히 악업을 그치고 대 승리자이신 당신처럼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옵소서.

 

『세상을 마음대로 관찰하는 자이시여,

탐욕의 독을 잠재우고

성냄의 독을 잠재우고

어리석음의 독을 잠재우시고

두렵고 두려운 번뇌를 제거하고

맑고 깨끗한 연꽃처럼 속히 깨달음을 얻겠습니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

 

알치를 성취하고 요가를 자재하며 비들기처럼 밫나는 목과 돼지처럼 풍만한 몸과

사자처럼 위엄있는 모습을 가지시고 연꽃처럼 깨끗한 생활로 보배수레를 굴리며

온 세계를 깨닫도록 약을 제공하시는 관세음보살님, 당신의 그 부지런하시고

용맹한 정신이 저희들에게도 함께하여 길상이 있기 바라옵나이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다. 전득은 계를 받고 스님이 되어서 맨 처음 배우게 된 경전은 능엄경이고, 이어서 기신론을 보게 된다. 전득은 기신론을 배우면서 우주인생의 근원이 眞如自性임을 깨닫게 되었고, 능엄경의 세계기시에서 보다도 더 분명하고 확실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어 배움의 기쁨을 느낀다. 전득은 반야경을 보는 도중에 비구계를 금강산 장안사의 김상월 스님과 건봉사 김일우 스님, 박보은 스님이시고 전계아사리는 석전 박한영 노사에게 계를 수지한다. 반야경등을 익히는 사교과정의 강사는 일우 스님과 변설호 스님이었다. 사교를 마친 전득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 미국이나 일본으로 유학하는 것이 지식을 키우고자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또 식민지하에서 탄압으로 제대로 된 학업을 할 수가 없고 유학을 하면 비록하면 학비를 마련하기는 힘드나 쉽게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전득도 法山 김경권 스님과 함께 유학을 하고자 하였으나, 은사 벽산스님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유학을 떠난 법산 스님의 도움으로 동경 대성중학교 통신학과를 진학하게 된다. 당시 통학과 과정은 공부는 국내에서하고 시험은 일본 학교에서 직접 보는 방식이었다. 이런 과정으로 힘들게 학업을 마친 전득은 철원 심원사 불교전문강원인 화산경원에서 대교과정은 마치게 된다. 전득은 수의 과정을 마치고 벽산 스님의 권유로 공부를 마쳤으니 직접 활용하기 위하여 포교사로 서울에 포교당으로 나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서 강주스님들이 계실 때 공부하기로 하고 염송까지 보게 되었다.

 

3. 깨달음의 과정

철원 심원사 화산경원에서 염송까지 본 전득은 현재 한국불교 태고종 총림인 순천 조계산 선암사로 향하여 달마전 선원(일명 칠전선원)에 방부를 넣고 한 철을 난다. 한철을 난 전득은 당시 선암사에 계시던 김포광(金包光) 스님에게 『景德傳燈錄』을 본다. 여기서 전득은 대중포교를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사상적인 원융사상을 적용할 것을 깨닫게 되고 실천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기회가 된다. 이것은 불교의 특징으로, 언제 어디서나 그 시대의 상황에 맞추어 적응하고 적용함으로서 不捨一物의 大業을 성취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法華經』 「觀世音菩薩普門品」에서 무진의 보살이 부처에게 관세음보살이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말하고 방편의 힘을 어떠냐고 물고 있는 것과 같이 전득도 시대에 맞추어 방편으로 전법을 할 것을 다짐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전득은 이런 사상을 지니고 송광사 삼일선원으로 입방하여 한 철을 더 난다. 참선 도중에 전득은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듣고 게송을 지으니,

깜짝 꿈 가운데에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있음을 깨달았네,

꽃들은 뜨락에서 웃고

새들이 창밖에서 노래하네.

전득은 삼일암에서 수행 중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나 전득은 깨달음의 인가를 받은 기록은 없다. 선암사와 송광사에서의 선원에 방부를 들이는 것으로 이 후 입적 때까지 선원에 입방을 하지 않고 대중포교와 염불에 주력하면서 보임을 하고 정진을 한다.

 

4. 덕암전득의 원융사상

덕암은 역사적 불교사관은 뚜렷하였다. 태고의 실천사상은 물론 원광, 원효, 의상의 화엄사상, 체관의 법화사상 등을 부흥시켜서 혼란기의 문화를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전득과 대륜화상의 관계는 대륜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눈 밝은 납자를 찾는다는 소리를 한다. 두 화상 모두 유점사 출신으로 대중교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대룬에게 덕암을 소개하여 인연이 지어진 것이다. 전득은 유점사 고덕인 대륜화상 계시는 서울 불이성 법륜사로 향했다. 대륜화상은 불교의 나아갈 길은 도심전법과 도제 양성에 있다고 판단하여 당시 중앙청 옆 사간동에 도심포교당을 창설하고 포교에 전념하고 있었다. 전득은 대륜화상과 인연을 지어 입실을 하여 심인을 받고 德菴이라는 법호를 가지게 된다. 유점사와 철원 심원사 등지에서 불교경전을 공부하고는 법륜사 포교당으로 간 것은 대륜화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륜화상이 당시 전득에게 “한 달에 20원을 줄테니 1년간 전국을 돌며 훌륭한 스승을 만나 수행을 하고 돌아오라”고 하였다. 전득이 경에만 몰두하니깐 경을 떠나서 선지식을 찾아서 가르침을 얻고 눈 밝은 납자로 수행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득은 승주 선암사 김포강스님에게 찾아가서 달마전에 방부를 넣는다. 대륜 법사의 가르침으로 선암사와 송광사에서 수행을 하는 덕암의 속납은 31세로 혈기 왕성한 납자였다. 대륜 법사의 인연으로 33세에 불이성 법륜사로 돌아와 포교사로 첫발 내듣기 시작한다. 덕암은 이어서 한국불교신문사 총무국장을 거쳐 재단법인 동국학원 감사를 38세에 피선된다. 이후 한국불교 조계종의 각종 소임을 거치고, 56세 되던 해에 서울 아차산 영화사 주지에 취임을 한다. 58세에 한국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에 피선되나,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과의 이별로 한국불교 태고종이 창종 됨에 따라 한국불교 태고종 총무원장에 피선된다. 1974년(당시 62세)에 태고종 총무원장 직제가 종무총장으로 개정됨에 따라 종무총장에 피선 후 사직하고 종승위원장에 피선된다. 67세가 되는 1979에는 멸시상부 대본산 금강산 유점사 서울 포교당인 불이성 법륜사 조실에 피선 된다. 69세에는 아차산 화양사 창건 초대주지를 겸임한다. 70세가 되는 해에는 전한국불교포교사협회가 결성 초대회장에 추대 되고, 같은 해 한일불교 문화교류협의회가 결성되어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한다. 74세에 한국불교태고종 종정에 추대되며, 84세에 한국불교태고종 총림인 선암사 방장에 추대 된다. 86세에 다시 한국불교태고종 제 16대 종정에 재추대 된다, 2003년 11월25일 불이성 법륜사 염화실에서 좌탈입망을 한다. 신촌봉원사에서 5일장으로 종단장으로 거행하고, 선암사 다비장에서 다비를 하니 242과의 오색사리가 출현하여 세간을 놀라게 하였다.

덕암은 불교계에 많은 소임은 행하면서 태고보우의 원융사상이 한국불교를 살리는 길이라 인식을 하게 된다. 이는 법사인 대륜화상과 함께 현 대한불교 조계종에 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대처승(이후 보살승이라 칭함)과 함께 하는 것이 차후 불교계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세태가 점점 변하여 많은 출가자들이 권속을 두고 승려 생활을 하면서 포교와 전법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덕암의 판단은 옳다고 볼 수가 있다.

덕암은 삼장원 출판사에서 『대승보살도』를 출판하면서 “한국불교를 말한다.”라는 대담을 한다. 우리나라 불서 출판에 이런 기획을 세워 출판 한다고 하니,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승보살도라고 하는 진리(즉 佛法)를 바탕으로 ‘한국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점검하여

오늘의 우리는 누구인가를 짚어보자는 뜻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노스님을 모신 이

공동토의가 자화자찬하며 서로를 추켜세우는 식의 설왕설래로 그쳐서는 아니

된다고 봅니다. 여기 박 선생님(박윤호)은 『원효』 책자를 통해서도 눈으로

불교를 보고 또 역사를 깨우쳐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 만큼 사정을 두지 말고

아예 탁 터놓고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이렇게 불교의 발전과 미래를 위하여 대담을 하면서 덕암은 먼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토의하자고 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원만하게 융화하고자하는 생각이 없었다면 불가능 할 것이었다. 이런 사상을 박윤호는 “스님을 뵙는 다는 것은 백배 천배를 하고 예를 갖추어야 되는데, 스님은 그 격식을 넘어서 대하는 것이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진실하게 대담을 해야겠다고 하고 있다.

또 같은 대담자인 김대은 덕암의 사상을 현대불교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교가 민중 속에서 시대를 호흡하며 그 생명력을 드날렸을 적의 역사는 생동감이

넘치며 또 불교도 제 노릇을 다하였다는 것을 역사가 교훈으로 남겼거든요.

그런 이유에서도 우리는 분발해야겠지요.

이것은 덕암이 법사인 대륜화상에게 영향을 받아 포교사로서 불이성 법륜사에 온 것도 끊임없이 전법과 포교 그리고 제도에 대중과 함께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덕암은 태고보우의 원융사상은 “백장청규아 치문경훈을 들여와 원융부를 설치했으며, 통불교를 주장하고 선농일치에 입각한 사찰의 독자적 운영 등 그 업적이 크다.”라고 하고 있다. 덕암은 법사인 대륜화상과 함께 통불교를 행하기 위하여 태고종을 창종하고 발전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태고보우가 치문경훈을 들여와 승려들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게하고, 이를 지키고 행하는 것이 바로 원융사상 실천의 시작인 것이기 때문이다.

덕암은 佛家가 근래에 선교양종으로 나누어져서 행하여진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한국불교의 수행과제를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禪과 敎를 겸하기가 상당히 어렵고 힘들지만 항시 안으로는 禪의 수행을 다해야 되고,

밖으로는 敎로써 크게 禪敎의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禪을 주로해서

누구나 大道人으로 견성득도를 한다고 하면 더욱 좋은 일이지만, 그런 일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敎를 등한시 할 수가 없습니다. 敎를 가지고 중생교화에

전력을 하여 면면구절해서 끊어짐이 없으므로, 앞으로는 수행이라면 禪를 고루

겸비해야만 불교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禪과 敎를 겸비하여야 하며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禪은 자신을 닦는 수행이고, 교는 중생제도를 하기 위하여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현재 출가자나 재가자가 그리고 불교인들은 계를 부질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에 덕암은 모든 불제자들은 오계라도 지켜서 붓다가 설한 것을 재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원융사상을 가지고 모든 불제자들을 포섭하고 제도하기 위하여 한국태고종은 사부대중이 아닌 육부중이 서로가 함께하여 제도를 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덕암은 대본산 금강산 유점사 서울 포교당 불이성 법륜사에 적을 두고선 끊임없이 법륜사 대중들과 함께 강백을 초빙하여 강을 듣고 있다. 대표적으로 세존응화 2981년(1954년) 동안거에 변설호로부터 금강경을 보기 시작하여 세존응화 2988년(1961년) 신축년까지 하안거와 동안거에 금강경 팔해경이라고 칭하여 강을 들었다.

많은 수행자들은 한국불교의 정신적 지주는 태고보우라고 생각을 한다. 그 태고보우의 원융불교 사상을 현대에 실천한 승려는 덕암이다. 이런 칭송하면서 덕암의 정신을 ‘거룩한 모습은 영원히 빛나고 위대한 사상은 만대에 유전 할 것이다.’라고 칭송을 하였다.

덕암은 이러한 사상을 원융사상으로 화하여 한국불교태고종의 종단화합, 종도교육, 계율실천을 강조하면서 종단의 기틀과 질서를 잡아 나갔다. 선교일여가 바로 수행자의 본분이며, 중생제도의 표본이라는 생각으로 세간이나 출세간은 원융하다는 사상을 펼쳐나간다. 이는 세간이나 출세간이 모두 진리를 깨달아 성불할 수 있다는 태고선사의 사상을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5. 나가는 말

덕암은 불기 2530년 태고종의 제13세 종정에 추대되면서 “이 시대에 있어 우리불교계에 가장 시급한 과제가 있다면 역사적으로 전래되어온 통불교의 전통을 되찾아 종파불교를 지양하고 온 불교도가 하나로 굳게 뭉쳐 국가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자주적 역량을 갖추는 일”이라고 설파했다. 원융불교사상의 선양을 통해 참된 진여의 세계를 밝히는 데 출가의 삶 70년을 바쳐온 덕암의 주장을 한 마디로 압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실천으로 덕암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원로라 부릅니다.

그러나 행자들과 다를게 없어요.

똑같이 계지키고 정진해야 하니까요

수행에 있어서는 행자나 승납에 관계없이 계를 지켜 나가는 것이 불제자로서의 의무이고, 사명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덕암은 선보다는 교에 중점을 두고 일생을 포교와 전법에 매진하였다고 스스로 말한다. 즉 자신은 선승이 아니고 학승이고 전법승이라는 선언이다. 16세에 출가를 해서 교를 중심으로 불법을 펼치겠다고 한다. 따라서 덕암은 전법포교사로서 열과 성의를 가지고 했다고 한다. 이런 행동은 각종 사회적 활동에서 나타나고 있다.

승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和合衆이라고 역설하며, 사부 대중이 아닌 육부중이라고 항상 역설하고 화합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바로 태고보우의 원융사상이라고 출가자나 재가자 는 중도정신에 입각하여 정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덕암은 비록 교를 중심으로 전법을 하였지만, 틈틈이 태고보우가 처음 화두로 정진하였던 ‘만법구일 귀일하처’로 좌선을 하였으나 후일에는 ‘無’자 화두를 들었다고 하였다. 덕암이 선보다는 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화산경원에서 수학 중에 확신이 생겼다고 하고 있다.

덕암은 한국불교는 본래 선과 교를 함께하는 전통이라고 하면서 거기에 계율이 더해져야 한다고 태고의 사상ㅇ을 그대로 실천한 것을 말하고 있다. 즉 계가 없으면 선도 교도 없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모든 계를 지키기는 힘들더라도 오계만이라도 지키자고 하고 있다.

덕암은 우리에게 경책으로 정진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는 서 있어야 할 땅을 너무나 오랫동안 잃고 살았어요. 마치 텅빈 空洞 속에서

헤매인 형국이었다 할까요. 그러니 스스로도 內傷에 시달려야 했고 우리 모두의

理想象이나 진리를 펼쳐볼 겨를도 없이 허둥거리게 된 것입니다.

태고보우의 업적과 정신을 이어서 전법을 한 덕암전득은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인 ‘끊임없이 정진하라.’를 전하고 있다.

덕암은 입적하기 2년 전인 2001년 음력 8월 27일(양력 10월 13일)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자신이 평생 모은 통장을 전한다. 통장에는 약 9억 3천 만원의 금액이 있었다. 덕암은 이 금액으로 법륜사 옆에 부지를 매입 할 것을 부탁한다. 덕암문도들은 현 태고종 종정인 혜초스님에게 위임하여 118번지와 119번지를 매입하여 현재의 한국불교 전승관과 대본산 금강산 유점사 서울포교당 불이성 법륜사의 제3차 중창불사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덕암전득은 전 동국대학교 명예교수였던 오극근 교수는 단적으로 “덕암스님은 태고보우의 환생이다.”라고 단적으로 표현 하였다. 서돈각은 덕암을 “원융불교의 실천적 삶을 사시면서 대승보살도의 구현에 앞장서 오신 분이다.” 하고 있다. 태고보우와 덕암의 원융불교의 실천은 우리한국불교의 과제이며, 세계불교의 요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 참고 문헌

안진호, 『석문의범』, 서울:법륜사, 1996.

덕암문도회, 『正法眼藏』, 서울:불이성법륜사, 1988.

덕암화상문도회,『덕암대종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전법과 포교활동』,

                                                                  서울:카피출력소, 2012.

대륜불교문화연구원편, 『원융불교의실천』, 서울:불교영상회보사, 1997.

오형근, 「대승사상과 원융불교」, 대륜불교문화연구원편, 『원융불교의실천』,

                                                            서울:불교영상회보사, 1997.

한정섭, 『꽃은 뜰 속에서 웃고 새들은 창 밖에서 노래하네』,

                                                     서울:도서출판 서예문인화, 2003.

김기훈, 『덕암대종사법어집』, 서울:도서출판 서예문인화, 2004.

덕암대화상 감로탑 비명, 불이성 법륜사 부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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