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륜불교문화연구원·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주최 학술대회 주제 : 금강산 유점사와 경성포교당 법륜사개회사에서 혜일스님은 “법륜사의 명성을 되찾는데 진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1929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개설한 경성포교당인 불이성 법륜사에서 남북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한 학술대회가 열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대륜불교문화연구원(이사장 혜일스님)과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소장 석문스님)는 11월 1일 전승관 1층 대회의실에서 ‘금강산 유점사와 경성포교당 법륜사’ 란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혜일스님은 개회사에서 “대륜화상과 덕암화상의 혼이 깃들어 있는 법륜사에서 이런 뜻깊은 행사를 하게 되어 가슴이 벅차며, 근대식 포교와 대승교화의 효시인 법륜사가 포교 일번지로서 명성을 되찾는데 진력을 다하겠다” 고 밝혔다.

총무원장 도산스님은 축사를 통해 “활발한 토론을 통하여 불이성 법륜사가 근대불교에 끼쳤던 사상과 영향, 그리고 역사적인 사료가 재조명되길 바라며, 더불어 한국불교사에 법륜사가 가졌던 위치에 대해서도 폭 넓은 연찬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열린 세미나에서는 오경후 박사(한국불교선리연구원 상임연구원)가 ‘조선후기 유점사의 법맥과 수행전통의 가치’를, 김수현 학예연구사(고양시청)가 ‘유점사 범종의 제작시기와 발원계층’,  최선일 박사(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가 ‘조각승 여찬의 활동과 불상연구’, 엄기표 교수(단국대)가 ‘서울 법륜사 오층석탑에 대한 고찰’ 등을 각각 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논문들을 요약 게재한다.  

정리·사진=홍소연 기자

조선후기 유점사의 법맥과 수행전통의 가치

오 경 후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상임연구원)

금강산 유점사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불교계를 주도하던 선교겸수 도량
유점사는 지정학적 위치와 함께 불교 문화적 가치 때문에 불교가 탄압받고 소외당하였던 조선시대조차도 왕실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왕실 사고(私庫)를 털었고, 관청에서는 중수를 거듭했으며, 승려들은 전국으로 권선문을 돌렸다. 더욱이 묘향산과 금강산을 거점으로 수행 중이던 청허 휴정과 그의 제자들이 임진왜란에 참여하여 용맹을 떨쳤고, 전란 이후로는 조선불교계가 그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사상과 수행 역시 금강산을 거점으로 시작되고 확산되어 나갔다.

특히 조선후기는 청허 휴정과 그의 제자들이 승병조직을 지휘하며 활동하고 수행의 거점으로도 삼고 있었다. 청허 휴정의 사리탑이 유점사에 조성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다른 사찰과는 달리 불교사상과 수행, 신앙, 그리고 법맥의 계승에서 명실상부한 위상과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법(寺法)에 의하면 유점사는 금강산에서 가장 먼저 창건된 사찰로 영원히 소멸하지 않을 신령스러운 도량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유점사에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법맥은 조선불교의 중흥조 청허휴정(淸虛休靜)을 시작으로 환성지안(喚醒志安), 호암체정(虎巖體淨) 그리고 풍악보인(楓嶽普印)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요컨대 청허 휴정과 그 1세 제자들로부터 시작된 조선불교계의 재편은 선을 우위에 둔 선교겸수와 합일이 유행하였고, 선가에서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염불수행도 일반화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수행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이력과정으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특히 유점사는 왜란과 호란이후 표훈사, 신계사, 건봉사와 함께 청허와 그 제자들의 대표적인 수행처로 자리 잡았다. 유점사의 법맥은 대체로 청허의 제자 가운데 유정·법견·언기의 문파가 대를 이어 계승하였다.

대체로 이들의 수행전통은 청허 휴정이 확립한 경절문(徑截門)을 중심으로 한 선수행을 가장 상위에 두었지만, <화엄경>·<금강경>·<원각경>과 같은 교학 연구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른바 선교겸수(禪敎兼修)와 합일(合一)도 중시한 것이다. 그러나 사교입선(捨敎入禪)이 이들의 수행단계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었다. 출가 이후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을 두루 섭렵하기 위해 침식을 잊기도 했지만, 교학은 세간의 법이고 안심을 위한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선 수행을 위해 스승을 찾았고, 심인(心印)을 받았다.

결국 조선후기 유점사의 법맥은 청허계의 사자상승이었고, 그 수행전통 역시 선교학의 겸수와 염불수행 경향이 유행하였지만, 임제선풍이 가장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교학과 염불 역시 그에 기초한 것이었다.

오경후 박사는 “유점사를 중심으로 한 청허계의 법맥과 수행전통의 검토는 조선후기 불교계의 동향과 사상, 수행전통을 파악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서울 법륜사 오층석탑에 대한 고찰 -한국 근현대기 석탑 연구 시론-
엄 기 표 (단국대 교수, 석주선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근대 한국 석탑사와 불교미술사의 전개 과정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현재 법륜사 오층석탑은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 건물 외곽에 세워져 있는데, 바로 옆에 이전 복원된 우물이 있다.

그리고 석탑 옆으로는 태고사 원증국사탑과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을 모방하여 현대 시기에 건립한 부도들과 난간으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은 안내표석과 함께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안내 표석에 의하면 이 석탑은 안덕암 종정큰스님의 팔순을 맞아 문도들이 헌상한 불탑이며, 일체 중생들의 해탈을 간절히 기원하기 위하여 덕암화상 문도들이 임신년 8월 27일(음력)에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법륜사 오층석탑은 간략화된 치석과 결구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각 부재의 치석 수법이 깔끔하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전체적인 외관은 안정되어 있지만 세부적으로 각각의 부재를 별도로 관찰하면 정연한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법륜사 오층석탑의 건립 시기는 조선시대 이후로 볼 수 있으며, 불교제중원 오층석탑과 양식적으로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으므로 불교제중원 오층석탑이 건립된 시기를 전후하여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법륜사 오층석탑은 근대기에 건립된 석탑 자료로 근대기 한국 석탑사와 불교미술사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학술적 자료로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사찰 가람의 중심적인 신앙 대상이었던 석탑은 삼국시대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건립되는 대표적인 불교미술품이다. 석탑은 시대와 지역별로 나름대로의 특성이 가미되면서 전대의 양식을 계승하거나 새로운 양식이 적용되면서 발전을 거듭해왔다.

한국 역사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정치적인 격변기였으며, 불교계도 많은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이에 따라 불교미술도 새로운 양식과 사조가 전래되어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런데 석탑 양식은 기본적으로 전대의 양식을 모방 계승하면서 새로운 양식이 부분적으로 가미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외래적인 요소가 가미되기도 하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석탑 양식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양식의 석탑도 출현하게 된다. 그래서 완전히 외래적인 요소를 함유한 석탑도 일부 나타난다.

지금까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석탑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조선시대 이후 건립된 석탑에 대해서는 관심과 연구가 저조한 편이다. 특히 암울한 일제강점기 이후 석탑에 대해서는 연구가 전무한 실정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한국 석탑의 기원부터 현재까지의 석탑사를 체계화하고, 이를 통하여 모방이 아닌 한국적인 새로운 석탑 양식을 창의적으로 정립해 나갈 필요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앞으로 근현대기 석탑에 대한 연구도 많은 진척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유점사 범종의 제작 시기와 발원 계층
김 수 현 (고양시청 학예연구사)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15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조선전기의 범종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수 있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왕실이라는 발원계층의 등장이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15세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방법은 풍부한 재정적 지원과 동시에 최고의 기술력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왕실의 안정적인 후원은 15세기의 범종이 이전시대와 달리 대형의 크기를 갖추고, 양식에서도 일부 중국적 요소를 반영하면서, 아울러 주조상태까지 완벽한 왕실발원의 범종을 새롭게 탄생시켰다.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된 ‘유점사 범종’은 앞에서 언급한 왕실의 후원을 통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비록 그 크기가 소형에 속하지만, 종뉴의 형태를 비롯하여, 종신을 장엄한 도안이나 주조상태 등에서 조선전기 왕실발원 범종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다. 이 작품에는 ‘金剛山楡岾寺小鍾’, ‘天三 一百九十斤’이라는 명문이 점각(點刻)의 형태로 남아 있어, 적어도 어느 시점에는 강원도 금강산에 위치한 유점사에서 사용했던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정확한 출토지를 증명할 수 없는 구입품이라 제작시기와 봉안장소를 확인 할 수 없없었지만  <유점사지> 등 관련 사료를 통해 유점사에서 15세기 중반에 왕실의 핵심적인 인물인 세조, 예종, 성종, 효령대군 등에 의해 다양한 후원이 진행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1467년과 1468년 유점사에서 활동했던 ‘학조스님’이 해인사에서도 1492년 왕실의 후원으로 중창불사를 진행했음을 파악하여 유점사 범종의 발원계층을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지금까지 전혀 논의되지 않았던 이 작품에 대한 제작시기를 종뉴의 형태와 종신 상단에 나타나는 횡선을 통해 추정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앞으로 ‘유점사 범종’에 대한 더 많은 문헌자료와 비교할 수 있는 작품들이 발견된다면, 이 작품에 체계적인 연구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며, 발표자에 능력 부족으로 본 발표에서 다루어지지 못했던 ‘유점사 범종’ 범자에 대한 분석은 추후 연구과제로 진행하고자 한다.


조각승 여찬(呂贊)의 활동과 불상 연구 -영동 영국사 목조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최 선 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18세기 전반 ~ 중반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활동한 조각승금강산 유점사 범종을 고쳐 다시 만드는데 참여한 여찬스님은 18세기 전반부터 중반까지 경북 포항 보경사에 거주하던 영남의 조각승으로,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금문의 제자이다.

여찬스님이 주도적으로 제작한 불상이 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은 가운데, 2011년 8월에 충북 영동 영국사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보살좌상의 수종과 연륜분석을 충북대학교 목재연륜은행과 공동으로 조사하면서 보살 바닥 면에 적혀 있는 묵서를 조사하여 최초로 여찬이 만든 보살상을 공개하였다.

이 목조보살좌상은 1711년에 조각승 여찬과 벽한 등이 제작하였는데, 18세기 불상을 만들던 진열스님이나 하천스님과 달리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활동할 정도의 실력을 가졌던 조각가임을 밝혔다,

조선 후기 불상 가운데 발원문과 사적기를 통해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불상은 220여 점에 이른다. 이중 수화승으로 여찬이 제작한 불상은 보살상 1점, 사천왕상 4점이다. 여찬이 제작한 불상은 조선후기 전형적인 불상의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신체 비례와 대의 처리 등이 다른 조각승이 만든 불상과 차이가 난다.

여찬이 제작한 불상의 결가부좌한 다리를 덮은 대의 표현은 1711년 영동 영국사 목조보살좌상이 동일한 두께의 옷주름이 네 가닥 흘러내린 형태에 비해 금문이나 마일이 제작한 불상은 하반신에 걸친 옷자락 끝부분이 각진 형태를 하면서 복부에 앞으로 넓게 펼쳐져 옷자락 끝단이 S자형으로 처리된 것이 차이가 있다.

또한 여찬이 만든 불상은 대부분 17~18세기 불상과 달리 왼쪽 무릎에 늘어진 소매 자락이 표현되지 않았다. 이는 같은 시기에 활동한 색난의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 하천 등이 제작한 불상의 왼쪽 무릎을 완전히 덮은 연봉우리형의 소매 자락 표현과도 차이가 있다.

여찬의 계보는 태진(1600~1615)→법령(1615~1641)→혜희(1640~1677)→금문1655~1706), 마일(1685~1701), 청윤(1684~1706)→여찬(1706~1746)으로 이어졌으며, 여찬은 스승 금문과 마찬가지로 충북 영동, 충남 청양, 강원 삼척, 경기 안성, 서울 등에 불상을 제작하였지만, 1708년에 경북 포항 보경사 괘불도 중수에 사내질(寺內秩)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보경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조각승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조각승이 거주 지역이나 사찰이 밝혀진 스님은 전남 고흥 팔영산 색난, 전남 순천 조계산 충옥, 전북 부안 능가산 일기, 전북 완주 위봉사 단응, 충북의 혜희와 마일, 경북 경주 승호(1640~1719경) 등이 추론이 가능하다. 이후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하천, 진열,  여찬 등이 대표적인 조각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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