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심 넘치는 스승의 표상으로 기라성 같은 후학 양성

‘문도회’와 ‘경운원기 선사 사상실천선양회’의
결성으로 경운스님의 불교사적 위상을 높이 선양


세미나에서 인사말을 하는 호명스님.
근대 한국불교의 대 강백이며 화엄종주인 경운원기(擎雲元奇, 1852~1936) 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 하는 세미나가 6월 14일 동국대학교 다향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경운원기선사사상실천선양회 회장 호명스님(서울 염불사 주지)은 인사말에서

“그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스님의 뜻을 선양하지 못해 안타까웠는데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려 감개무량하다”면서 “앞으로 묻혀 있는 스님의 저술과 시화를 발굴하고 스님의 사상을 재정립, 현대 한국불교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고 말했다.

총무원장 인공스님은 축사에서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경운스님의 학풍과 예술세계가 불교계에 새롭게 조명되고 문도회와 경운원기 선사사상실천선양회의 결성으로 스님의 불교사적 위상이 높이 선양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관음종 총무원장 홍파스님도 “한국불교의 한 시대를 이끈 경운선사의 삶 앞에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으며, 이제부터라도 스님의 업적과 사상을 되살려 21세기 한국불교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기 바란다”며 축하했다.세미나가 끝난 후에는 ‘경운원기 선사사상실천선양회’ 발기인 대회가 열려 회장에 호명스님을 만장일치 선출했다.

문도회장에는 지암·홍파·금용 스님을 공동 추대됐다.세미나는 법산스님(동국대 명예교수)의 기조강연 ‘경운원기의 불교사적 위상’을 시작으로 제1주제 차차석 교수(동방대학원대학교)의 ‘근대 선암사와 그 학풍’, 제 2주제 신규탁 교수(연세대학교)의 ‘경운원기 선사의 사상’, 제 3주제 김경집 교수(위덕대학교)의 ‘근대 경운원기의 활동’, 제 4주제 진철문(동국대학교 외래교수)의 ‘경운원기 선사의 예술세계’ 등이 발표되었다. 이날 발표되었던 논문들을 각각 요약 게재한다.   

정리·사진=홍소연 기자

 
 

차 차 석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근대 선암사와 그 학풍

근대 선암사의 강맥은 함명태선 - 경붕익운 -
경운원기 - 금봉기림으로 4대에 걸쳐 명성 떨쳐

근대 선암사의 강맥은 4대에 걸쳐 그 명성을 날리게 된다. 함명태선-경붕익운-경운원기-금봉기림으로 이어지는 강맥이다. 이들은 법맥과 강맥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를 발하고 있다. 그러나 ‘함명태선’의 강맥은 거슬러 올라가면 ‘침명한성’으로 이어진다. ‘함명태선’은 ‘침명한성’의 전강제자인 것이다. 그리고 ‘침명한성’은 부휴선수 스님의 10세 법손이고, 영해약탄 스님의 5세 법손이란 점을 고려하면 선암사의 법맥은 ‘청허휴정’ 계열이지만 강맥은 ‘부휴선수’ 계열과 중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선암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고승들의 면모는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인적 구성이 다양했다는 것은 사상적으로도 매우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이 조화를 이루어 선암사 특유의 학풍을 창출했던 것이다. 

‘태고보우’를 시발점으로 삼아 전개되는 법맥은 ‘부용영관’에 와서 부휴와 청허 스님의 양대 계열로 분파되며, ‘청허’ 계열은 다시 ‘편양언기’와 ‘소요태능’의 두 계열을 중심으로 선암사의 법맥과 강맥이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법맥을 중심으로 청허파가 선암사를 주도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지극히 학문적인 접근이라 밖에 말할 수 없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구도자들의 열정은 법맥과 강맥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재동자와 같이 무수한 선지식의 지도를 받으며 사상을 계승한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선암사를 주도한 고승들의 구도행각 역시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경우는 계열이 다른 스님이라도 거리낌 없이 초빙하여 학생의 지도를 맡기게 되었다. 선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스승의 가르침 속에서 오도(悟道)의 인연을 함께 하는 스승을 법사로 삼았던 것이다. 바로 고승들의 삶 자체가 융회적(融會的)이었으며, 걸림없는 무집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 선암사의 학풍은 전통과 근대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천주교의 전래, 근대문명의 유입 등은 기존의 불교계에 던져진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조선불교 전체의 교단조직의 정비, 외세의 침략에 따른 전통의 보호와 적응, 유교적 가치의 퇴조와 그에 따른 포교방법의 변화 등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따라서 선암사를 고집하지 않고 송광사와 손잡고 새로운 교육시설이나 포교소, 포교사 양성 등에 나서게 된다. 무집착의 가풍 속에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암사는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와 과거의 활발했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김 경 집 (위덕대학교 교수)

근대 경운원기의 활동

生佛처럼 여긴 당시 명성에 걸맞게 경운 선사는
각황사에서 설법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

개항으로 시작된 한국사회의 변화는 불교계를 달라지게 하였다.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 후기 사회를 개혁하려는 개화파가 생겨났으며, 개화 의식을 지닌 수행자들은 현실 참여를 통해 불교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 하였다. 그러나 한국을 병합하려는 일제의 정치적 야욕은 일본불교를 통해 한국인들을 포섭하였으며, 한일합방 이후에는 사찰령과 같은 통제법령으로 한국불교의 독자적 발전을 방해하였다.

이런 격변기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 경운원기이다. 그러나 그런 활동과 명성에 비해 세간에 알려진 선사의 활동은 의외로 적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경운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 금봉병연이 선사보다도 일찍 입적한 탓에 선사의 행화(行化)를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 그런 선사의 생애와 활동은 두 가지로 구분해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선암사를 중심으로 한 내적 활동은 대승암에서 후학을 양성한 것과, 계단을 복원하여 수행적 기틀을 마련한 것, 환선정을 매입하여 백련결사를 통해 대중을 포교한 것, 그리고 참회계를 설립하여 대중들의 수행을 이끌었던 것들을 들 수 있다.

환경(幻鏡)노사를 따라 선암사로 옮긴 경운은 대승암 강주였던 경붕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1881년 그 뒤를 이어 대승암 강주가 되었다. 강석을 물려받고 교연(敎筵)을 주관한 그는 해박한 가르침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 결과 문하에서 제산의 방장과 좌주가 된 스님이 10여 명이 넘을 정도였다.선사는 정미년(1907)에 예로부터 선암사에 있었던 계단을 회복시켜 선암사 학인을 중심으로 계단을 다시 수립하여 계율을 크게 일으켰다. 그래서 선사를 찾아온 수행자들은 철저한 지계정신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이와 같은 행위를 지켜나갔기 때문에 그의 문하생들은 모두 본래부터 의해(義解)가 그대로 계행(戒行)에 부합된 스승으로 여겼다. 선사는 1915년 무렵부터 7년 동안 서울 각황사에 주석하면서 포교사로 활약하였다. 생불(生佛)처럼 여긴 명성에 걸맞게 선사는 각황사에서 설법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다.이런 경운원기에 대해 당시 세인들은 강학에 투신 만행하신 것과 ‘사경불교’의 거장이었던 것은 물론 포교방면에 있어서도 제세의 도를 걸으신 성자로 추앙하였다. 선사의 열반을 들은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박윤진은 선사를 승성(僧聖)이라 표현하며 당시 청년 불자들이 선사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컸다고 술회하였다.



법 산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경운원기의 불교사적 위상

수행자이자 교육자며 포교사로서 근대 한국불교의 ‘사표’
순천 선암사에 계단 다시 일으키고 계율 진작시켜

경운원기 스님은 수행자로서 교육자로서 포교사로서 근대 한국불교의 사표가 된 선구자인데도 불교정화의 소용돌이 속에 그 혁혁한 섬광이 그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매몰되어 있었다. 스님이 입적하신지 77년 만에라도 선지식의 업적을 회고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스님의 출가 대장부로서의 면모를 현실로 되살린다는 점에서 참으로 다행스럽다.

경운스님은 경남 웅천에서 태어나 17세에 구례 지리산 연곡사에서 환월(幻月) 스님에게 출가하여, 해룡(海龍)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비구계는 화산(華山)스님에게 받았다. 은사인 환경스님의 안내로 당시 명문 강당의 전통을 가진 순천 선암사 대승강당에서 경붕익운(景鵬益運,1836~1915)스님에게 교학을 배웠다. 30세 되던 해에 강석(講席)을 승계했다. 그 후 후학 양성에 전력을 다해 근세 대강백으로 명성을 떨쳤다.

스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학승들이 선암사 대승암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경운스님은 구한말을 대표하는 교육자로서 학문을 탐구하는 자들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함께한 자비심 넘치는 스승의 표상으로 기라성 같은 후학을 배양하였다. 스님은 국가의 정통이 뒤 바뀌는 수난시대인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대를 직시하면서 불교 인재의 양성만이 교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애교 애종의 선구자였으며, 출가수행자로서의 돈독한 신행은 근대 실천수행자로서의 귀감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경정진이다. 스님은 29세(1880)에 통도사 백련암에서 감주(紺紬, 감물 염색 비단)에다가 금니로 <묘법연화경> 1질(14편)을 사경하였다. 이 작품은 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또 스님은 45세때(1897년) 선암사 비로암에서 6년 동안 일행삼배(一行三拜)하며 금강의 신심으로 <80화엄경>을 사경했는데 현재 선암사 박물관에 봉안돼 있다.이러한 용맹정진의 신심이 근대불교사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후학들의 불민(不敏)이 아닐 수 없으며 경운스님의 신행의 위상을 되살리는 신행운동이 반드시 전개되어야만 서양종교에 떠밀려 쇠퇴해가는 한국불교가 새롭게 부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경운스님은 당시 일제의 강점으로 와해되어가는 전통 수행교단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선암사에 계단을 다시 일으키고 계율을 진작시켰으며, 한국불교 교단사적 입장에서도 선, 교, 학, 통솔력까지 두루 겸비한 존경받는 지도자였다.스님은 말년에 “병들고 늙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 되니, 젊어서 공부하여 중생을 건지라”는 내용의 글을 남기고 1936년 11월 11일 선암사 대승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85세, 법랍 68세에서 남기신 여운은 77년을 지나는 오늘에도 교연히 빛나고 있다.

세미나에서 기조강연을 한 법산스님은 “근대 한국불교의 사표가 된 경운스님의 업적을 뒤늦게나마 회고 할 수 있어 다행스러운 일” 이라고 말했다.



신 규 탁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경운 원기 선사의 사상

“선사께서 믿고 계셨다시피 불교의 융성은
오로지 ‘수행’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경운선사에 대해 다양하게 평가했다. 손제자 철운 조종현, 위당 정인보, 일본인 소마 가츠히데(相馬勝英), 상현거사 이능화 등이다. 이들 중 일본인 소마 가츠히데 눈에 비친 선사의 사상을 되짚어본다. 가츠히데는 1934년 1월 9일 당시 선암사 남암(대승암)에 주석하던 경운 선사를 방문하고 그 때의 만남에 대해서 ‘金擎雲禪師와との相見’라는 글을 당시의 <조선불교>에 게재하였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본당의 중앙에는 대승암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었다. 유명한 이 암자를 친히 참배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기쁜 일이었다. 그렇다, 조선 시대 후기 200년간의 반도(半島)의 교학(敎學)은 이 암자에서 발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백 명의 용상 대덕을 배출했던 곳이다. …….법무 스님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거쳐 큰 스님의 거처에 이르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절을 올렸다. 고승 경운 선사를 친히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근엄하다거나 온아(溫雅)하다는 말로는 감히 형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광(寂光)이 빛나고 있었다.

박한영(朴漢永) 노사가 써준 소개장을 올렸다. 아직 시력은 뚜렷하신 듯했다. 분명하고 강력한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예부터 아무것도 아는 게 없지만, 불교는 일본도 조선도 같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조선에 불교가 전해져서 선교(禪敎)를 궁구하였고 또 수행을 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마운 일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불교가 망할 수가 있을까요? 수행이야말로 불교의 생명입니다.”

선사께서 얼마나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고 수행을 하시는지 우리들은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핍박이 심했던 조선시대의 불교, 쇠퇴기로 접어들었던 불교계에 즈음하여 잘도 견디어 결연하게 반도불교(半島佛敎)의 특징을 보호 유지해왔던 것이다. 83년간 산을 내려오지 않고, 출가의 면목을 유지해 오셨던 것이다. 선사께서는 불교는 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오로지 수행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행자가 있으면 불교는 생명 있는 것으로서 전해왔다. 만약 한 명이라도 수행자가 없었다면 불교는 역사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선사께서 믿고 계셨다시피 불교의 융성은 ‘수행’, 단지 이것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선사께서는 일어선 채로 인사를 받으셨다. 문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들릴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경운 선사께서 가시더라도 한영(漢永)·진응(眞應) 두 스님들께 전해져서 더욱 타오르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진 철 문 (동국대학교 외래교수)

경운원기 선사의 예술세계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 스님의 예술가적
능력 일깨워 시와 서예 그림으로 중생제도


경운원기(擎雲元奇) 스님은 근대의 대표적 불교학자이며, 강백(講伯)이요, 사경승(寫經僧)이고 시인이자 화가, 서예가, 승려 예술가이다. 스님은 1880년에 명성황후의 발원으로 <금자법화경>을 서사(書寫)하였다. 이때 쓴 <금자법화경> 한질은 현재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896년부터는 선암사에서 <화엄경>의 사경을 시작하여 5~6년 만에 완성하였는데, 화엄경의 일행 일자를 끝낼 때마다 일배(一拜)하면서 서사하였다고 한다. 평생 동안 후학을 길러내고 불사를 행하면서 수많은 서예 작품과 서신인 서예의 글을 남겼고 머루화, 난초화, 괴석 위에 난초화를 그렸다. 그리고 스님은 선시를 직접 짓고 글로 써서 남겼다. 또한 시인으로서 많은 시를 남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운원기 스님의 대표적인 예술세계인 통도사의 <금자법화경> 사경과 선암사의 <화엄경> 사경 불사는 우리의 아름다운 사경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한반도의 불교 유입에서 화려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 말과 일제강점기까지 연결시키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불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경운원기스님은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오던 사경의 전통을 나라가 외세에 국권을 빼앗기는 위기에서도 그 맥을 잇는 사경을 하여 사경의 역사와 전통을 이은 마지막 스님이 되었다.

나아가 스님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예술가로서 시, 서화에 걸림이 없는 생을 사시면서 “시는 시인이 짓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이 시인을 만든다”는 것처럼 부처님이 설하신 법과 진리가 스님의 예술가적 능력을 일깨워 시와 서예, 그림을 그려 제자와 중생제도에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스님은 수많은 글씨와 그림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 박물관이나 자료집에 나타난 유품 37종 자료를 가급적 한데 모으는 의미가 이 논문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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