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비워진 자리라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적정과 열반

만다라와 장엄회향(回向) -모래 만다라와 도량장엄(道場莊嚴)

티베트에는 ‘만다라(曼茶羅, Mandala)’라는 성화(聖畵)가 있다. 부처님들의 세계 즉, 불국토를 2차원의 평면 위에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만다라는 조성하는 재료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뉘어 지는데,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곱게 물들인 고운 모래를 사용한 ‘모래만다라’이다.


모레만다라를 조성하고 있는 티베트 스님들.

미세한 모래를 사용하는 만큼 조성할 때는 마스크를 쓰거나 호흡을 조심해야하는 등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호흡뿐만이 아니라 모래의 양과 색깔을 조절해가며 조심스럽게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그래서 만다라를 조성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삼매(三昧)에 들어간다고 한다.

조성에 소요되는 기간은 짧게는 며칠에서 몇 주, 길게는 몇 달에서 몇 년도 걸린단다. 이윽고 만다라가 완성되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회향의식을 거행한다. 그런데 그 의식이라는 것이 특이하다. 완성된 모래만다라를 금강저(金剛杵)라는 도구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흩어버리는 것이다. 투자한 시간과 공이 아깝고 안타까운 상황인데도 사람들은 오히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한 종교체험을 한다고 한다. 다름 아닌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이치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천년이 넘게 이어져 오는 불사임에도 예전의 작품이 한 점도 남아있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의식절차가 우리나라 불교에도 있다. 다소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재(齋)를 거행하기 위해 설치하는 도량장엄(道場莊嚴)이 그것이다. 도량장엄을 조성하는 목적과 과정,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이를 처리하는 방법이 그렇다. 또 여기에 내포된 의의와 이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가르침은 더욱 닮아있다.

재를 거행한다 함은, 위로는 삼보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주인 없는 고혼(孤魂)까지를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베푸는 불사를 말한다. 따라서 준비에 있어서도 매사가 정성스럽고 조심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

<범음집(梵音集)>에 의하면, 영산재와 같은 대규모 재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절차와 준비에 밝은 병법사(秉法師) 한 분을 보름 내지 한 달 전에 모셔야 한다고 했다. 만일 당사에 마땅한 스님이 없으면 다른 사찰에서라도 초빙하여 별처(別處)를 정해 정중히 모신다. 그리고 불사에 관한 제반사항을 준비함에 있어서 낱낱이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설혹 병법사의 나이가 많지 않더라도 당사의 주지와 의식의 총책임자인 유나(維那)는 예를 갖추고 그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고도 했다.

병법사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이 제반설비며, 그 가운데서도 수위를 점하는 것이 각종 장엄이다.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서두에 ‘대저 모든 부처님께서 적멸궁을 장엄하심은(夫諸佛諸佛 莊嚴寂滅宮)…’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의 ‘장엄’은 곧 ‘건립(建立)’을 의미하는 것이다.

도량을 불국토화 하는데 필요한 장엄의 종류는 의외로 많다. 현재 영산재보존회에 남아있는 것만 꼽아도, 대웅전 앞 정면에 걸어 모시는 삼신번(三身幡)을 위시해 보고번(普告幡), 항마번(降魔幡), 축상번(祝上幡), 시주번(施主幡), 금은괘전(金銀掛錢), 오방불(五方佛), 팔금강(八金剛), 사보살(四菩薩), 십이지(十二支), 보산개(寶傘蓋), 인물개(人物蓋), 화개(華蓋), 사실개(四實蓋), 산화락(散花落), 진언집(眞言集), 대소고등(大小鼓燈), 청황목(靑黃木=瑞氣布) 등이 있다.

종류도 많지만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가 각별한 만큼 조성하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과 공이 든다. 재료 조달이 원활한 지금도 그 제작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요즘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시간과 공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도량장엄 배치도

도량장엄의 대부분은 종이로 조성한다. 허공에 줄을 걸고 매달려면 비교적 무게가 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기에도 종이가 적합하다. 이때 도량장엄 조성에 들이는 공력과 의의를 티베트스님들이 조성하는 모래만다라와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더하다 덜하다 할 것이 없다. 양자가 모두 불국토를 건립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름이나 한 달 전에 병법사를 모셔야 한다고 한 것도 결국 만다라를 조성할 때처럼 도량장엄을 준비하는데 역시 눈 밝은 스님의 지도와 그만큼의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모래만다라와 달리 도량장엄은 3차원의 공간에 설치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불국정토를 3차원의 공간에 조성해 놓고, 삼보님과 모든 성중님 내지 무주고혼(無主孤魂)까지 두루 초청하여 법도와 절차에 따라 공양을 올리고 베푸는 재를 거행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재의 대미(大尾)는 상·중·하 삼단에 초청해 모신 분들을 전송하는 절차인 ‘배송(拜送)’이다. 배송은 법전 밖에 마련되어 있는 소대(燒臺)로 자리를 옮겨 거행한다.

그런데 이때 재를 위해 조성한 도량장엄을 모두 내려 소대에 모아놓고 남김없이 소각한다. 드린 시간과 공(功) 그리고 정재(淨財)를 생각하면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객관적 입장에서 본다면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지 싶다. 모래로 조성한 만다라를 일시에 흩어 버리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거행하는 불사다. 왠지 가슴 한 쪽이 휑하니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열심히 그리고 정성껏 준비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다. 인생이 아니,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모든 것[有爲法]은 예외 없이 이와 같다는…!

마지막 당부 ‘파성게(破城偈)’
다음 한시(漢詩)는 배송의식(拜送儀式) 말미에 등장하는 게송이다. 마치 명절에 고향을 찾아왔다 돌아가는 자식에게 부모님이 들려 보내는 선물 같은 것이다. 영가에게는 그만큼 알차고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火蕩風搖天地壞(화탕풍요천지괴) 
불에 타고 바람 불어 온 천지가 무너져도
寥寥長在白雲間(요요장재백운간) 
고요하게 오래도록 백운 속에 자리했네.
一聲揮破金城壁(일성휘파금성벽) 
한번의 할(喝) 드날려서 금성철벽 부수리니
但向佛前七寶山(단향불전칠보산) 
붓다께서 계신 방향 칠보산을 향하소서.

사람에게 생로병사가 있듯 우주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이 기간을 대겁(大劫)이라 한다. 우주의 괴멸은 괴겁(壞劫) 말기에 일어나는 불·물·바람 등 세 가지 재앙인 삼재(三災)에 의해 진행된다. 그리고 이 가운데 맨 마지막에 일어난다는 ‘풍재(風災)’는 가장 큰 위력을 지녔다고 한다. ‘블랙홀(black hole)’을 연상하면 얼추 비슷하지 싶다.

그런데 이런 위기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모든 번뇌의 근본이요 일체 악업(惡業)의 원인인 근본무명(根本無明)이다. 근본무명이 얼마나 없애기 어려운 것인지 증거가 있다. 그 모진 괴겁과 텅 빈 공겁(空劫)을 지내고 다시 맞이한 주겁(住劫)임에도 중생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이 그 증거이다. 먼 데서 찾을 필요가 없다. 이 글을 매개체로 마주하고 있는 필자와 독자 여러분이 그 증거이자 증인이니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번뇌를 다스리는 선가(禪家) 특유의 방법인 일성(一聲) 즉, 할(喝)로써 백운 속에 고요히 있으면서 단단하기는 금성철벽과 같은 근본무명의 타파를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줄탁동시(줄啄同時)라 하지 않았던가?! 영가 스스로에게 이를 받아들이려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생령(生靈)인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금강저 아래 흩어지는 모래만다라! 화염 속으로 사라지는 도량장엄! 하지만 이렇게 철저히 비워진 그런 자리라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적정(寂靜)이요 니르바나(涅槃, nirvana)이다. 단, 그것은 만다라나 장엄의 조성에 신심(信心)과 선심(善心)과 정성을 기울여 동참한 사람들만의 몫이다.
그리고 보니 이 글의 마침표로서 마땅한 게송이 떠오른다.
<금강경> ‘여리실견분 제5(如理實見分 第五)’에 나오는 ‘금강경 제일게(第一偈)’ 이다.

凡所有相(범소유상)  온갖 모양이 있는 것은
皆是虛妄(개시허망)  모두 다 허망하나니
若見諸相非相(약견제상비상) 만일 모양 있는 모든 것이 모양이 아닌 줄 알면
卽見如來(즉견여래) 곧 여래를 보리라.


  (동방불교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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