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안(色眼)이 아닌 혜안(慧眼)이라야 느낄 수 있어

“유서 깊은 사찰 가운데 미타전이 있고 등반할만한 명산이 있는 곳을 찾아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산문(山門)에 들어 우선 부처님을 뵙고 자신의 서원을 점검한 후, 숨이 턱에 차고 눈앞이 아뜩해지도록 올라보자. 숨이 쉬어지지 않으면 흐르다 멈춘 판소리에서처럼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고, 눈앞이 아뜩해 보이는 것이 없으면 산수화에서처럼 마음의 눈으로 내다보자. 그러다 정상에 올라 사방이 탁 트이면, 그 분께서 그토록 일러 주시려든 속내를 짐작해 보자. 아마도 아미타전에 ‘阿’자가 없어도 된다는 소식 정도는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서울 삼청동에 있는 한방찻집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 첫번째는 어딜까?

멋  - 두 번째로 잘하는 집 -


 
우리말 ‘멋’의 의미를 오롯이 표현할 외국어는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우리말로 풀이하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다. 일반적 의미가 아닌 특수한 의미가 함축되어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풍류(風流)나 서양의 유머(humor)는 멋의 한 속성으로서 한 단면일 수는 있으나 멋이라는 개념의 전부가 될 수 없다.
멋은 색안(色眼)이 아닌 혜안(慧眼)이라야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미타전(×)? 아미타전(○)?

혹자가 지적했다. ‘아미타불을 모신 법전을 미타전(彌陀殿)이라 함은 잘못이니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 해야 한다. 나한전(羅漢殿)도 마찬가지로 아라한전(阿羅漢殿)이라야 옳다’라고, 그리고 그 지적은 문법적인 면에서 백 번 타당하다.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우선 아미타불에 대한 사전적 의미부터 살펴보자. 불호(佛號)로서의 아미타는 아미타바(Amitabha)나 아미타유스(Amitayus)의 약(略)이다. 바(bha)는 광명(光明)의 뜻이며, 유스(yus)는 수(壽)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미타’는 의미를 달리하는 두 가지 불호의 공통분모인 셈이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시간적 의미와 무한한 빛이라는 공간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중생을 구제하시는 무연대비(無緣大悲)의 결정체로서 서방극락세계에 계시며 사바의 중생들을 불국으로 이끌어 제도하심을 본원력으로 하시는 부처님이 아미타불이시다.

혜안이 열려야 보이는 것

혜안이 열려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동국대 서울 캠퍼스에는 여느 대학에서나 볼 수 있는 대강당이 없고 중강당만 있다. ‘우주법계(宇宙法界)’가 대강당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인위적으로 조성한 강당은 제아무리 크다해도 우주에 견줄 바가 못된다. 그리고 보면 중강당이란 명칭도 과남하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명명하였다니 참으로 기막힌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태고종 총본산 순천 선암사에서는 스님들의 교육기관인 강원(講院)을 ‘천불전(千佛殿)’이라 부른다. 건물의 규모도 대단하다. 자연히 ‘저 안에 들어가면 천 분의 부처님을 뵐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런데 정작 한 분의 부처님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 강원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곧 미래의 부처님이시니 따로 부처님 존상을 모실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옳거니! 저절로 무릎을 치게된다.

이런 멋은 세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울 삼청동(三淸洞)에 가면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이라는 한방찻집이 있다. 첫 번째가 어딘지 궁금해진다. 각자 자신의 집이란다. 문득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동요가 떠오른다.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 차 맛이야 마셔봐야 알겠지만 마음으로 느껴지는 맛만큼은 정말 맛깔스럽기가 이를 데  없다.

이런 예는 동양화나 판소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양화의 경우는 여백 없이 화폭을 채운다. 이에 비해 동양화 특히 우리 산수화에는 여백이 많다. 그 여백에는 화폭에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또 다른 풍경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보는 사람의 몫이다. 판소리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소리가 흐르다 잠시 끊긴다. 그랬다가 얼마만큼의 짬을 두었다 다시 이어진다. 듣는 사람은 그 가운데서 또 다른 차원의 소리를 듣는다. 이른바 여백의 미(美)요 멋이다.

미타전(○)! 아미타전(○)!

이쯤에서 미타전에 왜 ‘무(無)’를 의미하는 ‘아(阿)’자가 없는지 정리해보자. ‘阿’나 ‘無’는 없음을 의미하는 글자이니 굳이 쓰지 않아도 상관없단다. 있어야 할 자리에 없으니 그 자체로 이미 없다는 의미가 전달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아미타전이나 아라한전에서 ‘아(阿)’자를 생략한 이유다. 분명히 해두거니와 ‘阿’자나 ‘無’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생략된 것이라는 말이다. 색안(色眼)으로 보는 것이 표면의 글자라면, 혜안(慧眼)으로 살피는 것은 이면의 이치다.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거나 이미 정설이 되어있는 것일지라도 잘못된 것은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에 앞서 옛 어르신들께서 정말 일러주시고자 하는 점을 간과하고 있지나 않은지 마음의 눈으로 점검해보아야 한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거니와 ‘아(阿)’자의 의미를 몰랐다면,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는 법전의 이름인들 어찌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멋’을 말하려는 것이다. 무량수 무량광에서 ‘수’와 ‘광’만을 모아 ‘수광전(壽光殿)’이라 한 것이나, ‘수’와 ‘광’을 함께 나타내려 차라리 생략하고 ‘무량전(無量殿)’이라고 한 것이나 모두 혜안을 지닌 멋쟁이들의 작품이다.

지명(地名)과 소원(所願)의 함수관계

높은 산봉우리의 이름에 왜 불·보살님의 명호를 사용하고 있을까? 지금까지 이야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듯하지만 이 또한 ‘멋’에 관한 이야기다.

높은 산에 올라 본 사람은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 숨이 턱에 차다못해 나중에는 코에서 단내가 나고 눈앞이 아뜩해지기까지 한다. 수행의 과정도 비슷하다. 두 과정 모두 급하다고 서둘러도 안되고, 힘들다고 포기해도 안됨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또 한가지 닮은 것이 있다. 그 노정(路程)이 단조롭다는 것이다. 등반하는 동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무와 풀 그리고, 바위와 냇물 정도로 특별할 것이 그다지 없다. 수행자 역시 성불의 경지에 이르기 전에 느끼는 것은 불국의 성스러움이 아니라 사바의 온갖 잡다한 일이 대부분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정상에 이르면 눈앞이 탁 트이며 들어오는 풍경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진다.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원근의 산을 모두 굽어보게 된다. 짐작커니와 성불의 경지 역시 산의 정상에 오른 것처럼 범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지견(知見)이 열리고 열반의 경지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굽어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으나 이 두 가지 경지가 쉼 없이 오른 자만의 몫이라는 점에는 틀림없다.

이번엔 봉우리 이름이다. 방금 올라선 봉우리에 이름을 붙이려 주위를 살펴보니 더 이상 높은 봉우리가 없다. 그래서 ‘비로봉(毘盧峰)’이라 했다. 왼편 저 멀리 이 산만큼은 아니지만 높은 봉우리가 있다. 이번엔 ‘관음봉(觀音峰)’이라 했다. 몸을 돌려 다른 쪽도 살펴보았다. 꽤 높은 봉우리가 있다. 해서 보현봉(普賢峰)이라 명명했다. 이 봉우리들을 오를 때면 주인공이신 그분들과 같은 원력을 지니라는 거룩한 속셈이 있어서이다.

고찰 법주사(法住寺)를 품고 있는 속리산(俗離山)의 봉우리 이름이 비로봉, 관음봉, 보현봉임을 생각하며 해본 말이다. 산 이름을 그렇게 붙여놓았으니 자연 부처님과 보살님을 닮게 될 것이다. 지명과 소원의 함수관계다. 정상에 올랐을 때의 환희로움으로써 성불의 경지를 짐작할 수만 있다면, 명명한 보람으로 이에 더할 것은 없을 것이다.

수행자는 멋진 등반가

과문한 탓인지 강이나 바다의 이름에서는 불교적인 것이 잘 생각나질 않는다. 그런 가운데 전남 영광군 서북 해안에 있는 ‘법성포(法聖浦)’와 남해 이충무공의 유적지인 관음포(觀音浦) 등 두어 가지가 떠오른다.

이 가운데 법성포는, 인도 간다라(Gandhara) 출신의 스님 마라난타(摩羅難陀) 존자께서 제15대 침류왕 원년(384) 동진(東晉)을 거쳐 백제에 처음으로 불교를 들여와 부처님의 자비를 전한 곳이다. 즉, ‘법문(法文=經典)과 성상(聖像)이 도래한 곳’ 또는, ‘불법을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라난타 존자께서는 포구 근처 불갑면 모악리에 사찰을 건립하고 이름을 불갑사(佛甲寺)라 했으니, ‘불(佛)’은 불교를 의미하는 것이고, ‘갑(甲)’은 첫 번째라는 의미로서 불지종가(佛之宗家)라는 의미란다. 그러다 보니 무학대사와 이성계와의 대화가 생각난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올랐다. 보위(寶位)에 오르니 만나는 사람 모두가 머리를 조아렸다. 태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당하십니다’ ‘망극하옵니다’라고 하는지라 세상사는 재미가 없었다. 하루는 무학대사에게 제안을 했다.

“대사, 오늘은 군신의 예를 떠나 나와 함께 농담을 해보지 않으시겠소?” 대왕의 심중을 꿰뚫은 무학대사는 순순히 응했고, 태조가 먼저 농담을 건넸다. “대사의 얼굴은 꼭 도야지 같소이다.”라 하자 무학대사는, “대왕의 용안은 꼭 부처님 같으십니다” 했다. 그러자 태조는 못마땅한 어조로 따졌다.

“약속이 틀리지 않소? 농담을 하자는 데 아부를 하다니…” 그러자 무학대사는, “아부가 아니옵니다.” 하였다. 태조는 의아하여“아부가 아니라니? 방금 나를 부처님 같다고 하지 않으셨소?”
태조의 말에 무학대사는 태연히, “본래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이라 했습니다.” 무학대사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한참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인 왕을 돼지 같다고 한 무학대사의 배포도 배포려니와 이를 웃음으로 받아넘긴 이성계의 도량도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멋지지 아니한가?! ‘법성포’라 하면, 영광굴비만 떠올릴까봐 해본 말이다.

말나온 김에 유서 깊은 사찰 가운데 미타전이 있고 등반할만한 명산이 있는 곳을 찾아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산문(山門)에 들어 우선 부처님을 뵙고 자신의 서원을 점검한 후, 숨이 턱에 차고 눈앞이 아뜩해지도록 올라보자. 숨이 쉬어지지 않으면 흐르다 멈춘 판소리에서처럼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고, 눈앞이 아뜩해 보이는 것이 없으면 산수화에서처럼 마음의 눈으로 내다보자. 그러다 정상에 올라 사방이 탁 트이면, 그 분께서 그토록 일러 주시려든 속내를 짐작해 보자. 아마도 아미타전에 ‘阿’자가 없어도 된다는 소식 정도는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멋’만 있으면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경지다.

수행자는 멋진 등반가다.


  (동방불교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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