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 등 어학의 최고 전문가…세종도 ‘~ 祐國利世 ~’ 법호 내려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의 주역인 증거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글창제 무렵 한글로 번역한 것들이 불교경전이라는 점이다. <능엄경언해>가 대표적이며, 소헌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쓴 <석보상절>도 있다. 또 ‘월인천강지곡’은 석존의 공덕을 찬양하는 한글로 지은 노래다. 만일 한글이 집현전 학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논어>나 <맹자> 등 유교의 경전들을 먼저 번역하지 않았겠는가. <월인석보>에 실린 세종의 어지(御旨)는 108자이고, <훈민정음>은 28자와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08은 번뇌의 수이고,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종을 칠 때 그 횟수가 28번과 33번이다. 28과 33은 하늘의 28수(宿)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天)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를 우연이라 할 것인가? ‘신미 창제설’의 결정적인 근거는 신미대사가 당대 범어나 티베트어 등 어학의 최고 전문가였고, 한글이 범어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에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집현전 학사들은 한문에는 대가였지만 기타 외국어에 능하지는 않았다"


여시아문 - 한글 창제의 주역 신미대사 
속리산 복천암에 봉안돼 있는 신미대사 영정.
불교에서는 대상을 인식하는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여 이를 ‘삼량(三量)’이라 한다. 외계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현량(現量), 이미 아는 사실을 가지고 비교해서 추리하는 비량(比量), 성인의 가르침이나 말씀을 의지하여 아는 성언량(聖言量)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초로인생(草露人生)과 같이 유사성 또는 동일성에 견주어 아는 비유량(譬喩量)을 더해 사량(四量)을 말하기도 한다.

인식의 방법에 대해 먼저 언급한 것은, 이 글의 제목을 ‘여시아문’이라 한 것처럼, 필자가 연구한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들은바 이야기를 정리해서 전하는 것이기에 이 점을 분명히 해두려는 것이다. 내용인즉 한글창제에 관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한글 창제의 주인공은 집현전 학사들이 아니라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가 주인공이라는데 초점을 맞춘 이야기이다. 아직 공인되지는 않았으나 개연성이 충분하기로 소개코자 한다.

신미대사는 영산(永山) 김씨 가문의 사람으로 속명은 수성(守省)이다. 부친은 김훈(金訓)이며 태종3년에 충북 영동군 용산면 상용리 오얏골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생이면서 숭불을 주장했던 집현전 학사 김수온(金守溫)은 그의 둘째 아우이다. 대사는 기품과 학문이 모두 출중하였고, 성장하여 집현전 학사로 있었으나 벼슬보다 불법에 뜻이 있어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로 출가하여 수미(守眉)대사와 함께 수행하였다.

법주사 말사인 복천암(福泉庵)에 주석하고 있던 대사는 세종의 부름을 받아 적어도 7년 이상 복천암과 한양을 오가며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 한글창제가 1443년 세종25년의 일이고, 반포는 1446년 세종28년의 일이었다.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불경의 원전인 범서(梵書)로 된 경전을 보기 위해 범어(梵語, Sanskrit)는 물론 티베트어 등을 연구하여 어학(語學)에 밝았기 때문이다. 신미대사는 범어가 소리글로서 초성, 중성, 종성으로 이루어진 점에 착안하여 소리글인 한글을 마무리지었다. 해인사에서 <법화경>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 등에 토(吐)도 달아보고 번역도 하여 이른바 실용성 여부에 관한 임상시험을 성공리에 끝냈다. 이런 결과를 보고 받은 세종은 매우 기뻐하며 1446년 9월 상달에 이렇게 탄생한 우리글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름하여 반포하였다. 이어 우리글로 노래도 지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이 그것이다.
그 후 세종은 신미대사의 수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대사가 주석하고 있는 속리산 복천암에 주불이신 아미타불과 관음·세지 양대보살 등 삼존의 복각조성(復刻造成)에 대 화주가 되었다.

성삼문, 정인지 등 유생들은 최초 한글창제의 발기를 주상(主上)이 하였으니 그 공을 주상에게 돌리자고 하였다. 무주상(無住相)의 도리를 아는 신미대사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쉽게 익히고 써서 그들의 삶에 보탬이 되고, 한 걸음 더 나가 수행과 성불에 도움만 될 수 있다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한글창제 관계문헌에는 신미대사에 대한 언급이 배제되었다. 오직 영산 김씨 족보에만 ‘집현원학사 득총어세종(集賢院學士 得寵於世宗 / 집현원 학사로서 세종대왕의 총애를 얻었다)’이라 하여 그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다.

한편, 한글창제 전후가 세종에게는 개인적으로 비운이 겹친 때이기도 했다. 세종 26년에 다섯째 왕자 광평대군을 잃었고, 세종 27년에 일곱째 왕자 평원대군을 잃었으며, 세종 28년에는 소헌왕후마저 승하하였다. 이에 세종은 내원당을 짓고 이들의 왕생을 빌었고, 그 법요를 신미대사와 그의 동생인 김수온으로 하여금 주관토록 했다. 하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한 세종은 급기야 병환을 얻게 됐다.

문종과 수양대군이 세종을 지성으로 시탕(侍湯)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에 신미대사로 하여금 약을 쓰게 하니 완쾌하였다. 세종은 이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신미대사와 더욱 가까워 졌다. 장차 세조가 될 수양대군과의 친분도 이때 이미 돈독하였다.

후일, 세종은 병환이 위중한 가운데서도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 / 선종과 교종의 총수로서 온전히 정법을 전하고 자비와 지혜 두 가지를 운용하여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함에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혜각존자)’라는 긴 법호를 지어 신미선사께 사호(賜號)토록 문종에게 위임했다.

한글창제라는 대업을 마친 신미대사는 아무 미련 없이 속리산 복천암으로 돌아갔다. 그 후 보위를 문종이 이었으나 병약하여 일찍이 붕어하였다. 단종이 12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수양에 의해 폐위 당하고 수양이 등극하였다. 조카를 몰아낸 세조의 마음도 편할 리가 없었다. 끊임없이 번민하다보니 고질적인 피부병까지 얻게 되었다. 요즘말로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인 것이다.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예전, 세종대왕의 시탕을 함께 했던 신미대사 뿐이라 생각하고 복천암으로 거동키로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조는 온양과 초정(椒井)에서의 목욕을 핑계 삼았지만 속리산 복천암 방문이 실제 목적이었다’ 라고 적고 있다.

5백 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린 어가행렬은 청주에서 이틀을 머문 뒤, 충북 보은 말티재 밑 현, 대궐 터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세조 10년 갑신 2월 28일 신해일, 말티재를 넘어 이등변삼각형의 우람한 소나무 밑을 지나는데 왕이 탄 연(輦)이 소나무 가지에 걸릴 것 같았다. 마침 이 광경을 본 왕이 다급한 나머지 “연이 걸리겠다. 연이 걸리겠어?” 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나뭇가지가 저절로 올라가 연이 무사히 통과하게 되었다. 왕이 이를 기특히 생각하고 정2품 벼슬을 내렸다.

발길을 재촉하여 복천암에 당도하니 신미대사를 비롯하여 당대의 대덕인 수미(守眉), 사지(斯智), 학조(學祖), 학열(學悅) 스님 등이 반갑게 영접했다. 함께 기도하고 법문을 들었다. 사흘을 그렇게 보내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환궁하려는 세조에게 신미대사가 오대산 상원사 중대 적멸보궁 복원에 대 화주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세조가 흔쾌히 응하였고, 학열대사가 도감(都監)의 소임을 맡았다.

세조의 적극적 후원으로 같은 해(세조 10년) 유월에 적멸보궁 복원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신미대사는 세조를 초청하였다. 세조는 흔쾌히 승낙하고 5백 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참석하였다.
한글이 창제(1443)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에 집현전 실무 담당자인 부제학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이 한글의 반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처럼 반대하는 배경에는 훈민정음의
원리적 근거가 유교가 아닌 불교였기 때문이고, 그 주역이 신미대사였기 때문이다.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의 주역인 증거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글창제 무렵 한글로 번역한 것들이 불교경전이라는 점이다.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가 그 대표적인 것이며, 소헌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쓴 책 <석보상절(釋譜詳節)>도 있다. 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석존의 공덕을 찬양하는 한글로 지은 노래다. 만일 한글이 집현전 학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논어>나 <맹자> 등 유교의 경전들을 먼저 번역하지 않았겠는가.

<월인석보>에 실린 세종의 어지(御旨)는 108자이고, <훈민정음>은 28자와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08은 번뇌의 수이고,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종을 칠 때 그 횟수가 28번과 33번이다. 28과 33은 하늘의 28수(宿)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天)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를 우연이라 할 것인가?
‘신미 창제설’의 결정적인 근거는 신미대사가 당대 범어나 티베트어 등 어학의 최고 전문가였고, 한글이 범어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에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집현전 학사들은 한문에는 대가였지만 기타 외국어에 능하지는 않았다.

이로부터 5세기가 지난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선생이 운영하던 ‘하기 국어강습소’의 졸업생들과 국어 연구에 뜻을 둔 사람들이 김정진을 회장으로 ‘한국어 연구학회’를 창립하였다. 그런데 그 장소가 서울 신촌에 자리한 삼각산 봉원사다. 학회 회원들은 1926년 한글날을 제정했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었으며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최현배, 이희승 등 학회 회원 33인이 일제에 검거되어 혹독한 고초를 당했다. 재판 도중 이윤재, 한징 두 분은 고문으로 옥중에서 돌아가기까지 했다. 이렇
듯 목숨을 바쳐 지켜왔고 지켜가야 할 우리민족의 얼이 담긴 우리글이다.

2008년 8월 31일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하여 한글학회 회원들은 봉원사 사부대중의 박수 속에 처음 학회를 창립한 자리에 표지석을 세웠다. 누구보다도 신미대사께서 대견해 하실 일을 한 것이다.
이 글 서두에서 언급한 삼량(三量) 가운데 성언량(聖言量)이 있다. 성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한국세종한림원 총재 강상원(1938~) 박사의 연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작성했거니와 만에 하나 왜곡되었거나 잘못 전달된 부분이 있다면 필자의 몫임을 말씀드리는 바이다.

한글! 세계의 여러 문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인 글임을 인정받은 우리글이다. 국가의 주권을 되찾은 지도 어언 7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일제의 상흔도 많이 아물고 그만큼 모든 것이 제 자리와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이제 한글이 누구에 의해 창제되었는지도 바로 알고 또 알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한글을 창제하신 신미대사! 불자로서 자긍심과 사명감이 절로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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