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불도는 20세기 초 서울지역  괘불도 중  보존 상태 가장 좋아

# 불교회화

봉원사 괘불도. 810㎝×380㎝.
서울 동대문 연화사에 봉안돼 있는 괘불도.
봉원사 괘불도와 동일한 구도와 색채 등을 사용한 고양시 흥국사 불화.


















(1) 괘불도

봉원사 괘불도는 810㎝×380㎝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화면의 구성은 크게 삼단으로 나뉘는데, 상단에는 아미타삼존불을, 중단은 가섭과 아난존자를, 하단에는 둥근 원 안에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를 배치하였다.

상단의 삼존은 중앙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시립하였는데, 두 보살이 아미타불의 양 어깨 쪽을 살짝 가려 앞에 배치된 것이 보인다. 하지만 나란히 서 있는 삼존 중 약간 뒤에 배치된 아미타불이 좌우 협시보살 보다 크다. 화면 상단은 두광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 공간에는 오색구름을 위로 펼쳐지게 그려 넣었다.

아미타불은 둥근 얼굴에 높고 뾰족한 육계와 나발을 윤곽으로만 표시하고, 큰 반달형의 중앙계주와 원형의 정상계주 위에서 빛이 뿜어나오고 있다. 광배는 여러 겹으로 구성되었고, 가장 바깥쪽에 화염문을 두르고 있다. 여래상의 얼굴에는 초생달을 닮은 눈썹, 반쯤 뜬 눈, 약간 치켜 올라간 눈꼬리 등이 표현되었다. 아미타불의 착의는 변형우견편단이지만 길게 늘어진 옷자락이 오른쪽 어깨를 덮고 있어 마치 통견을 입은 듯이 보이고, 여의두문과 같이 도식화된 승각기 자락과 그것을 묶어 맨 띠의 매듭이 드러나 있다.

법의의 겉은 주홍색 바탕에 금니로 원 안에 화문(花文)을 가득 채운 사방연속문을 그려 넣었다. 옷자락 끝에는 단을 두고 보상화문을 연속으로 장식하였으며, 법의의 속은 군청색 바탕에 흰색과 분홍색의 작은 점을 수 없이 찍어 색채의 대비효과가 있다. 이러한 화문 장식은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괘불도에 표현된 특징이다.

왼손은 명치위치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하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에 내려 아미타구품인 가운데 중품하생인을 취하고 있다. 신체에 비하여 오른팔과 손가락을 너무 길게 표현하여 균형이 맞지 않는다.

협시보살인 관음과 대세지보살은 본존에 비하여 약간 작고, 원형의 두광을 두르고 있다.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관(冠) 위에 보병(寶甁)과 화불(化佛)이 있어 존명(尊名)을 확인할 수 있다. 협시보살의 법의 표현은 아미타불과 유사하지만, 양 겨드랑이에서 앞가슴으로 늘어진 치레와 가슴 양쪽에 나와 있는 고리 장식에서 아래쪽으로 길게 늘어뜨린 두 줄의 화려한 치레가 있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보살상은 머리카락을 두 가닥으로 묶어 귀를 감싸고 있는 것과 귀볼에 커다란 귀고리를 달고 있는 모습에서 차이가 난다. 수인(手印)은 양 보살이 좌우대칭을 이루어 반대로 표현되었고, 관음보살은 왼손의 손바닥을 위쪽으로 모란을, 오른손의 손등을 아래로 향하여 줄기의 끝을 받치고 있다. 이와 반대로 대세지보살은 활짝 핀 백련을 들고 있고, 손의 위치가 관음보살과 반대이다.

중단에는 좌우 끝에 아난과 가섭존자를 배치하였다. 나한들은 본존을 향하여 몸을 약간 튼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섭존자는 머리가 거의 벗겨져 관자놀이와 귀 위쪽에만 백발이 조금 남은 상태로 두타행(頭陀行)의 결과로 얻어진 듯 정수리가 솟아있고, 이마와 미간에는 주름이 있고, 흰 눈썹은 눈꼬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입은 꽉 다물고 수염은 짧고 성기다.

두 손은 앞가슴 부근까지 올려 집게손가락만 위쪽을 향해 곧게 세웠고, 나머지 손가락은 주먹을 쥔 상태이다. 오른쪽에 서 있는 아난존자는 합장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단에는 좌우대칭으로 주색(朱色)이 바탕색인 둥근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문수와 보현동자를 배치하고, 나머지 공간은 구름으로 채워 넣었다.

동자는 머리를 틀어 올려 상투를 튼 모습으로 원형의 두광을 두르고 있다. 천의가 두 겨드랑이에서 어깨 위로 나부끼고, 팔목을 휘감아 길게 늘어진 표현은 동일하다. 문수동자는 손에 활짝 핀 백련(白蓮)을, 보현동자는 여의(如意)를 들고 있다.

화면의 맨 아래쪽에 중앙과 좌우에 긴 장방형의 적지란(赤地欄)에 ‘皇城外西嶺三角山奉元寺 …證明 隱菴堂奎應」金魚片手 韓峰堂應作」秋山堂天性」德月堂應崙」錦華堂機형」明應堂幻鑑」普庵堂亘法」梵華堂潤益」錦雲堂正機」淸庵堂雲照」在謙 … 大韓國光武五年辛丑三月 日奉安于」시주질」皇城內西○皇華坊景運官○居住」淳嬪邸下甲寅生嚴氏大蓮花 伏爲」亡父壬申生寧越嚴氏」亡母甲申生密陽朴氏」…尙宮淸信女乙未生金氏大起心 保體…’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이 괘불도는 1901년 경운궁에 살던 엄비가 돌아가신 부모와 외가 조상을 위하여 봉원사에 발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상궁 김대기심이 같이 발원한 것으로 보아 엄비를 모시던 상궁임을 알 수 있다. 이 괘불을 그린 불화승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불화승으로 수화승 응작스님은 호가 한봉(韓峰, 漢峰)으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불화승이다.

그는 19세기 후반에는 창엽(槍曄, 彰葉)으로, 20세기 전반에는 응작(應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1855년에 수화승 퇴운주경과 경기 남양주 불암사 칠성도를, 1858년에 수화승 성운영희와 남양주 흥국사 괘불도를 그리고, 수화승으로 1871년에 서울 영화사 삼성각 나한도를 시작으로, 1874년에 경기 안성 청룡사 명부전 지장도와 아미타후불도 등을 그렸다.

이후 1901년에 수화승 대은돈희와 서울 연화사 괘불도와 수화승으로 신중도 및 천수천안관음도를 그리고, 수화승으로 서울 봉원사 괘불도를, 1902년 서울 청룡사 심검당 가사도(袈裟圖)를 조성하였다.
봉원사의 괘불도는 1901년에 서울 동대문 연화사와 1902년에 경기 고양 흥국사 불화와 동일한 구도와 색채 등을 사용하였다. 이 괘불도는 20세기 초반 서울 지역의 사찰에 봉안된 괘불도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편으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불화승이 제작한 것이다. 
 
타원형의 얼굴에 민머리를 한 지장보살도는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2) 지장보살도
지장보살도는 사람이 죽은 후의 세계인 명부(冥府)를 관장하여 지옥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보살(菩薩) 및 권속(眷屬)을 그린 불화이다. 지장보살도는 크게 지장전의 후불도(後佛圖)나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에 중단도(中壇圖)로 제작되었다.

삼천불전에 보관 중인 지장도는 원래 명부전에 봉안되었던 불화로, 비단바탕에 진한 채색을 사용하였다. 화면의 구성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및 대왕 등이 둘러싼 군도(群圖) 형식이다.

지장보살은 중앙에 자리하여 다른 권속에 비하여 크게 묘사되고, 머리에 둥근 녹색 두광과 신광을 두르고, 높은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여 오른발이 노출되어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 민머리는 조선후기 지장보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올려 엄지와 중지를 자연스럽게 안으로 모으고, 손바닥 위에 보주(寶珠)를 쥔 왼손은 무릎에 자연스럽게 올려놓고 있다. 법의는 화려한 금니(金泥)로 연화문을 그려 넣은 적색바탕에 연화당초문이 그려진 깃을 달고 있다.

안쪽에 녹색의 승각기는 붉은 색 끈으로 묶고 있다. 지장보살을 협시하고 있는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는 지장보살의 무릎 아래에서 몸을 약간 틀어 마주보고 서있고, 무독귀왕은 경궤를, 도명존자는 석장을 잡고 있다. 지장보살의 좌우에는 같은 수의 많은 권속들이 대칭으로 3단을 이루고 있다. 상단과 하단의 인물은 크기를 다르게 그렸고,  대왕과 권속들은 합장하거나 홀을 들고 있는 형태로 묘사하였다. 전체적으로 설채법(設彩法)은 적색, 녹색, 군청을 위주로 부분적으로 금니(金泥)를 칠하였다. 

화기가 남아있지 않아 제작시기와 불화승을 알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선명한 적색(赤色)과 녹색(綠色)을 사용한 설채법과 인물의 비례와 배치 등에서 19세기 후반 지장보살도의 특징을 보인다.


봉원사 시왕도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

(3) 시왕도
시왕도는 인간이 죽은 후 명부에서 인간의 생전의 죄업(罪業)을 심판하여 육도윤회(六道輪廻)를 결정한다는 지옥의 시왕을 그린 불화이다. 즉 진광대왕(秦廣大王), 초강대왕(初江大王), 송제대왕(宋帝大王), 오관대왕(五官大王), 염라대왕(閻羅大王), 변성대왕(變成大王), 태산대왕(泰山大王), 평등대왕(平等大王), 도시대왕(都市大王), 전륜대왕(轉輪大王)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원래 시왕도는 명부전에 걸려 있었지만, 최근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삼천불전에 봉안하였다.

봉원사 시왕도는 세 장면을 하나의 화면에 그린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 시왕도는 상단과 하단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진다. 상단에는 책상 앞에 앉은 시왕이 판관, 사자, 동자 등을 거느리고, 하단에는 지옥에서 옥졸들에게 무서운 형벌을 받는 망자를 묘사하였다. 전각에 모실 때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홀수 대왕은 왼쪽에, 짝수 대왕은 오른쪽에 모신다.

이 가운데 8번째 평등대왕은 명부에서 죽은 이가 맞이하는 백일째 심판하는 대왕으로, 그 밑에 죄인의 몸에 쇠못을 박는 철상지옥이 그려져 있다. 그림 옆에 붙어있는 종이에는 묵서로 ‘제팔 평등대왕 거해지옥(第八平等大王鉅骸地獄)’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톱으로 죄인의 몸을 자르는 거해지옥(鉅骸地獄)은 제7 태산대왕 밑에 그린 장면이고, 평등대왕 밑에는 철상지옥(鐵床地獄)이 그려져 있어야 한다. 따라서 봉원사 평등대왕도는 묵서에 지옥 명칭이 잘못 적혀 있다. 평등대왕의 좌우에는 변성대왕과 오도전륜대왕이 그려있어 가운데 그림은 평등대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등대왕의 뒤에는 산수화를 그린 병풍이 둘러 있고, 의자에 앉아있는 평등대왕과 판관들이 죄지은 사람을 심판하고, 밑에는 커다란 바위로 죄인들을 누르고 있다. 설채법은 적색을 위주로 청색과 녹색을 부분적으로 사용하였다. 화면에 화기(畵記)가 없어 정확한 조성시기와 불화승을 알 수 없지만, 평등대왕의 이목구비 처리와 여러 존상들의 배치 등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문학박사,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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