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암혼수는 태고보우의 법맥은 물론나옹혜근의 법맥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분명한 것은 혼수가 사사한 인물 모두임제종의 법맥을 전승·강조했다는 것이다 환암혼수의 생애에 관한 기본자료는 ‘충주청룡사보각국사환암정혜원융탑비문’ (1394년 건립)으로 그 출처는 ‘조선금석총람’ 下 pp.719-725 권근이 찬한 비문과 ‘조선불교통사’ 상 pp.339-343 권근(權近)이 찬한 비문 및 pp.344-345 이색이 찬한 환암기(幻菴記)가 이에 해당한다. 이를 바탕으로 환암의 생애를 더듬어보기로 한다.------------------------------------------환암혼수는 고려 말기에 불교계를 이끌어갔던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환암어록』(상·하)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존하지는 않는다. 그의 '비문'을 제외하면 여러 문집류의 시문(詩文) 및 몇 가지 야사류에서 혼수와 관련된 내용을 단편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 거의 전부이다. 이런 상황은 혼수가 차지하고 있는 법계상의 위치를 논하는 데에 확정적으로 주장하기 어려운 문제점으로 노출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한국불교에서 정통과 방계의 사적(史的)인 입장으로 볼 경우 혼수가 계승하고 있는 위상에 따라 그 정통성이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이다.직접적인 기록들 가운데 태고보우의 '행장'에 의하면 태고보우의 법맥을 계승했으며, 환암혼수의 '비문' 및 나옹의 '행장'과 어록 그리고 '나옹석종비음기' 등에 의하면 나옹혜근의 법맥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혼수가 스승으로 참학한 경우는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12세 전후에 계송(繼松) 스님을 따라 내전과 외전을 널리 공부한 경우이고, 둘째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의 식영감(息影鑑, 息影菴, 息影淵鑑) 스님에게 참하여 능엄경의 25가지 방편수행을 수학한 경우이며, 셋째는 고운암(孤雲庵)의 나옹혜근(懶翁慧勤)을 찾아가 문답을 나누어 나옹혜근으로부터 입실을 허락은 경우이고, 넷째는 태고보우의 문도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4 가지 경우를 통해서 보면 첫째의 경우에 계송은 몽산덕이(蒙山德異:1233-?)에게 사사한 인물이다. 둘째의 경우에 식영감은 각엄복구(覺儼復丘)의 문도이면서 식영감이 주석했던 신원사는 몽산덕이의 제자인 철산소경(鐵山紹瓊)이 주석한 곳이기도 하므로 역시 몽산의 선풍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식영감이 직접적으로 철산소경의 법을 계승했는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이다.셋째의 경우에 오대산 신성암(神聖庵)에 주석할 때에 가까운 고운암(孤雲庵)에 주석하고 있던 나옹혜근(懶翁慧勤)과 문답을 나누어 나옹혜근으로부터 입실을 허락받았다. 이때 나옹은 그 징표로 금란가사와 상아로 만든 불자(拂子)와 주장자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후에 나옹이 주관한 공부선(功夫選)에 응시하여 혼수만이 답변을 하여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넷째의 경우는 태고보우의 행장으로부터 18세기에 간행된 『해동불조원류』에 이르도록 보편화된 설이다. 특히 편양언기의「종봉영당기(種峯影堂記)」와 이식(李植)의『청허당집(淸虛堂集)』의 서문과 이정구(李廷龜)의 서산청허의 '비문' 등 17세기에 출현한 법통설의 계보에서는 압도적이다. 이 가운데 넷째의 경우 다시 태고보우의 법계를 계승했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다시 나옹혜근의 문도라는 주장과 보조지눌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주장과 나옹과 태고의 법계를 모두 계승했다는 주장 등이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주장에는 그만한 논지를 바탕으로 하여 주장되었다는 점에서 각각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법계의 확정은 각각의 종파나 교단 내지 문중이 그에 따라서 오늘날 정통으로 혹은 방계로 취급받는 중요한 문제라는 점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이다.이러한 문제점 관련하여 장구한 선의 역사에서 선이 단순히 수행의 일종이거나 사상의 편린이라는 단편적인 측면을 넘어서 선종이라는 집단으로 출현한 이후에는 어떤 점이 가장 중시되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직 선이 선의 수행법이나 선법 내지 선사상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던 인도불교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깨침이 중시되었다. 그러나 선이 시대의 변천과 지역의 확대 등에 따라 하나의 집단화되면서부터 깨침을 바탕으로 하여 그 전법 내지 전승이 더욱더 중요시되었다. 그래서 누구로부터 깨침을 터득했는냐보다는 누구로부터 인가를 받았는냐가 중시되었다. 곧 깨침은 어디까지나 스승의 지도를 받기는 하지만 스스로가 터득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내증의 문제이지만 전법 내지 전승의 인가는 그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로부터 인가받았는가 하는 점은 곧 대의와 명분을 중시했던 사회속에서는 자체의 집단이 생존과 번영을 구가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가장 중요한 명제였다. 이로써 선종에서는 깨침은 전법의 필요조건으로서 중시되었다.나아가서 붓다의 본의가 지혜와 자비에 바탕한 중생제도라는 최상승과 대승을 표방하면서 불조혜명의 계승을 내세우는 선종에서는 전법으로만 그 본래적인 의의를 다할 수는 없었다. 이로써 전법의 중시는 당시의 사회속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발휘했느냐 하는 대중의 접화라는 조건을 아울러 중시하게 되었다. 깨침과 전법은 각각 대중을 접화하고 집단을 유지해 나아가기 위한 매우 유용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대중접화라는 교화의 직접적인 목적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에서 집단을 이끌어 나아가고 제자를 배출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보다 현실적이면서 명분도 내세울 수 있는 전법의 궁극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어떻게 깨쳤느냐 그리고 누구에게서 인가받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역할을 하였고 어떤 교화를 했는가에 따라서 당시의 대중들과 국가로부터의 호응을 받는 척도가 되었다. 고려 말기에 태고보우와 나옹혜근과 백운수단 등 소위 여말삼사(麗末三師) 등이 발휘한 역할은 실로 그 법계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실로 선종사의 경우만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깨침과 그 인가조차도 당시에 활약한 인물의 영향력에 따라서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면 혼수가 전승한 법계에 관한 다양한 주장들은 당시 불교계의 평판과 각각의 영향력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혼수가 사사한 인물은 모두가 임제종의 법맥을 전승 내지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에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에서 불교계의 모든 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집단이 여전히 선종의 임제종이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그것은 당시에 중국에 유학한 승려들에 있어서도 직접적이고 현실적이며 필요한 상황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17세기 이후에 특히 강조되고 확정된 태고보우-환암혼수의 법통설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제459호> 0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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