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유일한 스님출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태허스님(운암 김성숙)기념사업회를 지원하기 위한 불교계 후원회가 결성될 것으로 보인다.
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이수성)는 지난 6일 "태고종 총무원 부장스님을 통해 운산총무원장스님이 태허스님 후원회에 깊은 관심을 갖고 후원에 모집에 동참하여 지원할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지난 3일 기념사업회 민성진 사무국장은 합천 해인사로 대한불교조계종종정 법전스님을 예방하고 우리나라 유일한 스님출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신 태허스님(운암 김성숙선생)에 대해 알리고 오는 3월 말부터 시작하는 운암 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www.kimsungsuk.or.kr) 후원회 모집에 대한 불자및 종단의 관심을 부탁했다. 법전스님은 "총무원이 주체가 되어 불교계 전체가 같이 동참하는 태허스님후원회 결성을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념사업회 민성진 국장은"불교계에도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신 스님들이 많은데 극소수의 인사들만 알려지고 묻혀서 지내는 스님들이 많은 것 같아 기념사업회 사업의 일환으로 그 분들의 업적을 국가보훈처와 같이 알리며 재 조명하는 일을 하겠다"라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날 법전 스님을 예방하는 자리에는 운암 김성숙기념사업회 유연오 이사(유니온시스템 대표),민성진 사무국장,해인사 총무국장인 반야스님이 배석했다.

 

<태허스님은..>

독립운동과 통일정부 수립에 한평생
님웨일즈의 아리랑, ‘붉은 승려 김충창’으로 등장
봉선사에서 손병희, 김법린, 한용운, 과 친분

1898년 평북 철산에서 태어난 운암 김성숙 선생은 평생을 ‘성숙’이라는 법명으로 살았던 만큼 불교는 운암 사상의 한 획을 긋는다. 독립군이 되려고 만주로 향하던 청년 운암은 우연히 불교를 접하게 되고, 1916년 경기도 용문사에서 월초스님으로부터 성숙(星淑)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봉선사에서 3년간 머물면서 손병희와 만해스님을 만나 독립운동의 열정에 불을 지피게 된다. 3.1운동때 그는 봉선사 몇몇 스님들과 경기도 양주와 포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사람을 모아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승려의 신분으로 조선무산자 동맹과 조선 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23년에는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의 북경(北京)으로 건너가서 북경 민국대학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며,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했다. 1926년 북경정부로부터 추방되어 광동으로 갔으며, 거기서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중요한 사건인 광동코뮨에도 참가했다. 1938년에는 약산 김원봉 선생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지냈고,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위해 민족 전선연맹을 해체하고 임시정부와 통합하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취임했다.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을 주창하며 몽양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뽑혔으며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치는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5.16 이후에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혁신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운암은 결국 군사정권의 치밀한 ‘반공’ 이데올로기 정책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1982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2004년에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운암은 님 웨일즈·김산(장지락)의 '아리랑'에서 '붉은 승려 김충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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