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술과 거문고를 너무 좋아하여 ‘삼혹호(三酷好)’ 선생으로 불렸던 이규보(1168~1241)는 평생을 ‘시마(詩魔)’에 붙들려 살았다. 과거에 합격한 후 벼슬을 제수 받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 산사는 그에게 세상의 번다함과 현실의 시비분별을 떠난, 마음의 여유와 탈속한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공간으로 놓이게 된다.족암은 푸른 바위 아래 우뚝 기대어 섰고 足庵高寄碧巖根스님은 향로에 향을 사르고 밤이면 문 닫네 銀葉燒香夜閉門연꽃도 필요 없는데 공연히 물시계가 필요하랴 不用蓮花空作漏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눕는 것이 일과라네 飢飡困臥是朝
단풍이 절정에 달하며 가을 국화도 한창인 시기가 상강(霜降)이다. 서리가 내린다는 뜻으로 가을의 마지막 절기다. 이제 가을이 정점을 지나 늦가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숙연히 천지가 한번 깨끗해지네.바라보는 가운데 점점 산 모양이 파리해 보이고,구름 끝에 처음 놀란 기러기가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시냇가의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 들어 시드는데,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도리어 근심이 되는 것은 노포(老圃)가 가을이 다 가면,때로 서풍을 향해 깨진 술잔을 씻는 것이라네.조선 중
중학법의 마지막 세 개 조항은 대소변과 연관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이런 사소한 행위에 관한 것까지 계율로 정하셨나 싶기도 하지만 대소변을 보는 자세나 장소 등이 비구의 위의와 관련된 사항이고 인도의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재가자의 눈살을 찌푸리게하는 행위는 당연히 금해야 하기에 당연히 이런 계율을 제정하셨다고 생각한다.먼저 제73조의 조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나는 무병으로 서서 대변 혹은 소변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배워야 한다.”필자는 2014년경 남인도 뱅갈루루에서 수개월을 산 적이 있었는데 길을 가다 보면 가끔 치마형태의 인도
‘차는 무엇이고, 우리는 왜 차를 마시는가?’다르게 이야기하면 우리 아니 나는 차를 마시는데,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도 마시게 할 수 있을까? ‘혼자 잘 마시면 되는데 왜 다른 사람까지?’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술처럼 혼차도 매우 좋다. 하지만 맛있고 좋은 것은 나누고 나아가 함께 하고 싶은 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능은 아닐까? 여하튼 차의 좋은 점을 말하고 어떻게든 한 잔 마시게 하고 싶은데 그 방법이 모호하다.만나는 사람 보고 차 한잔하자고 하면 될 듯싶다. 하지만 만나지 못하는 사람도 마시게 하는 방법은 역시 ‘홍
‘길 없는 길’을 살아있는 눈[活眼]으로 살다 간 경허성우(1846~1912)는 풍전등화 같던 한국불교의 선맥을 되살린 선불교의 새벽별이며 중흥조이다. 9세에 모친을 따라 청계사 계허에게 출가하였으나 계허가 환속하자 동학사 만화 강백 밑에서 경학을 익혔다. 대강백이 된 경허는 스승 계허를 찾아 나섰다. 도중에 어느 마을에서 전염병이 창궐한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을 철폐한 후, 영운선사의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驢事未去 馬事到來]는 화두를 들고 칼을 갈아 턱 밑에 대놓고서 수마를 물리치
하얀 이슬 산들바람 가을을 보내주자발 밖의 물과 하늘 창망한 가을일레앞산에 잎새 지고 매미소리 멀어져막대 끌고 나와보니 곳마다 가을일레이덕무 (李德懋 1741~1793) ‘사계 시(四季詩)’ 중백로(白露)는 가을 기운이 완연하고 하얀 이슬이 맺히는 시기다. 밤이 되면 기온이 내려가면서 밤새 풀잎에 하얀 이슬이 맺힌다고 하여 15번째 절기로 백로라 한다. 백로에는 낮에는 기온이 오르나,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면서 낮과 밤의 기온 차가 10도 정도 날 정도로 일교차가 커지는 시기라서 건강에 조심해야 한다.백로에 내린 콩잎의 하얀 이슬을
중학법 제65조는 병이 없으면서도 발우를 들고 앉은 자에게 법을 설하면 안 된다는 내용인데 여기서 핵심은 발우보다는 앉은 모습에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발우를 들고 법을 들어서도 안 되지만 교각(翹脚)다리를 하고 있는 자에게 법을 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승기율』에서는 ‘교각이란 다리를 다리 위에 얹고, 무릎을 무릎 위에 얹고, 장딴지를 정강이 위에 얹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건방지거나 흐트러지게 앉아 있는 자세를 말한다.중학법 제66조와 제67조는 병이 없으면서도 머리 위나 전체를 천으로
허남경 장인은 한번 맥이 끊어진 차선의 제조 기법을 여하튼 다시 되살린 것으로 차선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용했던 기술이 언젠가부터 사라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사라진 기술을 일본은 우리나라에 이어 근래 중국에도 기술을 다시 전해준 것이라고 한다. 여하튼 차선은 번성했던 차문화 특히 말차문화의 상징적인 도구이니 일본의 독점기술이라고 할 수는 없는 부분이 있다.차도구 뿐만 아니라 차 역시 그 형태는 중국과 한국과 일본이 서로 유사했다고 할 수 있다. 한약방의 한약업사들이 말하는
‘서산의 4대 문파’ 중에서 가장 융성한 편양파를 이루었던 편양언기(1581∼1644)선사는 양치는 성자로 알려져 있다. 평양성 근처에서 10년간 수백 명의 걸인들을 모아 보살피면서 ‘이 뭐꼬 노장’으로 불리는 등 깨달음을 증득한 후에도 양치기와 거지 왕초로 숨어 지내며 철저한 보살행을 실천했다. 선사는 금강산 백화암에서 수행하던 어느 가을날 비가 내리는데 비에 젖어 물든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확철 대오하였다. 그 깨달음의 노래가 다음의 시이다.구름 흐르나 하늘은 움직이지 않고 雲走天無動배가 갈뿐 언덕은 옮겨가지 않네. 舟行
중학법의 공양에 관한 조문들은 굳이 계율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점잖은 식사예절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 내용들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양을 할 때 음식이 입안에 있을 때 이야기를 하면 안 되고 둥글게 만든 밥을 입안에 던져서 먹거나 베어 먹어서도 안 되고 음식을 입안에 많이 넣어서 뺨이 볼록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손을 흔들면서 먹어서 안 되고 밥알을 흘려서도 안 되고 혀를 내어서 먹거나 쩝쩝 소리를 내거나 후루룩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어도 안 된다. 그리고 수저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먹기 때문에 공양을 마치고
차시(茶匙)와 차선(茶筅)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 다도 가운데 자주 등장한다. 멋있게 차려입은 차인들이 말차의 차 가루를 차시 또는 차칙이라고 하는 대나무 등으로 만든 숟가락으로 떠서 다완에 옮긴다. 은이나 상아 등으로 만들기도 하고 대나무 외에도 화류나 대추나무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가루녹차를 떠서 옮기는 것이 차선인데 이게 오죽(烏竹)으로 만들면 알 수 없는 기품이 서린다.차 가루가 들어간 다완에 뜨거운 물을 붓고 차와 물이 잘 섞이도록 젓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차선이다. 한쪽의 대나무를 60본∼120본으로 쪼개어 만든 것이
묘향산 서쪽에 살았다 하여 묘향산인 또는 서산 대사로 불리는 청허 휴정(1520-1604)은 1534년 진사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친구들과 지리산을 유람하던 중에 숭인 장로를 만났다. 큰 꿈을 이루려면 마음이 비어 걸림 없게 됨으로써 만인을 품을 수 있는 경지인 ‘심공급제’ 해야 한다는 장로의 가르침을 받아 불교에 입문하였다. 부용 영관(1485-1571)에게 선을 배우고, 18세에 구족계를 받고 법명을 휴정이라 하였다. 휴정의 어릴 때 이름은 운학이다. 15세에 지리산에 들어온 뒤 출가의 결의를 다지는 ‘화개동 입산시’는 감동적
입추(立秋)는 대서(大暑)와 처서(處暑)의 사이에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문턱에 왔음을 알리는 절후이다. 이날부터 입동(立冬) 전까지를 가을이라고 한다. 입추는 7월의 절기로서 괘상(卦象)은 건, 태괘(乾,兌卦)이다. 한낮의 정오에서 이젠 기울어지는 시기다. 동서(東西)로 나뉘어 지는 시기로 한낮의 마무리를 해야 한다. 신월(申月)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다.입추는 곡식이 여무는 시기이므로 이날 날씨를 보고 점친다. 입추에 하늘이 청명하면 만곡(萬穀)이 풍년이라고 여기고, 이날 비가 조금만 내리면 길하고 많이 내리면 벼가 상한다고 여긴
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쓴다. 누구나는 아니지만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글이고 길게 쓰면 책이 된다. 글쓰기를 하다 보면 재미있고 그렇게 재미를 쫓다 보면 본래 뜻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책까지 써 놓으면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다. 높은 산 정상에 오른 것과 같은 감회를 느끼기도 하는 저자들도 많다. 어렵게 고생하며 겨우 쓴 책도 좋지만 쓰면서 즐길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다. 하지만 이게 어렵다.이 칼럼 ‘하도겸의 차이야기’는 물론 최근 출판했던 《영화, 차를 말하다》(자유문고, 2022.
중학법 제11조부터 제14조까지는 비구가 마을에 들어가거나 재가자의 집을 방문하고 앉을 때 큰소리를 내지 말고 낮은 소리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조문이다. 만약 속가의 남자라면 호탕한 기질로 크게 웃고 말하는 것이 흉이 되지 않으나 비구는 장소를 불문하고 항상 자신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하기에 주위의 분위기에 휩쓸려 여법함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중학법이 출가자의 위의와 관련된 계율이다 보니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최소한 중학법이라도 지키고 있는가? 차라리 계율을 모르면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겠지만, 아는 것이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