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이슬 산들바람 가을을 보내주자발 밖의 물과 하늘 창망한 가을일레앞산에 잎새 지고 매미소리 멀어져막대 끌고 나와보니 곳마다 가을일레이덕무 (李德懋 1741~1793) ‘사계 시(四季詩)’ 중백로(白露)는 가을 기운이 완연하고 하얀 이슬이 맺히는 시기다. 밤이 되면 기온이 내려가면서 밤새 풀잎에 하얀 이슬이 맺힌다고 하여 15번째 절기로 백로라 한다. 백로에는 낮에는 기온이 오르나,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면서 낮과 밤의 기온 차가 10도 정도 날 정도로 일교차가 커지는 시기라서 건강에 조심해야 한다.백로에 내린 콩잎의 하얀 이슬을
중학법 제65조는 병이 없으면서도 발우를 들고 앉은 자에게 법을 설하면 안 된다는 내용인데 여기서 핵심은 발우보다는 앉은 모습에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발우를 들고 법을 들어서도 안 되지만 교각(翹脚)다리를 하고 있는 자에게 법을 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승기율』에서는 ‘교각이란 다리를 다리 위에 얹고, 무릎을 무릎 위에 얹고, 장딴지를 정강이 위에 얹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건방지거나 흐트러지게 앉아 있는 자세를 말한다.중학법 제66조와 제67조는 병이 없으면서도 머리 위나 전체를 천으로
허남경 장인은 한번 맥이 끊어진 차선의 제조 기법을 여하튼 다시 되살린 것으로 차선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용했던 기술이 언젠가부터 사라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사라진 기술을 일본은 우리나라에 이어 근래 중국에도 기술을 다시 전해준 것이라고 한다. 여하튼 차선은 번성했던 차문화 특히 말차문화의 상징적인 도구이니 일본의 독점기술이라고 할 수는 없는 부분이 있다.차도구 뿐만 아니라 차 역시 그 형태는 중국과 한국과 일본이 서로 유사했다고 할 수 있다. 한약방의 한약업사들이 말하는
‘서산의 4대 문파’ 중에서 가장 융성한 편양파를 이루었던 편양언기(1581∼1644)선사는 양치는 성자로 알려져 있다. 평양성 근처에서 10년간 수백 명의 걸인들을 모아 보살피면서 ‘이 뭐꼬 노장’으로 불리는 등 깨달음을 증득한 후에도 양치기와 거지 왕초로 숨어 지내며 철저한 보살행을 실천했다. 선사는 금강산 백화암에서 수행하던 어느 가을날 비가 내리는데 비에 젖어 물든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확철 대오하였다. 그 깨달음의 노래가 다음의 시이다.구름 흐르나 하늘은 움직이지 않고 雲走天無動배가 갈뿐 언덕은 옮겨가지 않네. 舟行
중학법의 공양에 관한 조문들은 굳이 계율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점잖은 식사예절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 내용들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양을 할 때 음식이 입안에 있을 때 이야기를 하면 안 되고 둥글게 만든 밥을 입안에 던져서 먹거나 베어 먹어서도 안 되고 음식을 입안에 많이 넣어서 뺨이 볼록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손을 흔들면서 먹어서 안 되고 밥알을 흘려서도 안 되고 혀를 내어서 먹거나 쩝쩝 소리를 내거나 후루룩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어도 안 된다. 그리고 수저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먹기 때문에 공양을 마치고
차시(茶匙)와 차선(茶筅)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 다도 가운데 자주 등장한다. 멋있게 차려입은 차인들이 말차의 차 가루를 차시 또는 차칙이라고 하는 대나무 등으로 만든 숟가락으로 떠서 다완에 옮긴다. 은이나 상아 등으로 만들기도 하고 대나무 외에도 화류나 대추나무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가루녹차를 떠서 옮기는 것이 차선인데 이게 오죽(烏竹)으로 만들면 알 수 없는 기품이 서린다.차 가루가 들어간 다완에 뜨거운 물을 붓고 차와 물이 잘 섞이도록 젓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차선이다. 한쪽의 대나무를 60본∼120본으로 쪼개어 만든 것이
묘향산 서쪽에 살았다 하여 묘향산인 또는 서산 대사로 불리는 청허 휴정(1520-1604)은 1534년 진사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친구들과 지리산을 유람하던 중에 숭인 장로를 만났다. 큰 꿈을 이루려면 마음이 비어 걸림 없게 됨으로써 만인을 품을 수 있는 경지인 ‘심공급제’ 해야 한다는 장로의 가르침을 받아 불교에 입문하였다. 부용 영관(1485-1571)에게 선을 배우고, 18세에 구족계를 받고 법명을 휴정이라 하였다. 휴정의 어릴 때 이름은 운학이다. 15세에 지리산에 들어온 뒤 출가의 결의를 다지는 ‘화개동 입산시’는 감동적
입추(立秋)는 대서(大暑)와 처서(處暑)의 사이에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문턱에 왔음을 알리는 절후이다. 이날부터 입동(立冬) 전까지를 가을이라고 한다. 입추는 7월의 절기로서 괘상(卦象)은 건, 태괘(乾,兌卦)이다. 한낮의 정오에서 이젠 기울어지는 시기다. 동서(東西)로 나뉘어 지는 시기로 한낮의 마무리를 해야 한다. 신월(申月)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다.입추는 곡식이 여무는 시기이므로 이날 날씨를 보고 점친다. 입추에 하늘이 청명하면 만곡(萬穀)이 풍년이라고 여기고, 이날 비가 조금만 내리면 길하고 많이 내리면 벼가 상한다고 여긴
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쓴다. 누구나는 아니지만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글이고 길게 쓰면 책이 된다. 글쓰기를 하다 보면 재미있고 그렇게 재미를 쫓다 보면 본래 뜻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책까지 써 놓으면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다. 높은 산 정상에 오른 것과 같은 감회를 느끼기도 하는 저자들도 많다. 어렵게 고생하며 겨우 쓴 책도 좋지만 쓰면서 즐길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다. 하지만 이게 어렵다.이 칼럼 ‘하도겸의 차이야기’는 물론 최근 출판했던 《영화, 차를 말하다》(자유문고, 2022.
중학법 제11조부터 제14조까지는 비구가 마을에 들어가거나 재가자의 집을 방문하고 앉을 때 큰소리를 내지 말고 낮은 소리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조문이다. 만약 속가의 남자라면 호탕한 기질로 크게 웃고 말하는 것이 흉이 되지 않으나 비구는 장소를 불문하고 항상 자신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하기에 주위의 분위기에 휩쓸려 여법함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중학법이 출가자의 위의와 관련된 계율이다 보니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최소한 중학법이라도 지키고 있는가? 차라리 계율을 모르면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겠지만, 아는 것이 병
나옹혜근(1320∼1376)은 20세에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보고 삶의 무상을 느껴 공덕산(현 문경의 사불산) 묘적암 요연선사에게 출가하였다. 그 후 양주 회암사에서 4년간 치열한 용맹정진의 수행을 통해 크게 깨달았다.허공을 에워싸면서도 그림자도 형체도 없어 包塞虛空絶影形온갖 형상 머금었어도 본체는 항상 청정하구나 能含萬像體常淸눈 앞 진경을 누가 능히 헤아린다 할 것인가 目前眞景誰能量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가을 달은 밝아라. 雲卷靑天秋月明온갖 형상 머금었어도 본체[본성]은 항상 깨끗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청정한 마음에서 빚어진 삼
바라제제사니법 제4조는 아란야주처수식계(阿蘭若住處受食戒)이다. ‘아란야’는 한문으로 ‘적정처(寂靜處)’, ‘공한처(空閑處)’, ‘원리처(遠離處)’라고 번역되며 마을에서 적당히 떨어져 수행하기 좋은 곳을 말한다. 아란야가 적당한 거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비구들의 걸식 때문이다. 조문은 다음과 같다.“아란야 주처 안에는 위험이 따르고 공포를 동반한다고 인정되는 주처가 있다. 만약 비구가 이와 같은 [위험이 있는] 주처에 살면서 미리 알려지지 않은 담식이나 혹은 작식을 승원 내에서 무병(無病)이면서 자신의 손으로 받아 담식하거나 혹은
찜통더위, 불볕더위, 가마솥더위…. 대서(大暑)에는 수식어도 많다. 삼복더위의 무더운 날씨지만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시기이다. 예부터 대서(大暑)에는 더위 때문에 “염소뿔도 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단단한 염소뿔 마저 녹는다는 대서. 여름의 토용(土用)은 이 계절에 들어간다. 토용(土用)이란 토왕용사(土王用事)의 준말로 토왕지절(土旺之節)의 첫날을 말한다. 토왕지절은 오행설(五行說)에서 토기(土氣)가 왕성하다는 절기이다.사계절은 입춘立春·입하立夏·입추立秋·입동立冬에서 시작한다. 절기가 바뀌기 전 18일간이 토에 배당되면서
차를 마실 때 제다장인이나 차상으로부터 어떨 때는 차선생님으로부터 “어떠냐?”는 말에 “좋네요”를 넘어 요즘은 “커피도 마셔보고 다른 사람이 만든 차도 먹어보시라!”고 자주 말한다. 어쩌면 그렇게 모두들 자기가 만든 차가 최고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남의 차는 미덥지 않아 못마시고 오직 자기차만 마신다는 사람들마저 있다. 우리 차산업문화 전체를 얕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겸손하지 않은 부적절한 말이라고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전한다.그런 말을 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정말 좋은 차를 만드는 분들이지만 그렇
"아들 넷이면 한 아들은 출가시켜야 한다"는 국법에 따라 11세 어린나이에 자청하여 개성 영통사 난원스님에게로 출가한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선교 대립과 갈등을 원융회통하고, 《법화경》의 ‘회삼귀일’ 사상에 근거한 교관겸수 사상 제창과 천태종을 열었다.원효스님의 위대함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의천은 원효를 ‘해동교주, 원효보살’로 극찬함은 물론, 형 숙종이 원효에게 ‘화쟁국사’란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 의천이 지난한 구도의 길에서 한 줄기 광명이 되는 지남(指南)을 발견한 것은 바로 원효의 《금강경소》를 만난 덕분이었다.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