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심경’으로 알려진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저술한 백운경한(1298~1375)은 1351년 53세 때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화상에게 법을 묻고, 최후에 하무산 천호암에 주석하는 임제종의 거장 석옥청공(1272∼1352)을 찾아가 무념무심의 진종을 배우고 여래의 더없는 묘도(妙道)를 깨달았다. 경한의 무심무아의 깨달음의 경지는 ‘흰 구름’이라는 상징을 통해 잘 표현되고 있다.흐르는 물은 산에서 흘러도 산을 그리워하지 않고 流水出山無戀志흰 구름은 골짜기를 감돌아도 또한 무심하네 白雲歸洞亦無心이 한 몸 가고 옴도
다솔사 최범술(崔凡述) 스님을 존경하는 차인들이 참 많다. 그러나 효당 선생을 처음 본 사람들 가운데는 남루한 양복과 땅딸보 대머리 행색으로 무섭게 보는 이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효당 최범술의 이름을 모르는 차인도 있다. 하지만, 효당은 진주 아니 우리나라 차계를 대표하는 큰 인물로 차계(茶界)의 종장(宗匠)이나 중시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다. 차계에서 전라도 무등산에 의제 허백련이 있다면 경상도 봉명산 다솔사에 효당 최범술이 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초의 스님의 《동다송》 이래로 근세 한국 최고의 차 이론서인 효당 스
부처님께서는 왜 비구와 비구니가 법랍 순으로 앉는 것을 거부하셨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먼저 승가의 기능 유지 차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승가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법랍에 따라 좌차(座次)를 정하는 일이다. 법랍은 우안거(3개월)를 마쳤을 때 1세가 된다. 승가에서는 출가 이전의 세속 나이는 무시하고 장유(長幼)를 법랍으로 정하여 자리를 배정하고 승가의 분배물을 차례대로 나누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비구니 승가가 생겨남으로 인해 비구와 비구니가 동일한 장소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상황이 생기게
중3 때 효당 찾아 다솔사 방문반야심경 접하고 마음 병 치유효당 수제자로 12년 동안 공부15기까지 1천여 명 제자 배출차의 나라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중국과 일본을 떠올린다. 물론 인도나 스리랑카도 있고 대만도 있다. 하지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우리나라는 아닌 것은 비슷할 듯하다. 사대주의나 친일과는 별개로, 차의 종주국은 중국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차인이라면 영화 속에 나오는 기모노를 입고 말차를 만드는 일본 차인들의 모습이 뇌리에 박힌 듯이 늘 떠오른다. 아울러, 중국의 차문화가 아편전쟁과 공산화 그리
첫눈 내린다는 스무 번째 절기소설에 부는 바람은 ‘손돌바람’북(北)방은 수(水), 검은색, 짠맛‘수’는 자유자재 반야지혜 상징24절기 중 스무 번째 절기는 이날 첫눈이 내린다고 하는 소설(小雪)이다. 옛 어르신들 말씀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되기 때문에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고 했다. 또 얇은 옷에서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하니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고도 했다. 소설이 지나면 날씨가 급강하하면서 얼음이 얼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겨울에 든 것은 아니고 아직 따뜻한 햇살이 비치므로 소춘(小春)이라고 부
7멸쟁법의 일곱 번째는 여초복지(如草覆地)로 마치 풀처럼 바닥에 엎드리듯이 서로 참회를 한다는 뜻이다. 승가 구성원 전원이 논쟁에 의하여 두 파벌이 생기고 서로 악구(惡口)를 범하게 되면 승가가 제대로 운영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때 양쪽이 서로 참회를 하여 상대방의 죄를 면하게 해주는 것이 여초복지이다.이상으로 비구계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다. 비구니계를 다루기에 앞서 잠깐 한숨 돌리는 의미에서 잡설을 조금 하려고 한다.승려라면 누구나 이러한 의문을 가져 보았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만들어 진 계율을 현시대에 지켜야 할까?” 혹
부휴선수(1543~1615)는 ‘만일 자식을 얻으면 출가시키겠다’고 서원하고 기도를 올렸던 모친이 신승으로부터 구슬을 받는 태몽을 꾸고 태어났다고 한다. 17세 때 지리산 영원사 신명 장로에게 출가하여 부용영관의 심법을 이어 받았다. 문자를 떠난 격외선을 배워 참구하였던 선사는 도는 다른데 있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 있으니 항상 조주선 참구를 강조하였다.도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오직 내게 있으니 道不在他唯在我모름지기 멀리서 구하거나 하늘에서 구하지 말라 不須求遠不求天마음 거두고 고요히 산창에 앉아서 收心靜坐山窓下밤낮으로 항상 조주선을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는 입동(立冬)이다. 가을이 끝나가고, 긴 겨울을 날 채비를 해야 하는 시기다. 입동 전후 5일 내외에 김장을 하면 맛있다고 하지만 요즘이야 김치냉장고가 좋아진 환경 덕분에 개의치 않고 김장을 한다. 입동에 즈음하여 예전에는 음력 10월 10일에서 30일 사이에 햇곡식으로 시루떡을 하여 곳간과 마루 외양간에서 고사를 지냈다. 이때 농사철에 애를 쓴 소에게도 고사 음식을 가져다주며 이웃들 간에 나누어 먹었다.입동에는 치계미(雉鷄米)라고 하는 미풍양속도 있었다. 치계미란 입동, 동지, 제석(除夕)날에 일정 연령
세간이든 출세간이든 사람이 사는 곳엔 분쟁이 끊이지 않는 법이고 이 쟁사(諍事)를 없애기 위하여 세간에는 법을 비롯한 제반 규범이 있고 출세간에는 계율이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부터인지 승려 사회에서도 계율이나 종헌 종법보다는 사회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양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종단의 종헌 종법이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회법으로 먼저 해결하려는 행위인데 이런 사람은 종헌 종법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종단의 위상을 짓밟는 사람이라 종도라 할 수도 없고 승려의 자질이 의심되는 사람이
‘이효리’ 덕택에 더 유명해진 제주도 애월쪽으로 찾아가면 해심재라는 곳이 있다. 찻집이기도 하고 행복한 쉼터라고 하기도 하는 문화공간이다. 제주도의 차인들과 몇 번 찾아갔는데 시간을 못 맞춰 결국 밖에서만 살펴보곤 말았다. 결국 들어가서 차 한잔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 곳이다.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초등학교를 일찍 명예퇴직한 이완국 선생님은 웃음치료 및 스카프 제작으로 유명한 행복한 쉼터의 대표이다. 애월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차한잔의 여유와 그리고 행복을 전해왔다. 주변의 육지것들(외지인들을 부르는 제주도 속어) 조차도 매우 존경하
서산대사의 제자로 자비덕화가 출중했던 청매인오(1548~1623)는 임진왜란 때 의승장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선사는 변산 월명암, 지리산 연곡사, 실상사, 영원사 등에서 수행 정진했으며, 도솔암을 세우고 ‘청매문파’를 열어 선풍을 크게 떨쳤다. 청매선사는 보조국사 지눌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참선수행 정진에 힘쓰던 시절의 감회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땔나무 해오고 물 길어 오는 일 외엔 하는 일 없네 般柴運水野情慵참 나를 찾아 현묘한 도리 참구에 힘쓸 뿐 參究玄關性自空날마다 변함없이 소나무 아래
시와 술과 거문고를 너무 좋아하여 ‘삼혹호(三酷好)’ 선생으로 불렸던 이규보(1168~1241)는 평생을 ‘시마(詩魔)’에 붙들려 살았다. 과거에 합격한 후 벼슬을 제수 받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 산사는 그에게 세상의 번다함과 현실의 시비분별을 떠난, 마음의 여유와 탈속한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공간으로 놓이게 된다.족암은 푸른 바위 아래 우뚝 기대어 섰고 足庵高寄碧巖根스님은 향로에 향을 사르고 밤이면 문 닫네 銀葉燒香夜閉門연꽃도 필요 없는데 공연히 물시계가 필요하랴 不用蓮花空作漏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눕는 것이 일과라네 飢飡困臥是朝
단풍이 절정에 달하며 가을 국화도 한창인 시기가 상강(霜降)이다. 서리가 내린다는 뜻으로 가을의 마지막 절기다. 이제 가을이 정점을 지나 늦가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숙연히 천지가 한번 깨끗해지네.바라보는 가운데 점점 산 모양이 파리해 보이고,구름 끝에 처음 놀란 기러기가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시냇가의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 들어 시드는데,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도리어 근심이 되는 것은 노포(老圃)가 가을이 다 가면,때로 서풍을 향해 깨진 술잔을 씻는 것이라네.조선 중
중학법의 마지막 세 개 조항은 대소변과 연관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이런 사소한 행위에 관한 것까지 계율로 정하셨나 싶기도 하지만 대소변을 보는 자세나 장소 등이 비구의 위의와 관련된 사항이고 인도의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재가자의 눈살을 찌푸리게하는 행위는 당연히 금해야 하기에 당연히 이런 계율을 제정하셨다고 생각한다.먼저 제73조의 조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나는 무병으로 서서 대변 혹은 소변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배워야 한다.”필자는 2014년경 남인도 뱅갈루루에서 수개월을 산 적이 있었는데 길을 가다 보면 가끔 치마형태의 인도
‘차는 무엇이고, 우리는 왜 차를 마시는가?’다르게 이야기하면 우리 아니 나는 차를 마시는데,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도 마시게 할 수 있을까? ‘혼자 잘 마시면 되는데 왜 다른 사람까지?’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술처럼 혼차도 매우 좋다. 하지만 맛있고 좋은 것은 나누고 나아가 함께 하고 싶은 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능은 아닐까? 여하튼 차의 좋은 점을 말하고 어떻게든 한 잔 마시게 하고 싶은데 그 방법이 모호하다.만나는 사람 보고 차 한잔하자고 하면 될 듯싶다. 하지만 만나지 못하는 사람도 마시게 하는 방법은 역시 ‘홍
‘길 없는 길’을 살아있는 눈[活眼]으로 살다 간 경허성우(1846~1912)는 풍전등화 같던 한국불교의 선맥을 되살린 선불교의 새벽별이며 중흥조이다. 9세에 모친을 따라 청계사 계허에게 출가하였으나 계허가 환속하자 동학사 만화 강백 밑에서 경학을 익혔다. 대강백이 된 경허는 스승 계허를 찾아 나섰다. 도중에 어느 마을에서 전염병이 창궐한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을 철폐한 후, 영운선사의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驢事未去 馬事到來]는 화두를 들고 칼을 갈아 턱 밑에 대놓고서 수마를 물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