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되면서 식량과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이 여러 나라의 시급한 일이 됐다. 많은 나라에서 식량의 불안정한 수급은 사회 불안정과 정치적 격변, 심지어 내란 또는 내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흔들리지 않는 법칙처럼 작용했다.오래지 않은 사례로 ‘아랍의 봄’을 불러온 자스민 혁명을 들 수 있다. 2011년 러시아는 기상악화로 밀 생산량이 감소하자 수출을 금지했다. 밀값이 70% 넘게 치솟았다. 주식인 밀을 수입에 의존하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밀을 확보하지
정부가 학자의 일에 관여하려면 비판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종교는 신성에 의하여, 법률은 권위에 의하여 그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비판철학의 창시자’인 칸트의 철학적 진단이었던 것이다. 그의 {순수이성비판]은 형이상학을 비판한 것이었고, 그의 {실천이상비판}은 실천철학(윤리학)에 맞닿아 있고, 그의 {판단력비판}은 미학 이론에 맞닿아 있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오늘날의 유엔헌장의 기초가 되었고, 그는 이 ‘삼대 비판철학서’를 통해서 전인류의 스승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
불교예술의 꽃으로 불리는 ‘영산재’는 인도의 영취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화경》설법을 듣는 장면인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상징화한 의식이다. 이러한 의미를 지닌 ‘영산재’는 설법도량에 모인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환희심을 불러일으키고 법열(法悅)에 충만 된 분위기를 극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산 자와 망자가 다 함께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진리를 깨달아 이고득락(離苦得樂)하여 정토에 이르게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할 수 있다.‘영산재’는 1973년 11월 '범패’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가 1987년
지난 3년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줄곧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안 그래도 익명의 시대에 얼굴조차 가리고 다닌 것이다. 자연의 신선한 공기를 제대로 마실 수가 없어 날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만나는 지인의 얼굴들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어 정마저 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TV를 보면 코로나 감염자 숫자만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걸 보면서 내가 참 이상한 나라에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사회는 어떤가? 날마다 보수와 진보라는 명분 아래 국민은 내편 네편이 되어 아예 양극단으로 갈라졌고 한쪽에선 분열을 조장하는 익명의 목소리들이 SNS
우리나라 불교 성보 중 가장 으뜸가는 작품을 꼽으라면 필자는 서슴없이 반가사유상을 꼽을 것이다. 그 한 작품만으로도 우리 민족은 한국인으로서 충분한 자부심과 자존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헌데, 그 원형이 간다라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다른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불상(佛像)을 우상으로 매도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들은 왜 불상을 우상으로 생각하게 됐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그리스⦁로마 미술 신상조각에 대해선 매우 고상하고 세련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짙다. 반대로 불상에 대해선 미적 차원보다 기복신앙의
지난 3월 9일 정권교체냐, 정권 재창출이냐를 놓고 격돌했던 이번 대선은 결국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민심은 극명하게 둘로 갈라졌다. 윤석열 당선인은 제20대 대선에서 1639만 4815표로 48.5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2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1614만 7738표를 얻어 47.83%의 득표율로 두 후보간의 표차는 겨우 24만 7077표, 득표율은 0.73% 포인트에 불과했다. 영호남의 표심은 정반대로 갈렸고 서울도 강남과 강북의 표심이 둘로 나눠졌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이 정확히 둘로 쪼개
세계적으로 고독의 시간이 확산되고 있다. 개인의 스마트폰 사용 몰입 시간이 늘어나고, 1인가구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선택적 이유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강제적 고독의 시간도 포함된다. 요즘이라면 코로나 확진에 의한 격리시간일 것이다. 연일 신규 코로나 확진자 수가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이제는 확진자가 아닌 건 친구가 없어서라는 우스갯말이 나올 정도다. 자의든 타의든 혼자만의 시간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보통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그 외로움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따라 성장하거나 반대로 도태되는 두 가지 갈림길에 마주
지난 3월 19일, 뮤지컬 ‘싯다르타’ 공연을 보기 위해 서울을 다녀왔다. 이번 행사는 한국불교태고종 전국비구니회가 전관 대관을 하게 되면서 인연이 되었다.뮤지컬 ‘싯다르타’ 공연은 불교적 소재이지만 종교를 떠나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화두를 갖고 지금 이순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하였다.뮤지컬 ‘싯다르타’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 출가, 깨달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중 싯다르타가 19세 신부를 맞이하던 날, 29세 출가를 결심하던 날, 그리고 기원전 589년 12월 8일,
셈은 정확해야 한다. 셈이 흐리멍텅해서는 살림을 어렵게 만든다. 특히 남의 돈을 만지는 사람이 욕심을 내어서는 범죄자가 될 수도 있으니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해야 한다.요즘의 셈법은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를 우선으로 친다. 그런데 스님들의 셈법은 세상의 그것과 다른 면이 있다. 특히 경허 스님의 제자인 혜월 스님의 셈법은 특이했다. 혜월 스님은 1861년에 태어나 1937년에 입적하셨으니, 구한말과 일제 치하를 살았다. 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수탈로 굶주림의 시기를 살았던 것이다.혜월 스님을 달리 부르는 별칭이 있는데, ‘개척
작년 6월 한 달여 동안 두통에 시달렸다. 강도가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에도 몇 시간씩, 여러 차례 지속되는 두통이었다.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먼저 녹내장이 떠올랐다. 작년 5월에 안과 검진을 했었다. 정상 안압이었다. 안약도 취침 전에 잘 점안하고 있었다. 다음은 고혈압이었다. 경증이지만, 혈압약을 매일 먹고 있고, 측정치도 정상 범주에 있다. 수면시간이 6시간이 못 되는 것이 좀 걸렸지만, 오랫동안 적응된 생활습관이라서 괜찮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기억력이 좀 감퇴되고, 계산력도 좀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숙고
코로나19가 2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잦아들 기세는 없고 오히려 새로운 변종이 나타나며 세계를 괴롭히고 있다. 전염 속도가 빨라 대중들이 모이는 일을 통제하다보니 여러 곳에서 어려움이 나타난다. 영업을 하는 사업자도 그 시설을 이용하는 국민들 모두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환자를 치료하고 확산을 막아야 하는 정부와 의료관계자의 분투도 눈물겹다. 불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계의 신앙이 제한되고 있다. 과학적인 방역체계가 서있는 지금도 재난에 의한 국민의 삶이 이렇게 힘든데 자연적인 치료가 전부였던 예전에는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새해의 시작이 엊그제였는데,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시간의 빠름을 쏜 살에 비유한 옛말이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새해를 맞으며 법문이나 글에서 자주 인용하는 시가 있다. 학명스님의 ‘몽중유(夢中遊)’인데, 일상의 태도를 다잡게 해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등짝에 떨어지는 주장자와 같다. 정신이 번쩍 든다. 이즈음에 찬찬히 새기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나.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어디 달라졌는가. 우리가 덧없이 꿈속에 살아 가네. 莫道始終分兩頭
신축년이 가고 임인년이 밝았다. 삶이란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다 가는 놀이와 같아서 젊은 사람에게는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희망에 부풀기도 하지만, 나이 든 사람에게는 반대로 가는 해가 야속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분명 성장의 시절을 보내는 사람과 쇠약의 시절을 보내는 사람이 공존할 터이지만, 새해의 희망과 성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관습이 된지는 오래된 것 같다.낮과 밤의 하루가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의 한 해가 있으며, 생 노 병 사의 한 생이 있 다. 만물은 각자 주어진 시간의 속에서 존재 하다가 또 다른 존재에게 새로운
며칠째 날씨가 우중충하다. 몸이 오싹해지며 움츠러든다. 약간의 의욕 상실 상태에 빠진다. 긴 겨울의 한 가운데에 있다. 버텨내는 수밖에 없다.우리나라는 1년 중 맑은 날이 더 많지만, 겨울 날씨는 우중충할 때가 꽤 있다. 2020년 한 해 동안 수원 지역의 경우를 보면, 맑은 날은 198일 (54.1%)로 1년 중 절반을 넘었다. 흐린 날은 70일 (19.1%)이었다. 맑은 날이 흐린 날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맑은 날과 흐린 날은 구름의 양(雲量, cloud cover)에 따라 구분한다. 구름이 한 점도 없을 때를 0,
12월이면 정제 안 된 우물물 같은 내 소중한 것들이 생각난다. 그런 내게 시간은 때로 젖은 숲을 만들어준다. 차마 버릴 수 없는 내 삶의 촉촉한 추억 몇 가지. 그것들이 없다면 오히려 내 삶은 지금 퍽 건조하고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욕심이 너무 많은 탓이리라. 늘 마음을 비우 고 살려고 노력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내 추억의 애장품만 봐도 알 수 있다. 철없는 감성의 소녀였을 때,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도화지를 사고 싶어 출근하시는 아버지를 붙들고 문방구점으로 갔던 일, 동생들 돌보시느라 큰딸인 내겐 신경조차 쓰실 겨를이 없
웃 논 임자가 베어놓았나 보다. 논두렁이 깨끗했다. 저물녘, 논에 물 대러 갔던 나는 논두렁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커다란 개구리 한 마리가 논두렁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그걸 자랑하느라 나는 여기저기 전화도 했다. 농군(農軍)들에겐 논밭도 이웃이라는 말이 있다. 올해 처음 벼농사를 지으며 나 역시 이웃 논과도 잘 지내리라 다짐했다. 장마를 앞두고 6월에 한 번, 장마가 지난 7월에 한 번, 나는 이웃 논두렁을 깨끗이 깎아준 적 있다. 논두렁에 제초제는 절대로 뿌리지 말기를 빌면서.그날 내 논두렁을 깨끗이 깎아준 이가 누군지 나는
많은 화가 중에서도 나는 고흐를 가장 좋아한다. 그 때문에 2년여 전 남프랑스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그때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소가 부슈뒤론즌의 아를(Arles)이라는 작은 도시다. 15개월 동안 살면서 고흐가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던 곳이다. 특히 ‘빛’을 공부하고, ‘빛’을 찾아 돌아다녔던 고흐는 아를에 와서 눈부신 ‘(햇)빛’이 흐르는 론강을 보며, 그의 캔버스에 아를을 담았다. 그때 고흐는 ‘노란 집’에 정착한 뒤, 그림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화가들을 초대했다. 그러나 정작 그림공동체를 찾아오겠다고 한 화가는
‘음의 태양’은 일반인들이 쉽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음의 태양은 우리 우주계에 분명히 존재한다. 음의 태양은 은하 중심마다 있는 초중량 블랙홀을 말한다. 음의 태양 없이는 양의 태양은 존재할 수 없는데, 왜 그런 것인가. 왜 초중량 블랙홀이 음의 태양인가. 왜 음의 태양의 사유는 인류를 위해 꼭 필요한가. 왜 인류는 음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가. 지구 위기와 음의 태양의 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몇 가지만 살펴보면 음의 태양은 우리 은하의 중심에 있는 검은 빛과 푸른 빛을 동시에 띠는 초중량 블랙홀 ‘은하태양’을
2021년 10월 26일 저녁 7시에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개최된 불교계의 유일한 오케스트라단(團)인 ‘니르바나 오케스트라’의 29회 정기 연주회를 다녀왔다. ‘부처를 노래하다’라는 주제로 강형진단장이 지도하고 있는 동국대학교 힐링 코러스와 함께하는 공연이다. 20여 년 이상 오케스트라단을 이끌어 온 강 단장은 이번 공연 준비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4년 만에 개최되는 공연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강 단장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모습이 상상되어 공연을 모두 마친 후 강 단장이 무대에 올라와서 관객과 연주자, 합창단을 향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성적접근은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특히 강제하거나 위력에 의한 것이라면 더욱 분노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어느 자존을 굴복시켜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는 극한 제재와 비난이 따라야 한다. 어느 일탈이 노출되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사실과 진실의 공방이 이어질 경우 수치심과 그동안을 견뎌 온 측은함이 감성을 자극해서 국민적 분노를 사게 하는 사례도 많다. 물론 사안에 따라 대입방식과 의견이 달라 논쟁의 꺼리가 되기도 하고 자기기준의 경험법칙을 내세우며 옹호내지는 편들기까지 하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유린당한 피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