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담 (한국불교신문 사장)

일 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종단사태를 되돌아본다. 7월 7일 법원의 판결에 의해 세속의 판단과 상식위에서 옳고 그름이 명백해 졌지만 그 일은 모든 종도들의 치유하기 힘든 상처로 남았다.

모든 일은 원인이 있기에 일어남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원인을 명확하게 알아야 해결이 됨도 알고 있다.

따라서 잘 잘못을 따져 분란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라 해결책을 찾기 위한 원인 파악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의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입장에 따라서 세우는 명분으로 사태의 근본원인을 달리 주장하지만 그것은 본질을 호도하기 위한 것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나는 그 근본원인을 종도들의 무관심과 자포자기라고 본다.
종찰(宗刹)이 타종교에 팔려지고, 터무니없는 종무행정으로 부채가 발생되었음을 알려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을 수없이 경험했다. 십시일반으로 재원을 마련하고 밤을 새워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한 결과물이 어느 구석에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읽히지 않았을 때, 종단이 신용불량단체로 금융권에 등록되었을 때, 종도를 대변하는 종회의원들이 대거 제명되었을 때, 우리는 세상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시비분별을 하지 말라는 선 조사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종단을 의지함이 아니라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고 있었다.

또 한편 걱정과 분노함이 있었다 해도 일반 종도들로서는 양쪽을 비난하거나 자포자기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한 일들이 결국은 종단을 이용해 사욕을 채우는 일들을 방치했고, 이후 미흡한 제도의 허점과 개인 간의 감정을 부추겨 다툼의 와중에 논점을 흐리게 하여 비리를 감추는 어부지리를 누리게 하였다면 지나친 말일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원인은 단 두 가지, 재물과 명예라고 한다. 어느 싸움도 이 두 가지 원인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종단사태 역시 그럴 것이다.
다툼의 양쪽을 보면 결코 재물에 대한 이익을 추구하는 분들이 아니다. 종단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은 분도 있고, 종단을 위해 수 십 년을 거르지 않고 달마다 회비를 모으거나 때로는 거금을 쾌척하는가 하면, 오가는 교통비마저 사비로 충당하여 종도의 의무금을 무겁게 생각하는 분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결국 원인은 명예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명예를 집단과 개인의 명예로 나눌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집단의 명예는 기득권과 새로운 집단의 기 싸움으로 나타난다. 이제까지 무시하던 아웃사이더가 중심에 서게 되었을 때 기존 주도세력의 허탈감과 엷어지는 존재감은 새로운 주도세력을 무능력하고 부도덕함을 들추면서 경험 없는 아마추어가 현실을 모르고 이상을 추구하는 무모함으로 몰아붙이는 경우를 우리는 정치권의 싸움에서 보아왔다.

마찬가지로 종권 교체로 인한 기득권의 상실과 막대한 종단부채의 책임자를 규명하는 청문회에서 명예를 실추 당했다고 생각하여 분노하는 소리를 현장에서 들었고, 결국은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원인이 그렇다면 해결의 방안을 생각해보자.
사실의 여부나 개인의 생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지적이라고 해도 상대방의 주장을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되돌아봄은 지도자의 근본바탕이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전체를 아우르고 목표를 향해 가지 못한다. 따라서 독선과 아집을 지적한다면 상대방의 변명과 트집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안을 제시받고 받아들이거나 설득해야 지도자답다.

그 지적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지도자의 명예에 흠집이 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자질이 검증되고 따르고자 하는 신뢰가 구축되는 것이다. 우리가 모시고 있는 부처님의 귀가 어찌 그렇게 크고 관세음의 명호가 크게 불려지는 지를 이미 알고 있지 않는가.

다른 한편도 지나간 시절에 일어났던 일을 솔직한 심정으로 되돌아보아야 한다. 종찰이 무단으로 팔리고 막대한 종단부채가 발생될 때 자신이 한 역할에 대해 종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설사 자신이 몰랐고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당시 집행부의 일원으로 공동책임 내지는 도의적 책임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종도들이 그 말에 동의하겠는가. 총무원의 폭력을 지적하기에 앞서 물리력으로 총무원장을 내동댕이치고 종무직원을 발로 짓밟거나, 백주대낮에 우리 종단의 상징인 총무원사에서 비구니가 손자뻘 경찰관 앞에서 허리춤을 내리고 방뇨한 일을 진심으로 참회하여야 한다.

이러한 참회와 포용만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옛 성현이 말씀하시기를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은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배는 부하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 하였다. 어디에 속하든지 아니든지 더 이상 부화뇌동하여 억지에 가담함을 멈추고 종법의 틀과 상식위에 인정과 포용으로 마무리 할 때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경우가 되지 않겠는가.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하였다. 시작과 중간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마무리가 잘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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