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인용되는 『능엄경』의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물이라도 천상의 눈으로 보면 유리로 장식된 보배로 보이고, 인간의 눈으로 보면 마시는 물로 보이며, 물고기가 보면 사는 집으로 보이고, 아귀가 보면 피고름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약간 맥락이 다르지만, 무학대사와 이성계 간에 주고 받은,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이저안관지즉저야(以猪眼觀之卽猪也) 이불안관지즉불야(以佛眼觀之卽佛也)]”라는 언중유골의 농담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세계(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불완전한 감각기관으로 측정하여 주로 뇌에 비친 조작된 표상의 세계를 세계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보는 대로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如如한 절대적 세계, 物 자체)가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인식한 세계일 뿐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내적·외적 대상이라는 것은 주로 제6식(기관으로서는 뇌)에 비친 표상 혹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에 우리의 감각기관이 눈·귀·코·혀·몸·의식이 아닌 다른 어떤 기능을 가진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도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실재하는 여실한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방식의 감각기관을 가진 존재들과 공유할 수 있는 우주도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착시(錯視)와 우리에게만 존재하는 어떤 상(相) 속에서 살고 있다. ‘저기에 감나무가 서

있다’라는 것은 나에게 감나무가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지, 저기에 (절대불변의) 감나무가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감나무가 서 있지만 (감나무가 서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관이 빠져 있는) 다른 어떤 존재에게는 감나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존재하지만 인식을 못 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는 불특정의 대상인 것이다. 인간과 토끼와 늑대와 개미의 우주는 다르다.

불교의 모토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중중무진 무한 법계 우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화평과 공존의 논리를 찾을 수 없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다른 것’이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다를 뿐’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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