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조의 임종게

죽음의 본능(death instinct)을 제거하고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이 열반의 일반적 해석이다. 따라서 선사들, '깨친 이'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원한 삶'의 출발이다. 다시 말해 선사들의 죽음은 사바세계의 육신을 벗고 불멸법신(不滅法身)을 구가하는 축제다.

그렇지만 세속의 눈으로 보자면 선사들의 죽음은 범상하지 않다. 분명 축제긴 한데 선사들에겐 이마저도 거추장스럽다. 평소 밥 먹고 차 마시며 오줌 누듯 죽음을 그렇게 맞아들인다. 선리(禪理)를 체득한 선사일수록 죽음을 맞는 자세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대부분의 열반시(涅槃詩) 또는 임종게(臨終偈)는 저마다 체득한 선리를 일깨우고 있다.

비록 고요함으로 가는[入寂圓寂〕절차이긴 하나 그들이 남기고 간 열반시엔 다른 선시와 마찬가지로 할(喝)과 방(棒)을 무색케 하는 무서우리만치 섬찟한 선지가 담겨있다. 거기엔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나 만시(輓詩)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생사를 초월한 시적 아름다움을 어찌 그리 아름답게 빚어낼 수 있을까 하는 감동의 여운만이 짙게 드리우고 있을 뿐이다.

우선 초기의 임종게를 한 수 음미해보기로 한다.

육체는 내 것이 아니요
오온 또한 내 소유가 아니네
흰 칼날 목에 와 번뜩이나니
그러나 봄바람 베는 것 그와 같아라.

四大非我有 五蘊本來空
以首臨白刀 猶如斬春風

이 임종게의 주인공은 승조(僧肇 383∼414)다. 구마라즙 문하의 수제자로 역경사업에 종사하며 많은 공로를 남겼다. 지겸이 번역한 《유마경》을 읽고 불교에 귀의했는데 관리가 되라는 왕의 명령을 몇 차례 거역하자 처형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 임종게는 처형당하기 앞서 읊은 것으로 죽음을 초월한 한 구도자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이때 그의 나이 31세. 젊은 혈기가 아직도 왕성할 즈음 죽음을 맞는 그의 자세는 '봄바람'처럼 평온하다. 솔직히 가톨릭의 젊은 신부 김대건이 순교할 때와 비교되는 장면이다. 김대건이 망나니의 칼질에 두려워 하지 않고 목을 더 길게 뺏다고 전해지듯 승조 역시 '흰 칼날이 목에 와 번뜩이는 순간'에도 평안을 유지하며 태연자약할 수 있었던 것은 4대의 육신은 내 것이 아니라는 불교의 진리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로 볼 때 칼날은 가아(假我)를 벨 수 있지만 '참나'를 단도할 수는 없다. 승조는 '목을 베기 위한 칼날'을 '봄바람 베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죽음 직전의 극적 상황을 오히려 '미적 구도'로 전환시키고 있는데 목을 길게 빼고 있는 김대건의 작의적 상황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가의 죽음은 삶과 다르지 않은[生死不二]데 있기 때문이다.

-불교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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