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머물려는 그 마음을 항복시켜라

지금까지의 연재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아난 혼자가 아니라 결집을 함께 하는 제자들은 100% 똑같을 수는 없지만 부처님 말씀의 큰 뜻을 나름 들은 대로 주제어와 뉘앙스를 살려서 전하려고 한다. 더 의심 말고 여러분들은 신심을 내서 귀 기울여 새겨듣고 따라 외우면 더 좋겠다.

부처님께서 인도 북부 코살라국에서 ‘제타 태자의 숲에 급고독 장자가 세운 절’이라는 뜻을 가진 기원정사에서 1250명이나 되는 덕 높은 큰 비구 대중들과 함께 하시는 바로 그 때이다. 그냥 매일[Everyday]이 아니라 모든 하루하루[Every single day]의 일상은 같지만 다시는 안 오는 그 시간인 지금이기도 하다. 평소처럼, 세존께서 공양 시간인 10시경이 되자 외출용 승복을 입으시고 밥그릇을 지니시고 교화와 하심을 실천하고자 몸소 밥을 구걸하러 사위성에 들어가셨다. 큰 성 안에서 부잣집 가난한 집 가리지 않고 차례대로 일곱 집의 탁발을 마친 뒤에 본래 계시던 처소로 돌아오셨다. 식사를 하신 후에 옷과 그릇을 정리하신 뒤 손과 발을 씻으셨다. 자리를 펴고 가부좌로 앉아 선정 삼매에 드시며 어쩌면 끝난 후 별 차이는 없겠지만 드디어 기대하던 금강경 회상이 시작된다.

논쟁을 잘하는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일어났다. 세상의 가장 위대한 스승인 세존께 법을 묻기 위해 오른 어깨를 벗어 메고 앞으로 나와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고 공경의 예를 다하였다. 부처님께 “말없는 설법으로 늘 일상에서 하심을 실천하시며 무한한 법열을 얻게 해주시는 만나기 어려운 경이로우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보살들로 하여금 중생들도 한 생각(마음)을 잘 지켜서 [깨달음을 얻도록] 중생들[의 교화]을 잘 부탁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의 진리를 배우고 닦은 보살과 같아지려는 선한 남자나 선한 여인이 그 마음을 어디에 머물러야 하며 또 머물려는 그 마음을 어떻게 항복시키며 다스려야 합니까?”라고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좋은 질문이다. 참으로 훌륭하다. 수보리야, 네 말처럼 여래께서는 보살들로 하여금 중생들도 한 생각(마음)을 잘 지켜서 [깨달음을 얻도록] 중생들[의 교화]을 잘 부탁하셨다. 마침 지금 듣기를 청하니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말해 주리라.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에 마음을 낸 선남자와 선여인은 지금부터 말하는 데 머물러야 하며 또 이와 같이 그 머물려는 마음을 항복시켜야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수보리 등은 “네, 세존이시여, 기쁘게 듣고자 하오니 계속해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해설] “보살들로 하여금 중생들도 한 생각(마음)을 잘 지켜서 [깨달음을 얻도록] 중생들[의 교화]을 잘 부탁하셨다”는 내용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지금까지는 “보살들을 잘 보호해 주시며 보살들을 잘 격려해 주십니다” 또는 “보살들을 잘 염려하여 보호하시고 보살들을 잘 당부하여 위촉해 주시나니” 등으로 해석하였다. 하지만 보호와 격려 또는 당부 위촉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말에 의지 하지 말고 뜻에 의지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금강경』에는 성문 연각승의 소승에 대해 보살도를 그리고 그 깨달음의 근간으로서 ‘공(空)’을 거론하며 대승의 중심경전으로 거론하고 있다. 까닭에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의미로서 마음을 잘 닦아서 보리를 얻고, 중생들의 교화를 당부하고 위촉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참 의미가 아닐까 싶다.

인도에서 사라진 불교. 그 중심인 기원정사처럼 탑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장마철 익산미륵사지 전경.
인도에서 사라진 불교. 그 중심인 기원정사처럼 탑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장마철 익산미륵사지 전경.

 

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004 부처님이 마음 머무는 법을 보여 주심

[원문언해]佛告須菩堤하사대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降伏其心이니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非無想을 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而滅度之하리니 如是滅度 無量無數無邊衆生호대 實無衆生이 得滅度者니 何以故오 須菩堤야 若菩薩이 有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면 卽非菩薩이니라.

[직역]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들이 응당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니, 이른바 이 세상에 있는 난생(卵生)․태생(胎生)․습생(濕生)․화생(化生)․유색(有色)․무색(無色)․유상(有想)․무상(無想)․비유상(非有想)․비무상(非無想)의 모든 중생(衆生)을 내가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모든 집착과 고통을 없애고 제도하였다. 이렇게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을 집착과 고통을 없애고 제도하였으나, 실제로는 단 한 중생도 제도된 이가 없다. 왜 그런지 아는가! 수보리야, 어떤 보살이라도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있게 되면 보살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현대문]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들이라면 응당 그 머물려는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알에서 나는 난생(卵生)․태로 생기는 태생(胎生)․습기에 의해 생기는 습생(濕生)․이 몸 그대로 가서 태어나는 화생(化生)․빛깔이 있는 유색(有色)과 없는 무색(無色)․생각이 있는 유상(有想)과 없는 무상(無想), 그리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닌 비유상(非有想)과 없는 것도 아닌 비무상(非無想) 등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중생을 내가 모두 집착과 고통을 없애고 제도하여 더 닦아야 할 일이 조금도 남지 않은 마지막 경지로 불교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모든 번뇌가 다한 부처님의 경계인 모든 번뇌가 다 사라진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할 것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아니 지금도 이렇게 한량없고 끝없을 정도로 수많은 중생을 제도해 왔다. 그런데 이제와 보면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된 이가 남아 있지 않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되더라도, 나라는 것의 실체가 있다는 관념인 아상(我相)․나는 사람이요 축생이나 귀신이 아니라는 인상(人相)․뭇 인연에 의하여 살아가는 존재로 괴로움이나 즐거움 따위가 끊임없이 닥쳐와서 끊을 수 없어 보살이 될 수 없다는 중생상(衆生相)․영생은 아니더라도 일정한 기간 동안은 살아 있게 되리라는 수자상(壽者相)이 생기면, 더 이상 보살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해설] 금강경 회상 이전부터 수많은 부처님은 중생들을 보살도로 이끌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중생들이 관념인 상(相)을 버리지 못해서 다시 중생들로 돌아갔다. 이를 안타까워하며 세존께서 언급하신 위의 말씀이 『금강경』의 요체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그런 상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늘 머물려는 그 마음을 항복시켜 다스려야 한다는 점이다. 수보리가 세존께 여쭌 것도 이것이다. 부좌이좌로 시작된 금강경 회상에서도 세존께서는 중생 모두에게 무한한 법열을 느끼게 하며 완전한 열반으로 이끌었으나 끝나고 나면 “부처님이 이렇게 말한 거 맞지?” 등으로 다시 중생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미리 경계한 것이기도 하다.

-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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