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위빳사나의 방법

『대념처경』 말씀에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움켜쥔다는 것은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집착이란 첫째 원하는 것, 둘째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해를 위하여 ‘가려움’을 예로 들겠습니다. 가려움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원하는 것이며 탐(貪)에 해당하는 집착입니다. 가려움을 싫어하는 것, 이것이 거부하는 것이며 진(瞋)에 해당하는 집착입니다. 밀어내든 잡아당기든 접촉하고 붙잡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움켜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빳사나가 아닙니다. 사라지기를 바라거나 거부하는 마음이 강화되면,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볼 수 없습니다. 색안경을 끼고 편견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올바로 볼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바라는 마음 없이 단지 가려움이라는 현상만을 제대로 강력히 주시합니다. 이것이 바른 방법입니다. 가려움이 싫다고 긁어서는 안 됩니다. 단지 가려움이라는 현상만을 제대로 강력히 주시합니다. 이때에 바르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즉, 싫어하거나 원하는 것 없이, 동요 없이, 단지 알아차림만 합니다. 그러면 일어날 때와 변화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탐·진·치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주시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바르게 통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빳사나 명상의 핵심 자세 첫 번째는 탐·진 없이 즉, 바라거나 거부함 없이

단지 알아차림 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몸과 마음, 즉 물질과 정신입니다. 그렇게 주시할 경우, 여러분은 개별적 특성과 보편적 특성을 바르게 꿰뚫어 보게 됩니다.

“(갈애와 사견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설명 드리고 있습니다.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는 관념 없이 단지 몸을 관찰합니

다. 몸은 물질입니다. 즉 단지 물질을 관찰합니다. 그 물질에서 일어나는 현상만을 관찰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일정하게 오고 가면서 알아차림 하는 것을 행선(行禪)이라고 합니다. 천천히 움직이면서 행선을 할 경우, 다리를 들면서 드는 동작의 세세한 부분을 관찰합니다. 다리를 내리면서 내리는 동작의 세세한 부분을 관찰합니다.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 합니다. 알아차림 할 때는 가능한 천천히 하는 것이 알아차림 하기에 좋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할 수 없는 경우에도 가능한 한 알아차림 하면서 행동합니다.

우리가 몸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아차림 하되, 가능한 한 번에 한 가지씩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행선(行禪)을 하면서 듦과 내림을 주시합니다. 처음 하시는 분은 복숭아 뼈 아래의 발을 주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들면서 ‘듦’이라고 마음속으로 명칭하며 주시하고, 내리면서 ‘내림’이라고 명칭하며 주시합니다. 그렇게 주시하고 있으면 얼마 안 되어, 무게감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들 때와 내릴 때에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지는 현상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조건이 되니 무거워지고, 조건이 되니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의 체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상을 할수록 다양한 특성들을 알아차리

게 됩니다. 처음 위빳사나를 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예비 과정으로서 행선을 권하며, ‘듦’이라는 동작과 ‘내림’이라는 동작을 관찰할 것을 권해드립니다. 이것은 알아차리는 힘을 키움으로써, 본격적인 행선을 할 능력을 기르기 위함입니다.

『대념처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비구는 걸어가면서 ‘걷고 있다’고 꿰뚫어 알고, 서 있으면서 ‘서 있다’고 꿰뚫어 알며, 앉아 있으면서 ‘앉아 있다’고 꿰뚫어 알고, 누워 있으면서 ‘누워 있다’고 꿰뚫어 안다.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 말씀은 행선(行禪), 주선(住禪), 좌선(坐禪), 와선(臥禪), 생활선(生活禪)에 대한 내용입니다.

-마하시 전승 위빳사나 ‘담마명상원’ 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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