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나교는 불교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수행단체

자이나교의 깃발(상징)
자이나교의 깃발(상징)

지금까지 명상의 일반적인 역사와 기원 그리고 주로 인도에서의 힌두와 요가명상의 기원을 소개해 왔다. 불교 명상을 논하기 전에 인도에서 간과할 수 없는 명상 전통이 자이나교 명상이다. 자이나교는 불교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수행단체이다. 자이나교(Jaina敎)는 기원전 9세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전통적으로 자인 다르마(जैन धर्म)로 알려져 있다.

교조인 바르다마나(Vardhamana)는 붓다와 동시대 사람으로 왕족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30세경에 출가하여 13년의 고행정진 끝에 크게 깨달아 지나(Jina: 勝者) 또는 마하비라(Mahavira: 大勇)라가 되어서 자이나교가 본격적으로 성립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이나교는 후에 백의파(白衣派)와 공의파(空依派)로 나뉘었다.

 

마하비라가 케발라 즈나나 (완전한 깨달음)를 얻는 자세
마하비라가 케발라 즈나나 (완전한 깨달음)를 얻는 자세
마하비라 상
마하비라 상

자이나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마하비라(महावीर 기원전599–527년)는 부처와 동시대 인물이다. 이름의 뜻은 '위대한 영웅'이며, 한역(漢譯)은 대웅(大雄)이다. 원래 이름은 바르다마나로 육사외도 중 한 사람인 니간타 나타풋타( Nigantha Naptaputta)의 종파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마하비라(大勇), 지나(勝者) 등으로 존칭되었다.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으로 비하르 주 바이샬리 근처에서 태어났다. 자이나 전통에 따르면 그는 24번째 마지막 티르탄카라(자이나교 법통을 이은 스승)였다. 자이나교 승려들도 불교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출가 무소유의 삶을 위주로 하는 슈라마나(사문)의 전통을 갖고 있다. 사문(沙門)은 슈라마나(산스크리트어: श्रमण śramaṇa, 팔리어: samaṇa)의 음역으로서 식(息)·근식(勤息)·정지(淨志) 등으로 번역된다. 여러 선법(善法)을 근수(勤修)하고, 악법(惡法)을 행하지 않으며, 심신을 조어(調御)하여 청정(淸淨)한 깨달음의 길을 지향(志向)하고 노력함을 뜻하는 것으로, 출가자의 총칭으로 되어 있다. 본래는 불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쓰이며 브라만교에서는 브라만 계급 이외의 출가 수행자를 사문(沙門)이라 했는데, 불교에서는 출가하여 불도수행에 힘쓰는 사람을 모두 사문(沙門)이라 하였다. 마하비라는 석가모니 부처와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브라만교에 만족하지 못하여, 스스로 신종교를 창시하였다. 30세에 출가하고, 13년간 고행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고 그 후 72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갠지스 강 유역 각 도시에서 교화 활동을 행하였다. 그의 교리는 물질을 영혼으로부터 멀리하고 살생을 금하였다. 철학적으로는 만유(萬有)를 생명과 비(非) 생명으로 분류해서 다원적 실재론을 전개한 데에 그 특색이 있고, 그 논증에는 일종의 상대론을 이용, 후에 7종의 원리를 세워서 세계의 경과를 설명하였다. 자이나교는 불교와 같은 지방에서 발달되어 지금도 인도에 수천 만 명의 신도가 있으며, 인도에서 가장 오래 된 종교의 하나라로서 존재하고 있다. 불교는 이미 인도 땅에서 사라지다시피한 상황에서 지금까지 존재한다는 것은 뭔가 종교적 전통이 인도 사회에서 깊이 뿌리 박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자이나교의 모든 것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자이나교의 명상에 집중해서 탐구해 보자.

 

자이나교 여승들의 명상하는 모습
자이나교 여승들의 명상하는 모습

자이나교 명상은 자이나교의 삼보와 더불어서 자이나교 영성 수행의 가장 중심적인 수행방법이다. 물론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교학이나 기도 등의 여러 방법이 있지만, 자이나교에서도 명상은 자성(自性)을 깨닫고 완전한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구원(열반)을 얻는 데에 있어서 명상이 중심이 된다.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어떤 집착과 혐오도 없는 순수한 의식인 영혼의 경지를 구원의 상태, 즉 열반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갸타-다르쉬타(Gyata-Drashta 아는 자-보는 자)가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주로 명상을 위주로 한다. 자이나교의 명상을 카테고리화(化) 한다면, 다르마 디야나(Dharmya Dhyana), 슈클라 디야나(Shukla Dhyana)와 아르타(Artta), 라우드라 디야나(Raudra Dhyana)가 있다. 인간 마음의 현상을 이 네 가지 범주로 다 포섭하는데, 다르마 디야나와 슈클라 디야나 명상법은 상서로운 감정을 통해서 구원(열반 자유)에 이르고자하는 방법이고, 아르타와 라우드라 디야나는 불길한 고통을 통해서 구원(열반 자유)에 이르고자하는 방법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법)와 선(善)을 통하거나 악(惡=고통)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는 방법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명상처럼 정신적 마음의 수련을 통한 명상을 통해서 자유의 경지인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는가하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감정을 경험하면서 명상을 하면서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므로 좋은 감정을 통한 명상을 위주로 해서 하는 명상보다는 후자인 고통의 감정을 통해서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방법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불교와는 조금 다른 방법이라고 하겠다.

자이나교 명상은 삼마이카(Samayika)를 추구하는데, 이 말의 뜻은 지속되는 진짜 시간의 순간을 말한다. 시간이란 순간순간이 지속해서 만들어진 순간의 연속이다. 진정한 시간을 알려는 행위는 바로 자신의 진정한 자성(아트만=眞我)을 인지하는 것으로서, 아트만(Atman)이라고 부르는 자아를 발견하는 데에로 향하는 것이다. 진정한 아트만을 행해서 가는 것은 조화의 태도를 발전시키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자연을 존경하는 길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자아를 찾는 과정을 자신만의 깨달음을 위해서 만이라고 하기 보다는 진정한 시간(존재)의 진리를 터득하면서 타인을 이해하고 존경하면서 자연과 조화하는 행위를 실천하는 종교적 수행이 수반되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제24대까지의 스승의 법통을 계승하면서 오늘날까지 인도의 주류 종교가운데 하나로서 명맥을 잇고 있는데, 자이나교는 두 개의 종파가 있다. 디감바라(Digambara 空衣파)와 스벳탐바라(Svetambara 白衣파)가 그것이다. 디감바라파는 스벳탐바라파에서 기원후 3세기경 갈라졌는데, 지금도 인도에 가면 가끔 거리를 행진하는 이런 공의파 승려를 볼 수 있다.

가장 존경받는 자이나교 스승 아차랴 위디야사가르(Acharya Vidyasagar 1946-)
가장 존경받는 자이나교 스승 아차랴 위디야사가르(Acharya Vidyasagar 1946-   )
명상 스승, 아차랴 쉬리 마하프라갸 (Acharya Shri Mahapragya (1920–2010)
명상 스승, 아차랴 쉬리 마하프라갸 (Acharya Shri Mahapragya (1920–2010)
명상 스승, 아차랴 쉬리 마하프라갸가 개발한 프렉샤(Preksha 있는 그대로 보다) 명상을 하고 있는 서구 출신 명상 수행자들.
명상 스승, 아차랴 쉬리 마하프라갸가 개발한 프렉샤(Preksha 있는 그대로 보다) 명상을 하고 있는 서구 출신 명상 수행자들.

두 개의 자이냐교 종파는 각기 지파(支派)를 거느리고 있다. 거의 비슷하지만, 자이나교의 모든 종파의 철학이나 주요 교리는 같다. 다만 수행방법상의 차이에서 종파의 이름이 다를 뿐이다. 18개 정도의 지파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공의파와 백의파는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을 주는데, 공의파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다닌다. 그야말로 무소유 그 자체이다.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빈 몸으로 살면서 수행에만 몰두하는데, 인도사회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백의파는 문자 그대로 하얀 천의 옷을 입는데, 이 파에서는 어느 정도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여서 개혁 성향의 종파로서 명상 방법도 고전적인 것과 현대적인 방법을 섞어서 새로운 명상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는데, 명상 스승, 아차랴 쉬리 마하프라갸가 그런 분이다. 이 분은 프렉샤(Preksha 있는 그대로 보다) 명상법을 개발해서 수 천 년 자이나교 명상을 현대화 시킨 명상 스승이다. 그가 개발한 명상법은 불교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는 여시실상(如是實相)과 유사하다. 서구인들에게 상당히 어필한 자이나교 명상법이라고 할 것이다.

이상으로 자이나교 명상을 간략하게 살펴봤다. 불교명상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자이나교명상을 잠깐 소개한 것은 불교와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는 인도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자이나교는 지금도 인도에서 존재하고 있는데, 불교는 없다. 물론 티베트 불교가 다시 들어왔고, 하층의 인도인들을 중심으로 불교가 다시 소생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자이나교와는 다르다. 자이나교는 인도 밖을 나간 적이 없이 인도에서 명맥을 이어 가고 있는데, 그 원인이 흥미롭다. 하지만 불교는 세계 고등종교로서 인도 밖으로 나가서 법륜이 굴러가고 있다. 하지만 인도만을 고집하는 자이나교도 이제는 시대와 호흡을 같이하는 명상법을 개발해서 서구에 센터를 열고 있다.

마정 보검(磨汀 寶劍)<해동임제 선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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