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해인사 주지 임환경스님 제자 12봉 가운데 한 명, 상계동 관음사 창건

가야산 해인사 주지를 역임한 임환경 스님을 모시고 건당식을 한 추억의 사진. 가운데 승모와 안경을 쓴 스님이 임환경 스님 오른쪽은 그의 제자 화봉 김진우 스님, 앞줄 왼쪽 송운스님 오른 쪽은 월운스님, 뒷줄 혜운(원로의원 송암사)스님 등의 얼굴이 보인다.(1960년대 후반 사진자료)
가야산 해인사 주지를 역임한 임환경 스님을 모시고 건당식을 한 추억의 사진. 가운데 승모와 안경을 쓴 스님이 임환경 스님. 오른쪽은 그의 제자 화봉 김진우 스님, 앞줄 왼쪽 송운스님, 오른 쪽은 월운스님, 뒷줄 혜운(원로의원 송암사)스님 등의 얼굴이 보인다.(1960년대 후반 사진자료)
가야산 해인사 주지를 역임한 임환경(1887〜1983) 스님의  90세 때 서예작품.
가야산 해인사 주지를 역임한 임환경(1887〜1983) 스님의 90세 때 서예작품.
근세의 고승으로 추앙받는 효동 임환경 스님의 제자 화봉스님의 다례를 모시고 있는 혜운 원로의원스님(송암사)(사진자료 2018.10.30.)
근세의 고승으로 추앙받는 효동 임환경 스님의 제자 화봉스님의 다례를 모시고 있는 혜운 원로의원스님(송암사)(사진자료 2018.10.30.)

불교법난은 많을 것을 잃게 했다. 근세 고승들의 족적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다. 제자 잘 만나면 그나마 빛을 보게 되고 아니면 사장되고 만다. 근현대 한국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고승 가운데 한 분이 바로 효동 임환경(林幻鏡) 스님이다. 환경스님은 가야산 해인사에 주석하면서 12봉의 제자를 두었다. 불교법난이 발생하면서 환경스님과 제자들은 해인사를 떠나야 했다. 제자 화봉 김진우 스님은 1960년 대 초, 서울 상계동에 와서 관음사를 창건하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태고종 원로의원이며 송암사 주지인 혜운(최장식)스님은 화봉스님을 은.법사로 득도했다. 이후 환경 노스님을 3개월간 시봉하면서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화봉스님은 모든 유품을 혜운스님에게 부촉하고 입적하셨다. 최근 입적한 자월스님은 화봉스님의 참회상좌였다고 한다. 화봉스님의 문집을 엮는다고 약속했는데, 아쉽다고 했다. 매년 음력 9월 22일은 화봉스님의 다례일이다. 화봉스님 다례일에는 환경스님 다례도 함께 봉행한다고 한다. 올해는 양력 10월 20일(음력 9월 22일) 일요일 오전 10시상계동 수락산 송암사에서 화봉문도회  문손들이 참석하여 봉행한다.

 환경스님이 너무 유명하다보니, 화봉 스님은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선교율을 겸비한 큰 스님이었다고 혜운스님은 눈시울을 적셨다. 환경스님은 노스님이 된다. 환경스님은 구순 노령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서예의 대가였다. 그런가하면 차에도 일가견이 있던 차인이었다. 참고로 효동 임환경스님의 행장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임환경스님(林幻鏡)(1887~1983).

 근세의 고승. 성은 林氏, 본관은 羅州, 속명은 在修, 법호는 幻鏡, 법명은 雨仁이다. 경남 합천군 출신으로 8세에 李東光으로부터 四書를 수업하였고, 13세에 가야산으로 출가하여 백련암 蓮應의 제자가 되었다. 1902년 사미계를 받았고, 1904년 수도차 금강산순례에 나서 팔공산 동화사, 오대산 월정사, 양양 명주사, 설악산 오세암과 봉정암, 간성 건봉사, 금강산 유점사 등지를 거쳐 마하연에서 1년 동안 수행하였다. 1908년에 비구계를 받았고, 1919년 2월에 상경하여 白龍城·韓龍雲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지시를 받고, 파고다공원 3·1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24년 친일승 이회광이 은행에 저당한 해인사 토지 4,000여 두락을 17년 동안 연부 상환하였는데, 당시 해인사 교무직을 맡고 있었다. 1926년 해인사 법당 앞의 석축 및 삼층석탑을 개축하였고, 조선불교유학생회의 잡지인 《金剛杵》 간행을 후원하였다. 또한, 홍제암에 거처하며 四溟堂의 구국충성을 주창하고 시조 〈백로가〉를 유포,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1929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때 일본경찰이 홍제암의 사명비를 파괴하였다.  

 1946년 해인사 주지에 취임, 사명대사의 새 비를 건립하였고, 1949년 주지직에서 물러나 홍제암·숭산농장 등지에 머물렀다. 해인사조실로 12봉의 제자를 두고 평생 서예를 해서 수입된 돈을 장터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워 주신분이다. 스님은 書道를 포교의 일환으로 여겨 일생 동안 정진하였는데, 구순노령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해인사 어귀 반석에 새긴 南無阿彌陀佛·地藏菩薩·玉流洞天·絶勝臺·獅子門,海印寺 經學院, 그리고 3기의 石柱 등은 그가 쓰고 새긴 것이다. 97세 때에도 龍泉寺 梵鐘閣의 현판을 쓰시기도 했으며, 만년에 가끔 달마도를 그리기도 하였다.

수락산 송암사=원응<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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