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칭호, 몽골에서 부여

편백운 총무원장스님이 아시아불교평화회의 개회식이 열리기전 식전행사에서 몽골라마들과 몽골불교 승무를 관람하고 있다.
편백운 총무원장스님이 아시아불교평화회의 개회식이 열리기전 식전행사에서 몽골라마들과 몽골불교 승무를 관람하고 있다.

전회에 이어서 몽골 불교와 티베트 불교와의 관계를 더 진전시켜보자. 알탄 칸은 티베트 불교의 걸룩파 수장 소남 갓쵸를 초청하여 달라이 라마 칭호를 부여하자, 소남 갓쵸는 선대의 스승과 스승의 스승을 1대와 2대로 추존하고 자신은 제3대 달라이 라마로 칭호를 부여 받았다. 제3대 달라이 라마는 알탄 칸을 합법적인 칸으로 정당화 시켜주는 형식을 취했다. 달라이 라마는 ‘큰 바다’ 즉 대양과 같은 큰 지혜를 간직한 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알탄 칸은 소남 갓쵸 라마가 파스파(팍파1235~1280년)의 환생으로 인정하는 의식을 가졌다.

파스파(팍파)
파스파(팍파)

팍파는 티베트 라마승으로, 원의 세조(世祖)의 제사(帝師)이며 몽골 신자(新字)의 창작자이다.

몽골 왕실은 라마교를 신봉하여 세조는 파스파를 초청하고 국사(國師) 칭호를 내리어 전체 불교의 총통(總統)으로 삼았다. 팍파 라마는 알탄 칸이 쿠빌라이 칸(원나라 세조)의 환생으로 인정하는 의식으로 맞교환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로써 티베트 불교의 겔룩파 전통이 몽골 전역에 확산되었고, 오늘날 몽골 불교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티베트 불교의 중세시대 불교 전통이 몽골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격이 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인도 후기 대승불교전통이 살아남아 있으며, 몽골불교에서는 16세기 티베트 불교의 전통이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16세기에 엣 몽골제국 수도 카라코룸에 세워진 에르덴 조 사원
16세기에 엣 몽골제국 수도 카라코룸에 세워진 에르덴 조 사원

티베트 걸룩파 전통이 몽골 전역에 확산되면서, 몽골불교로 자리잡게 된다. 동시에 정치적 상황은 청나라 시대가 도래 했으며, 청나라는 불교를 보호하게 되고 불교를 통해서 몽골과 티베트를 간접 통치하는 전략을 택하게 된다.

몽골 울란바타르의 제1의 총본산 간단사원에서 한국대표들이 기념촬영.
몽골 울란바타르의 제1의 총본산 간단사원에서 한국대표들이 기념촬영.

몽골불교는 티베트 걸룩파 전통을 많이 이어 받았다고는 하지만, 근대이후에는 티베트 불교의 여러 종파의 전통을 골고루 받아 들였다. 앞으로 좀더 설명이 필요하지만 몽골 불교는 청나라 때에도 상당히 확산되는 교세였다. 청나라는 1635년부터 1912년까지 280여년간 중국 천하를 지배했고, 몽골도 청나라 영향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티베트-몽골불교는 몽골 땅에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된다.

몽골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나라를 대강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1765년경의  청나라 영역.
1765년경의 청나라 영역.

청나라는 국호가 대청국(大淸國)이다. 대청제국(大淸帝國) 또는 청조(淸朝)라고도 한다. 만주족이 통치한 제국이다. 1635년 10월 13일, 탄생한 만주족의 청 제국은 광대하였으며 융성했었다 또 인구도 증가하였다. 청 초기에는 훌륭한 황제들(강희제, 옹정제)이 통치했다. 한족의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유라시아 육상 제국을 이룩하였다. 심지어 원나라보다 큰 영토를 이루게 되며, 1689년에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루스 차르국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1683년부터 1830년까지는 그야말로 청 제국의 평화시대(팍스 시니카)였다. 이민족으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하였다. 제8대 도광제부터 말대 선통제 대에서 서구열강 세력 등의 영향으로 국력이 약해져 1912년에 선통제가 퇴위하였고, 1924년에, 공식적으로 황실이 해체되어 육상 제국의 종말과 동시에 중국 역사에서 2천여 년 넘게 이어졌던 봉건 왕조가 끝나게 된다.

청 제국은 중원의 방대한 한족 지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중원에서 중국의 전통문화와 여러 제도를 답습하고, 한족의 협력을 얻어 지배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특히 한족의 지식인층을 회유하여 관심을 정치와 사회문제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들을 동원하여 대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강희 연간의 《강희자전(康煕字典)》, 옹정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건륭의 《사고전서》는 그렇게 하여 생긴 것이다.

반면에 반청적(反淸的)이라 판단한 사상에는 용서 없는 탄압을 가하여 이른바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실증주의(實證主義)에 투철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인 고증학(考證學)은 이미 명대에 시작을 보았지만 청조의 사상 탄압은 한인 학자로 하여금 더욱더 고증학으로 나아가게 하여 정치 문제로부터 도피시켰다. 그러나 고증학은 그 자신 일종의 과학적 객관주의이며, 서양 과학문명의 영향도 더해져 학문의 전 분야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가령 실제의 측량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 등은 이러한 학풍의 소산인 것이다.

또한 청대에는 소설과 희곡의 발달이 한층 더 현저하여 《홍루몽(紅樓夢)》 《유림외사(儒林外史)》 《요재지이(聊齊志異)》 등 걸작이 나왔고, 희곡도 풍성하게 연출되었다. 회화에서는 중국의 전통적 기법 외에 카스틸리오네에 의하여 서양의 화법(畵法)이 받아들여졌고, 건축은 원명원(圓明園)과 같이 베르사유 궁전에도 비길 만한 훌륭한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의복의 큰 특징은 단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속은 바지이고 옆으로 트어져 있는 형식인데 이때 전족이 몸에 나쁨에도 불구하고, 귀족은 물론 서민까지 퍼져있었다.

청나라 건륭황제((1711~1799, 재위1735~1796년)
청나라 건륭황제((1711~1799, 재위1735~1796년)

강희제 이후 옹정제·건륭제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직접 지배하고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삼대에 이은 청의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그러나 건륭 말기부터 백련, 천리의 난을 계기로 청 제국은 점차 쇠퇴하였다. 한편, 건륭제 즉위시기에 그레이트브리튼 연합 왕국은 1792년 매카트니 사절단을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 초 중기에는 공행무역만이 실시되었다.

회의도중 휴식시간에 잠시 기념촬영
회의도중 휴식시간에 잠시 기념촬영
각국 대표들과 한자리에 모여서 회의를 참석하다.
각국 대표들과 한자리에 모여서 회의를 참석하다.

간단하게 아시아불교평화회의에 참석하였지만, 알고 보면 그 이면에는 재미있는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한국불교 태고종도 단순하게 오늘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검<세계불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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