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耳根圓通의 단계와 완성

창민 스님(불교학박사. 중앙승가강원 사교과 교수)
창민 스님(불교학박사. 중앙승가강원 사교과 교수)

1. 漸增의 단계

 

如是漸增, 聞所聞盡, 盡聞不住, 覺所覺空, 空覺極圓, 空所空滅, 生滅旣滅, 寂滅現前.

 

이와 같이 점점 增進하여 聞과 所聞이 다하여지고, 聞이 다함도 머물러 있지 아니하여 覺과 所覺이 空하였으며, 空하였다는 覺이 極히 圓滿하여 空과 所空이 滅하여지고, 生과 滅이 이미 滅하메 寂滅이 앞에 나타나더이다.

 

여기에서 聞과 所聞이 다함은 根結의 해소과정이 되고 盡聞不住는 根結의 완전해소가 된다. 覺과 所覺이 다함은 覺結의 해소과정이 되며 空覺極圓은 覺結의 완전해소가 된다. 空과 所空이 다함은 空結의 해소과정이 되고 그것의 滅은 空結의 완전해소가 된다. 生의 滅이 다함은 滅結의 해소과정이 되고 旣滅은 滅結의 완전해소가 된다. 이렇게 하여 완전한 해탈의 경계인 寂滅이 앞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와 같이 根結의 소멸에서 覺結의 소멸로, 覺結의 소멸에서 空結의 소멸로, 다시 滅結의 소멸에 이르러 완전한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점차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어떠한 수승한 차원에도 머물지 않는 가 일층의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如是漸增은 단순한 수행의 차원을 얘기하는 것을 넘어 한 차원에 머물지 않고 끝없는 수행정진을 통해 그 차원을 뚫고 지나가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서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그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1. 如是漸增, 聞所聞盡

이와 같이 한다는 것(如是)은 돌이켜 듣는 공부를 통해 소리의 일어남과 고요함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리로 인한 장애가 사라지면 감각기관의 장애(根結)가 일어난다.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번뇌이므로 해소되어야 한다. 앞의 단계에서 듣는 대상인 소리가 사라졌으므로 그것을 듣는 귀의 감각기관도 기댈 곳이 없게 되는 단계이다. 이에 대한 제가의 설은 다음과 같다.

 

1) 제가의 설

① 이운허

[이와 같이 점점 增進하여 聞과 所聞이 다하여지고]점점 增進함은 工夫를 더하여 進行함이다. 上의 聞字는 旋倒의 聞機요, 下의 聞字는 所聞의 聞性이니, 위에서는 塵을 없애는 方便으로 能聞과 所聞을 세워, 聞根으로써 塵을 없앴거니와, 이제는 塵相이 없어졌으므로 外로 所對가 없으니 根도 存在할 必要가 없어, 能聞의 聞機와 所聞의 聞性이 모두 除滅하므로 聞과 所聞이 다하여진다. 이것은 根結을 解脫함이니, 이 三結이 解脫되면 人空을 얻는다.

 

② 개운화상

이것은 나라고 인정하는 집착이 없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란 윗글을 가리킨 것이다. 앞에 나타난 대상인 물질은 쉽게 없어지지만 안의 감각기관은 끊기가 어려우니, 점점 공부의 힘을 더해 가야만 주체와 객체와 감각기관과 그 대상인 물질이 다 끊기게 된다. ‘주체’란 이것이고 ‘객체’란 저것이다.

 

③ 일귀

이와 같이 점차 증진하여 듣는 주체(聞)와 들을 대상이 다하고……

 

➃ 전종식

이와 같이 점차 증진하여 듣는 성품(能)과 듣는 경계(所)가 다 끊어지고……

 

➄ 선화상인

이와 같은 적정하고 청정한 경계가 점차 증가하여 나날이 원만해지면 자성을 듣는 이러한 듣는 능력이 다하고 들리는 대상도 다하여진다. 즉 없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들을 수 있는 것(能聞)은 耳根이며, 들리는 대상(所聞)은 自性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어진다는 것이다.

 

⑥ 劉道開

대체로 이 앞의 단계에서는 감각기관의 상대인 감각대상을 말하였다. 감각대상은 대상의 차원이고, 감각기관은 자아의 차원이다. 대상을 버리고 나를 세우거나, 대상을 떠나 나에게 돌아온다면 자아라는 관념은 여전히 남는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함께 소멸하고, 주체와 대상이 함께 사라져야 더 이상 나와 대상을 나눌 일이 없다. 오직 동일한 법의 바탕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자아(관념)의 아상이 소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⑦ 惟則

이와 같이 점차 앞으로 나아가면 들음과 듣는 대상이 사라진다고 했다. 앞의 대상경계는 쉽게 소멸하지만 내적인 감각기관은 사라지지 어렵다. 망녕된 지혜로 인해 멀고 가까움이 있게 되므로 점차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한 것이다. 들음과 듣는 대상이 사라진다는 것은 듣는 주체의 감각기관과 듣는 대상의 소리가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대상을 가지고 주체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뒤에서 말하게 될 깨달음과 깨달음의 대상이 공한 도리, 공과 공의 대상이 소멸하는 도리 또한 이와 같다.

⑧ 通理

점차 나아간다는 것은 오랫동안 돌이켜 비추어보면 공력이 깊어져 점차적으로 더 밝아진다는 뜻이다. 이렇게 점차 밝아지다 보면 문득 깨달아 대상에 묶여 끌려 다니지 않게 되고, 감각기관 또한 상대할 대상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대상에 끌려 다니지 않으므로 들리는 대상이 움직인다거나 조용하다는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다. 감각기관에 상대가 없으므로 주체의 듣는 성품이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들음과 듣는 대상이 사라진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세 번째 단계로서 감각기관의 해소를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감각기관이 처음 해소되면 자아에 대한 집착이 사라져 我空을 얻게 된다. 이것이 경계선이 되어 감각대상이 사라지고 감각기관이 사라지면 나라는 것이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⑨ 智旭

이와 같이 점차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치로는 단번에 깨닫는 것이라서 다양한 단계와 깨달음이라는 것이 모두 사라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단번에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소멸하는 것이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 해도 1,000장의 종이를 자를 때에는 중간에 잘라지는 순서가 정연한 것이다. 아무리 대붕이 한 번 날면 9만 리를 난다 해도 중간에 길던지 짧던지 자신이 직접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위점차가 따로 있는 일은 아니지만 지위점차를 설하는 것이다. …… 범부에게는 감각기관이 듣는 주체가 되고, 소리가 듣는 대상이 된다. 그래서 나라는 견해(我見)가 생긴다. 성문 · 연각에게는 지혜의 귀가 듣는 주체가 되고, 원리로서의 진리가 듣는 대상이 된다. 그래서 나가 없다는 견해(無我見)가 일어난다.

보살에게는 법의 귀가 듣는 주체가 되고, 현상으로 드러난 진리가 듣는 대상이 된다. 그래서 나가 있기도 하고 나가 없기도 하다는 견해(亦我亦無我見)가 일어난다. 부처에게는 부처의 귀가 듣는 주체가 되고, 중도가 듣는 대상이 된다. 그래서 나도 아니고, 나 아님도 아닌 최상의 바른 견해(非我非無我無上正見)가 된다. 이것을 묶어서 말하자면 4가지의 차원에서 동시에 듣는 주체와 들리는 대상이 모두 사라지는 일이다. 순차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범부의 차원에서 듣는 주체와 듣는 대상이 사라지게 되면 나라는 견해에 집착하는 차원을 넘게 된다. 이것이 십신 중의 七信의 지위이다. 성문ㆍ연각의 차원에서 듣는 주체와 듣는 대상이 사라지면 나가 없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차원을 넘게 된다. 십신 중의 十信의 지위이다. 보살의 차원에서 듣는 주체와 듣는 대상이 사라진다는 것은 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차원을 넘게 된다. 初住 이상의 지위이다. 부처의 차원에서 듣는 주체와 듣는 대상이 사라진다는 것은 나도 아니고, 나아님도 아닌 최상의 바른 견해를 성취한다는 뜻이다. 묘각의 지위이다.

 

2) 제가의 설 요점

이운허는 聞을 돌이켜 듣는 행위로 보았고, 듣는 대상(所聞)을 듣는 성품(聞性)으로 보았다. 惟則이나 通理 역시 듣는 대상이 사라지는 일을 자성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물론 그렇다고 자성이라는 무엇이 따로 있어서 그것이 사라진다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물과 얼음의 비유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얼음과 물의 성분은 모두 동일하지만 얼음이 얼면 막혀서 통하지 못하고 그것이 녹으면 순조롭게 흘러 널리 통하게 된다. 따라서 집착에 묶인 일을 얼음의 상태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듣는 성품이 사라진다는 것은 물과 얼음이 둘 아닌 이치에 통달했다는 뜻이 된다. 앞의 塵結의 소멸에서 外根과 그 대상이 되는 塵相이 사라짐을 말했다면 여기에서는 內根과 듣는 자성의 소멸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무엇을 돌이켜 듣는다는 자기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이운허는 人空을 얻는 일로 설명하였다.

일귀 역시 듣는 주체와 대상의 소멸로 설명하면서 그것이 소멸하였다는 자기의식조차 내려놓는 것을 人空을 얻는 일로 설명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운허와 같은 관점으로 이해된다.

개운화상 역시 이에 대해 我執을 내려놓는 일로 설명하고 있어서 人空을 얻는 일로 설명한 이운허나 일귀와 동일한 관점을 갖고 있다. 개운화상은 특히 이것을 內根과 內境의 소멸로 설명하면서, 앞의 外根과 外境의 소멸과 대비적 관계에서 비교하고 있다.

이렇게 안과 밖으로 나누는 방식은 외적 장애와 내적 집착을 나누어 설명하는데 효과적이다.

그래서 劉道開는 앞의 動靜의 두 번뇌를 버릴 때에는 밖을 버리고 안으로 돌아오는 방식을 취하였으므로 아집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전종식은 전체 6結의 해소를 能과 所의 문제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內根의 차원에서는 能이 돌이켜 듣는 일이 되고, 所가 듣는 성품(聞性)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선화상인 역시 들리는 대상을 自性이라 단언하고 있는데, 전종식은 듣고 들리는 문제를 일관되게 밖의 것을 안에서 듣는 일로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선화상인의 경우에는 盡聞不住를 應無所住而生其心으로 설명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한편 智旭은 듣는 주체와 듣는 대상이 사라지는 원리를 돈점의 논리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 能所가 사라지는 일이 범부, 성문연각, 보살, 부처의 차원에서 공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리적으로는 能所가 사라지면 바로 돈오임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범부에서 성문연각과 보살을 거쳐 부처의 자리로 나아가는 일임을 설명하고 있다. 智旭은 수행의 지침서인 능엄경을 자신의 수행체험에 바탕 하여 선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1-2. 盡聞不住, 覺所覺空

여기에서는 覺結의 해소를 말한다. 들음이 사라졌다는 것은 듣는 감각기관과 듣는 대상으로서의 소리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지각만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만약 이러한 경계에 머물면 我空만 성취할 뿐 法空을 성취할 수 없어 무위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不住란 머물지 않고 돌이켜 듣기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지각(覺)이란 이렇게 動靜의 두 장애(聲塵)와 감각기관을 실체로 집착하는 장애(根結)가 사라지고 나면 오직 순일하여 끝이 없는 경계가 현전한다. 이러한 경계를 지각하는 것을 覺이라 하고, 이렇게 지각되는 대상경계를 所覺이라 한다. 돌이켜 듣기를 반복하면 이러한 지각의 주체와 대상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제가의 설은 다음과 같다.

 

1) 제가의 설

① 이운허

[聞이 다함도 머물러 있지 아니하여 覺과 所覺이 空하였으며] 聞이 다함은 前의 聞과 所聞이 다하여짐이니, 聞機와 聞性이 雙泯한 境地요, 머물러 있지 아니함은 功行을 增進하여 이 境地를 透過함이다. 覺과 所覺이 空한 것은 새로 證한 것이니, 聞과 所聞이 다한 後에는 根과 塵이 逈脫하고 湛一無邊한 境地가 現前하나니, 覺은 이 境地를 照鑑하는 智요, 所覺은 이 湛一한 境이다. 聞과 所聞이 다한 것에 머물러 있으면 智와 境이 恒常 相對하여 能과 所가 있게 되어 勝進하는데 障礙가 되거니와, 이제 覺과 所覺이 空하여진 것은 能覺의 智와 所覺의 境이 모두 空寂하여 다시 對待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覺結을 解脫함이다.

 

② 개운화상

이것은 法執이 없어진 것이다. ‘깨달음’이란 깨닫는 놈이 비추는 것이니 곧 지혜의 본체이다.

 

③ 일귀

들음이 다하였다는 데에도 머물지 않아(得人空) 깨달음(覺)과 깨달을 대상이 모두 공하고 ……

➃ 전종식

그 듣는 것이 다하여진 자리에도 머물지 않게 됨으로서 깨닫고(能) 깨닫는 자리(所)가 空하여 사라져서 ……

 

➄ 선화상인

이때 듣는 성질이 이미 다하여 또한 집착하여 머물지 않는다. 머물 곳이 없는 것이다. 이때가 바로 “마땅히 머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낸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경지이다. 어떤 곳에서도 집착하고 머무는 것이 없다. 느끼는 바가 있는 이 깨달음의 마음도 모두 공하고 ……

 

⑥ 智旭

머물지 않는다(不住)는 두 글자는 완전하지 않은 자리에서 완전히 깨달았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뒤의 문장을 보면 움직이는 생각이 사라지고, 헛된 생각이 소멸되면 본래 깨달은 밝은 마음(覺明心)의 때가 사라진 듯 하여 삶과 죽음이 앞과 뒤를 이루어 서로 하나로 비추게 된다. 이것을 생각의 집적물(想陰)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평상시에 꿈을 꾸는 생각조차 사라져 깨어있으나 잠을 자거나 둘이 아니게 된다.(寤寐恒一) 깨달아 밝은 마음에 집착이 없고 고요하여 마치 밝은 허공과 같으며, 거칠고 무거운 번뇌와 헛된 생각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직 한결같은 참됨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생각의 집적물(想陰)을 남김없이 타파하여 번뇌를 벗어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六卽의 논리로 말할 수 있다. 중생들은 종일 이러저러한 망상을 일으키지만 망상에는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주체와 깨달음의 대상은 원리적으로 공한 것(理卽空)이다. 이를 통해 망상에는 자성이 없으며, 주체와 대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름이 그대로 공하다(名字卽空)고 말한다. 나머지의 경우 역시 그러하다.

⑦ 惟則

나와 대상에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다는 그 생각까지도 실체가 없음을 관조하는 지혜가 있다. 이것이 듣는 주체와 듣는 대상이 사라진 경계에 집착하여 머물지 않는 일이고, 지각과 지각의 대상이 소멸하는 일이다. 앞 구절의 듣는 주체와 듣는 대상이 사라진 경계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盡聞不住)은 대상이 되는 번뇌가 사라진 차원을 말한다. 뒷 구절의 지각과 지각의 대상이 공하다는 것은 실체에 집착하지 않는 지혜를 말한다. 지각이란 지각하여 비추는 일, 다시 말해 지혜의 본체를 말하는 것이다.

 

⑧ 劉道開

이것(盡聞不住)은 감각기관으로 관찰하는 차원을 벗어남을 말한다. 들음이 다한 뒤에는 육근과 육진의 구속을 완전히 벗어나 순일하여 끝이 없는 경계가 현전하게 된다. 이것이 지각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경계를 비춰보는 지혜는 지각의 주체가 된다. 들음이 사라진 자리에 머물게 되면 지혜(能)와 경계(所)가 여전히 상대하게 되고, 주체와 대상이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그것은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데 장애가 된다. 오직 더욱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 이 경계를 뚫고 지나야 한다. 이 자리에 둔하게 정체되지 않을 때 주관적으로 관조하는 지혜와 지각의 대상이 함께 공적하게 된다. 그것이 말끔히 사라져 더 이상 상대를 세우지 않게 되는 것이다.

 

⑨ 通理

들음이 다한다는 것은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와 그것이 끊어진 고요함이 다하고, 나아가 듣는 주체인 귀의 감각기관이 다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하여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별도로 작용하지 않고 오직 하나의 지각만 남게 된다. 들음이 다하였음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각하는 주체와 지각하는 대상을 아직 완전히 떠나지 못하였으므로 머물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지각이 결국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 한걸음 더 나아가 관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래 오래 관조하여 지각의 대상이 되는 3가지 차원(시끄러운 소리, 고요함, 주체적으로 지각하는 감각기관)이 다 사라지고 나면 지각하는 주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지각과 지각의 대상이 공하게 된다(覺所覺空)고 말한 것이다. 이것으로 4번째 단계인 覺結이 해소된다.

 

⑩ 曾鳳儀

들음이 다함에 머무르지 않아 느낌과 느낌의 대상마저 공하게 되면 공의 본래 성품이 완전히 밝아 법해탈을 성취한다.

 

2) 제가의 설 요점

이운허는 자신이 듣는 소리의 지각(能覺)과 그 소리의 대상(所覺)이 모두 사라져 空寂한 상태가 되면 깨달음과 번뇌가 동시에 소멸하여 그 상대가 없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깨달음의 지혜를 이운허는 覺結을 解脫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개운화상은 깨달음의 성품(能聞)과 그 대상(所覺)이 모두 없어진 自性을 法執이 없어진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깨달음이란 깨닫는 자가 돌이켜 그 대상을 回光返照하는 것을 지혜의 본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이운허가 주장한 覺結의 解脫과 일맥상통한 말이다. 일귀, 전종식, 선화상인 등 역시 깨달음의 성품(覺)과 그 대상(所)이 모두 空하여 眞如自性의 실체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智旭은 五結의 소멸을 五蘊의 소멸로 환치하여 설명한다. 들음이 다하고, 지각과 지각의 대상이 공하여 지는(覺所覺空) 제4단계의 일을 想蘊의 해소로 설명한다. 이를 통해 我相의 해소가 일어나게 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智旭이 이렇게 오온의 해소를 단계별로 설명하고 있는데 비해 惟則은 실체 없음의 도리로 보편화하여 설명한다.

劉道開는 수행에 있어 머물지 않음의 힘을 강조한다. 어느 특정한 단계에 의미를 두고 머물게 되면 결국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통리 역시 머물지 않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저절로 주체와 대상이 사라지는 차원에 올라서게 된다는 것이다.

曾鳳儀는 이 五結의 해소가 본래 밝은 空性의 실현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설명은 각 단계에 모두 적용되는 설명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단번에 법과 하나 되는 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점차적 단계를 돈오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1-3. 空覺極圓, 空所空滅

空覺極圓의 空이란 지각하는 주체와 지각의 대상이 모두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여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覺結이 해소되었다. 여기에서는 空結의 해소를 말한다. 비어있다는 의식 역시 장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공하다고 보는 생각(能空)과 공이라는 대상(所空)이 주체와 대상으로 남아 있으면 空이 완전하지 않다. 이것을 완전히 내려놓기 위해서는 돌이켜 비추는 공부가 계속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空이 완전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제가의 설은 다음과 같다.

 

1) 제가의 설

① 이운허

[空하였다는 覺이 極히 圓滿하여 空과 所空이 滅하여지고] 空하였다는 覺은 위에 있는 覺과 所覺이 空하였다는 말인데, 重空의 智를 顯한 것이요, 極히 圓滿함은 增修하여 그 量을 滿足한 뜻이다. 空은 重空의 智요, 所空은 前者의 智와 境이다. 空과 所空이 滅하여진 것은 重空의 智와 前의 智·境이 모두 滅盡한 것이니, 이것은 空結을 解脫한 것이다. 이 二結을 解脫하면 法解脫을 얻은 것이다.

 

② 개운화상

이것은 俱空을 없앤 것이다. 묻기를 理體는 본래 비고 고요한 것이니 없애고자 한들 무엇을 다시 없앤단 말인가? 대답하되 ‘만약 적멸이라고 말하면 그 적멸도 오히려 생기나니 다만 그 情만 깨버리면 理는 깨드리지 못한 것이다’ 지론에 이르기를 ‘성인의 마음속에 얻은 열반을 깨뜨리지 않고 증득하지 못한 자의 희론에 집착한 것을 깨뜨리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름지기 깨드려야 하는 것이다.

 

③ 일귀

空과 覺이 지극히 원만하여 다시 空이라는 생각과 공한 경계가 다 소멸하였습니다.(得法空)

 

➃ 전종식

그 能所가 사라진 空도 깨달음의 覺도 지극히 원만해졌으니 空한 것도 空할 것도 다 없어져서 ……

 

➄ 선화상인

이 공과 깨달음의 성품이 극에 이르러 가장 원만한 경계에 이르면 이 공할 수 있는 마음과 공해지는 경계도 모두 사라진다. 하나의 공함조차도 없다. 당신은 공한 존재가 있어야 여전히 공을 집착할 것이나 지금 공함도 없다는 것이다.

⑥ 惟則

공하다는 깨달음은 모든 것에 실체가 없음을 관찰하는 지혜로서의 깨달음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부분적으로 이치를 증득하는 일(分)과 궁극적으로 이치를 증득하는 일(極)로 구분된다. 만약 궁극의 완전함을 체득하지 못하면 공의 이치를 중시하는 입장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 된다. 이 공하다는 관념 역시 실체가 없음을 알아야 궁극의 완전한 이치를 체득하게 된다. 그래서 공하다는 깨달음과 깨달음의 대상으로서의 공이 소멸한다고 말한 것이다. …… 이 단계의 핵심은 궁극적으로 완전하다(極圓)는 두 글자에 있다.

 

⑦ 通理

공하다고 깨닫는 주체와 깨달음의 대상으로서의 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완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끝까지 밀어붙여 공의 자성을 완전히 구현하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끝까지 추구하다 보면 공하다고 깨닫는 주체와 깨달음의 대상으로서의 공이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임을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하다고 깨닫는 주체와 깨달음의 대상으로서의 공이 소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섯 번째로 空結이 해소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⑧ 劉道開

공을 핵심으로 보는 관점을 벗어나는 단계이다. 깨닫는 주체와 깨달음의 대상으로서의 공이 모두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을 공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이라 한다. 그것은 공을 핵심으로 보는 지혜이다. 이 공을 핵심으로 보는 지혜는 처음에는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공이라 깨닫는 주체와 깨달음의 대상으로서의 공이 뚜렷이 둘로 남아 있게 된다. 여기에서는 공에 대한 깨달음이 완전해져서 공을 대상화하여 보는 지혜의 경계가 소멸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을 핵심으로 보는 지혜 역시 그것을 따라 소멸하게 된다. 그것은 나무를 가지고 나무에 문대는 일과 같다. 거기에서 불이 일어나면 두 나무가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⑨ 曾鳳儀

흐름에 들어가 대상을 잊는다는 구절에서 듣는 주체와 듣는 대상이 사라진다는 구절까지는 감각기관이 비로소 해소됨을 말한다. 이를 통해 자아에 실체가 없음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들음이 사라지는 경계에 머물지 않아 깨달음의 주체와 깨달음의 대상이 공하게 되면 공의 자성이 완전히 밝게 된다. 이로써 법집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법해탈을 성취한다). 공하다는 깨달음이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되면 공하다고 깨닫는 주체와 깨달음의 대상이 되는 공조차 사라지게 되어 대상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과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게 되는 것(人空法空)이다.

 

⑩ 智旭

궁극(極)이라는 이 글자는 생성과 소멸을 벗어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오는 이대로 맡겨두면 저절로 앞으로 나아가는 공을 이루게 되는 차원이다. 뒤의 문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맑고 탁하다는 분별을 환하게 밝히면 자성이 원래 맑음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마치 물결이 사라지면 맑은 물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것을 관성적 의지작용인 行陰이 소멸한다고 표현한다. 행음의 소멸은 것은 일체 세간의 자성이 맑음과 흐림으로 둘로 분별되어 있던 것이 문득 무너져 깊고 미묘한 뿌리로써 윤회의 주체로 규정되는 pudgala(補特伽羅)식의 깊은 줄기가 끊어지게 된다. 이 단계가 열반의 날이 밝아지기 직전에 해당한다. 안과 밖이 모두 밝아 들어가도 들어간 바가 없게 된다.

2) 제가의 설 요점

이운허는 空을 중요하게 보는 관점, 그것의 대상이 되는 所空을 보는 관점과 대상경계로 풀이한다. 그러면서 이 양자가 멸진한 것을 空結의 해소라 하는 전통적 관점을 계승하고 있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개운화상의 해설이다. 그는 버려야 할 것은 그렇게 착각하는 정신작용일 뿐 별도로 없애야 할 것이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情만 깨뜨리고 理는 깨뜨릴 필요가 없다’는 설명은 요령 있게 그 핵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일귀와 전종식은 경문을 번역 해석하는 외에 별도의 설명은 덧붙이지 않고 있다. 다만 선화상인은 결국 이 문제가 자기 관점과 대상에 집착하는 문제임을 강조하기 위해 ‘집착할 공함도 없다’는 말로 이 구절의 핵심을 드러내고자 한다.

한편 위에서 제시 한 바 중국의 옛 주석을 살펴보면 空覺極圓, 空所空滅의 구절에 대한 기본해석은 智旭, 曾鳳儀, 劉道開, 通理, 惟則의 다섯 사람이 동일하다. 그 전체적인 내용을 대변하는 것이 通理의 해석이다. 通理는 能空과 所空이 남아 있다면 번뇌와 구속이 모두 소멸한 것이 아니므로 그 경계에 머물지 말고 공의 자성을 완전히 구현할 때까지 추구하여야 한다고 요약 해설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智旭은 行蘊의 소멸로 설명하였고, 曾鳳儀는 人空法空의 도리로 설명하였으며, 劉道開는 空空의 도리로 설명하였다. 惟則은 공에 대한 깨달음은 내용적으로 동일할 수밖에 없으나 그 완전함에 있어서 分證과 圓證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이 공부가 공을 중시하는 입장까지 내려놓아야 함을 드러내어 보이고자 한다.

 

1-4. 生滅旣滅, 寂滅現前

여기에서는 滅結의 해소를 말한다. 生滅이 사라졌다는 것은 모든 장애가 해소되는 원리를 총괄하는 말이기도 하다. 순차적으로 볼 때 일어나는 소리에 지배되는 動結이 해소되면, 고요함의 장애인 靜結이 일어난다. 또 靜結이 사라지면 根結이 일어나고, 根結이 사라지면 覺結이 일어난다. 覺結이 사라지면 空結이 일어나고, 空結이 사라지면 滅結이 일어난다. 이렇게 소멸과 생성이 서로 짝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아직 生滅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소멸하였다는 관념까지 모두 해소되어야 한다. 이렇게 생멸의 차원이 소멸되면 관조하는 지혜가 완전하여 진정한 적멸에 이르게 된다. 寂滅의 두 글자는 모두 상대성을 벗어난 차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 寂은 고요하고 시끄러움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寂이고, 滅은 생성과 소멸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의 滅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해탈의 단계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제가의 설은 다음과 같다.

 

1) 제가의 설

① 이운허

[生과 滅이 이미 滅하매, 寂滅이 앞에 나타나더이다] 生과 滅은 앞에 말한 動, 靜, 根, 覺, 空, 滅의 六結이다. 이 滅相에 住하면 滅相에 덮히어서 항상 俱空에 있게 되는 것이므로 滅結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著力하여 滅除할 것이 아니니, 所謂 無功用道라, 다만 住著하는 마음만 없으면 一刹那頃에 本理가 現前하여 이 滅相을 逈脫하게 되는 것이니, 곧 寂滅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俱空도 不生하는 것이다.

 

② 개운화상

이것은 결과를 보인 것이다. 여섯 개의 감각기관과 그 대상인 물질이 생기거나 없어짐이 이미 끊어지고 곧 初住分을 증득하여 적멸이 앞에 나타난 것이다.

 

③ 일귀

이와 같이 生滅이 이미 멸하니 俱空不生 寂滅이 눈앞에 드러났습니다(得無生忍).

➃ 전종식

生滅이 이미 사라져 寂滅이 앞에 나타났습니다.

 

➄ 선화상인

생하고 멸하는 이러한 마음이 이미 사라지면, 이때 진정한 적멸의 즐거움이 나타난다.

 

⑥ 通理

생성과 소멸이 사라진다(生滅既滅)는 것은 空한 성품이 있다는 관념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사라졌다는 관념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다. 만약 소멸하였다는 이 느낌을 진여로 생각하면 다시 그것이 극히 세밀한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이 소멸이라는 것이 생성의 상대적 차원에서 세워진 것임을 관찰하여 닦으라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함께 말한 것이다. 만약 생성의 상대적 차원으로서 소멸을 말한다면 그 소멸 역시 진여가 아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생성과 소멸의 상대적 차원에 세워진 소멸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하면 신령한 마음에 상대적 차원이 사라져 오묘한 본체가 홀로 빛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으며 그것을 보고자 하여도 흔적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적멸이 바로 앞에 드러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여섯 번째 번뇌인 滅結의 해소인 것이다. 이후로는 더 벗어나야 할 번뇌가 존재하지 않는다.

 

⑦ 劉道開

이 마지막의 번뇌를 해소하면 모두 공하여 생성하는 일이 없다. 대체적으로 動, 靜, 根, 覺, 空, 滅의 여섯 가지 번뇌의 핵심은 생성과 소멸을 나누는 마음이다. 처음에는 움직임이 소멸하고 고요함이 생성하였다. 두 번째 단계로 대상경계가 소멸하고 감각기관이 생성하였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감각기관이 소멸하며 느낌이 생성하였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느낌이 소멸하고 공하다는 관념이 생성하였다.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공하다는 관념이 소멸하고, 모든 것이 소멸했다는 관념이 생성하였다. 이 단계에 이르러 만약 마지막으로 소멸하였다는 관념에 머물면 그것은 소멸하였다는 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극미세 번뇌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백척의 장대 끝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라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부러 힘들여 소멸시킬 필요는 없다. 다만 머물러 집착하는 마음만 없이 찰나의 순간에 본질적 진리가 드러나게 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소멸하였다는 관념조차 사라져 남김없이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寂滅의 寂은 움직임의 상대적 차원인 고요함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본래 움직임이 없는 고요함이다. 寂滅의 滅은 생성의 상대적 차원인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본래 생성이 없는 소멸인 것이다. 이것은 본래 깨달아 있는 진여의 본체이자 如來藏性이며 眞如實際이다. 그것은 본래 청정하여 온 우주법계에 없는 곳이 없다.

 

⑧ 思坦

생성과 소멸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3가지 지혜가 모두 사라졌다는 뜻이다. 앞에서 말한 3가지 지혜는 모두 생성과 소멸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적멸이 드러난다는 것은 이치가 드러나는 자리에 처음으로 머물게 되었다는 뜻이다. 삼제를 차례로 증득하였으므로 생성과 소멸이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생성과 소멸이 사라졌으므로 상대적 두 차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고, 적멸이 드러난다는 것은 중도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⑨ 通潤

불생불멸하여 청정하면서도 본래 그러하다. 법계에 두루 하며 一念三觀의 진실한 본체가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관음의 듣는 감각기관이 사라지는 때이며 삼매에 드는 때이다. 또한 果地의 깨달음이 因地의 마음이 되는 때이다.

 

⑩ 曾鳳儀

생성과 소멸이 사라지면 한 생각에 빠르게 깨닫게 된다. 그것은 점차적으로 증진하고 점차적으로 교화되는 일과 원래 두 길이 아니다. 그래서 들음을 돌이켜 법의 흐름에 들어가는 데서부터 생성과 소멸이 사라지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을 준주 해야 하는 것이다.

 

2) 제가의 설 요점

이운허는 六結을 설명하면서 처음 생기는 것은 生이요 없어지는 것은 滅이니 生과 滅이 다한다는 것은 生만 滅하는 것이 아니라 滅도 멸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滅하였다는 생각마저 놓아버린 상태를 滅結로 부터의 逈脫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개운화상 역시 六結이 멸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주체와 객체가 이미 텅 비어 없어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실로 고요하게 滅해지면 실체가 원만하여 앞에 나타나는 것을 적멸이라 한다는 것이다.

일귀와 전종식은 이 구절에 대해 경문을 번역 해석하는 외에 별도의 설명은 하지 않고 있다.

선화상인은 이에 대하여 거울에 때가 다 없어지면 밝음만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적멸의 즐거움만 남게 된다고 해석하고 있다.

通理는 이에 대해 六結 중에서 여섯 번째의 滅結을 말하는 것이다. 이 滅結은 그 사라졌다는 관념에서 벗어나는 일로 해소된다. 그런데 이것에 집착하게 되면 세밀한 장애가 되어 깨달음을 가로막게 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소멸하였다는 관념마저 벗어나게 되면 자연히 신령한 본체가 빛나게 되는데 이것을 滅結의 해소라 해석하고 있다.

劉道開 역시 滅結의 해소에 대해 通理와 유사한 해석을 하고 있다. 특히 劉道開는 소멸하였다는 관념까지 내려놓게 되는 단계를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

思坦은 생성과 소멸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점차적 단계를 모두 해결하는 차원에 들어갔다는 말임을 강조한다. 앞의 점차적 단계가 생성과 소멸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인데 비해 이 마지막 단계는 생성과 소멸 그 자체를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것이야말로 불교 실천의 궁극인 중도의 구현이라 해석한다.

通潤은 아집과 법집, 아공과 법공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청정한 본체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 구절을 해석한다. 역시 불교 수행의 궁극적 차원을 가리킨다고 본 것이다.

曾鳳儀는 생멸이 소멸하여 바로 깨닫는 돈오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들음을 돌이켜 법의 흐름에 들어가는 첫 단계부터 시작하여 점차적 증진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 6결의 해소를 정리하여 볼 필요가 있다. 관세음보살의 耳根圓通은 五陰(色 ‧ 受 ‧ 想 ‧ 行 ‧ 識 )의 결박을 耳根을 통하여 六結 (動→靜→根→覺→空→滅)로써 그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과정을 수행의 단계별로 설명한다.

 

이러한 과정을 다음의 도표로서 이해 할 수 있다.

 

五 陰

六 結

 

聞 思 修

 

觀 音 修 行

六 結 解 脫

入流亡所: 소리의 흐름(音流)에 觀하여 그 소리의 대상(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動結解脫

所入旣寂: 소리의 흐름을 돌이켜 觀照함으로서 觀과 所가 이미 고요해져 動靜의 相이 일어나지 않는다.

靜結解脫

聞所聞盡: 소리의 듣는 감각주체(聞)와 듣는 대상(所聞)이 모두 사라진 그 자리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根結解脫

覺所覺空: 느낌의 깨달음(覺)과 그 깨달음의 대상(所覺)이 모두 空하여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根結解脫

空所空滅: 空하다는 생각과 空한 대상이 모두 滅하여 空하다는 마음까지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空結解脫

生滅旣滅: 생과 멸의 마음은 六結(動→靜→根→覺→空→滅)을 통하여 滅했다는 마음까지도 사라져야 俱空이 不生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大解脫이다

滅結解脫

 

2. 獲二殊勝의 완성

 

忽然超越 世出世間, 十方圓明 獲二殊勝. 一者上合 十方諸佛 本妙覺心, 與佛如來 同一慈力. 二者下合 十方一切 六度衆生, 與諸衆生 同一悲仰.

忽然히 世間과 世出間을 超越하여 十方이 圓明하여지면서, 두 가지 殊勝함을 얻었으니, 一은 위로 十方諸佛의 本妙覺心과 合하여 佛如來로 더불어 慈力이 同一함이요, 二는 아래로 十方의 一切 六度衆生과 合하여 모든 衆生들로 더불어 悲仰이 同一함이외다.

 

六結의 속박에서 벗어나 두 가지 수승함을 얻게 되는 일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위로 모든 시방 부처님의 근본마음인 불성을 깨달은 자리와 같이한 마음과 합하여, 모든 부처님과 자비의 힘이 동일한 마음이고, 둘째는 아래로 시방의 일체 육도중생과 합하여, 여러 중생과 더불어 고통을 덜어주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제가의 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가의 설

① 이운허

[悲仰이 同一함이외다] 悲는 拔苦를 哀求함이요, 仰은 與樂을 希望함이다.

 

② 개운화상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원융함을 말미암았으므로 세간과 출세간의 법이 이를 가로 막을 수가 없어서 시방의 법계가 원만하고 밝게 통달한 것이다. 오직 원만하고 밝게 통달하였기 때문에 위로는 모든 부처님과 합하고 아래로는 중생과 합하여 흠 잡을 것이 없는 것이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과 합하였으므로 만물을 가엾게 여겨 자비를 일으켜서 근기에 맞추어 함께 즐기니 곧 32가지로 응함이 이것이고 아래로는 중생과 합하였기 때문에 그 悲仰을 알아서 소리를 찾아 고통에서 구제하시니 곧 14가지 두려움을 없는 것이 이것이다.

 

③ 일귀

이렇게 하여 홀연히 세간과 출세간을 초월하여 시방이 圓明하여 두 가지 수승한 부처님의 경계를 얻었으니, 첫째는 위로 시방제불의 본래부터 묘하게 깨어 있는 마음(本妙覺心)에 합하여 부처님으로 더불어 자비의 묘력이 동일하게 되고, 둘째는 아래로 시방의 일체 육도중생의 마음에 합하여 여러 중생으로 더불어 슬픔(悲心)과 소망이 같아졌습니다.

 

➃ 전종식

홀연히 세간과 출세간을 초월하여 시방이 원만하게 밝아져 두 가지 수승함을 얻었으니, 첫째는 위로 시방에 모든 부처님의 본래의 妙覺心에 합해서 부처님과 더불어 여래의 자애로운 힘(慈心)과 같아진 것이고, 둘째는 아래로 시방의 일체 육도중생과 합해서 모든 중생과 더불어 슬픔(悲心)과 소망이 같아진 것입니다.

 

➄ 선화상인

이 적멸이 현전할 때 갑자기 이 유정세계와 기세간을 초월하였다. 이때 시방세계와 모두 서로 융통하고 원융무애 하여 두 종류의 수승한 경계를 얻었다. 첫 번째, 위로는 시방 제불의 본묘 각심과 서로 계합하여 시방여래의 자비심과 같아졌다. 두 번째, 아래로 시방의 모든 육도 중생과 서로 합하여 모든 중생과 같이 비앙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 悲心은 부처님에게 구하는 것이다.

 

⑥ 思坦

두 가지 수승함을 얻었다고 했는데 하나는 덕을 닦아 덕의 궁극과 만났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본성으로 갖춘 덕과 하나로 만났다는 뜻이다. 자애의 힘이 여래와 동일하게 된다는 것은 덕을 닦아 32응신을 갖추게 되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슬픔으로 우러르는 일이 중생과 동일하게 된다는 것은 본성으로 갖춘 덕에 14가지 두려움이 없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자비라고 하면 실상과 그대로 통하는 말이지만 여기에서 따로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말한 것은 32응신으로 법을 설하여 즐거움을 준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애의 힘이라 했다. 14가지 두려움이 없음은 중생의 고통을 구원해주는 일이다. 고통이란 슬픔의 경계로서 부처에게 기대고 우러러봄으로써 구원을 바란다. 그래서 슬픔으로 우러러본다고 한 것이다. 나에게 슬픔의 경계가 있다면 두루 완전하게 통한 부처에 의지하고 우러러봄으로써 그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중생 또한 마찬가지라야 하므로 슬픔으로 우러러본다고 한 것이다.

 

⑦ 靈耀

홀연히 세간과 출세간을 벗어났다는 것은 적멸의 차원에 대한 설명이다. 이를 위해 먼저 양쪽을 부정하고, 다음으로 양쪽을 긍정한다. 세간은 속제이고 출세간은 진제이다. 이 둘을 벗어났으므로 중도가 아닐 수 없다. 후세의 해석자들은 이것이 空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 중도의 바른 뜻을 상실하고 말았다. 시방의 모든 것이 남김없이 밝게 되었다는 것은 양쪽을 긍정하는 말이다. 남김없이 밝은 것이 중도의 본체이다. 그러므로 양쪽을 모두 긍정하여 두 가지의 수승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보살은 본체에 깊고 실천의 자취 또한 크다. 이 차원에서는 등각보살이 위로는 여래의 본래 오묘한 깨달음의 마음에 합치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본래 갖추고 있는 오묘하게 깨달은 마음이다. 자비로움은 즐거움을 선사하여 아래로 32가지로 상대를 하니 모든 것이 즐거움을 선사하는 일이 된다. 또한 그 보살의 지위에 있으므로 중생들과 함께 슬퍼하고 우러러볼 수 있는 것이다. 슬퍼함이란 고통에 슬퍼한다는 뜻이다. 우러러본다는 것은 자비로운 부처를 우러러본다는 뜻이다. 위대한 성인은 자아가 없으므로 중생들이 근심하기 전에 근심한다. 그러나 슬퍼한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중생의 차원에서는 괴롭고 번뇌하므로 슬픔이 생긴다. 보살의 차원에서는 고통을 뽑아주기 위해 슬픔이 일어난다. 또한 중생은 보살을 우러러 그에 의지하고, 보살은 법신을 우러러 지향한다.

 

⑧ 惟則

수행에 있어서 시방법계에 실체가 없음을 깨닫지 못했다면 어떻게 세간과 출세간의 초월을 깨달음의 과보로 받을 수 있겠는가? 수행에 있어서 모든 것이 이대로 완전히 갖추어져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면 어떻게 위로 모든 부처님과 하나로 만나고 아래로 모든 중생들과 하나로 만날 수 있겠는가? 자애의 힘과 하나가 되었으므로 나의 몸을 32응신으로 성취하여 모든 국토에 들어가 시방법계에 두루한 몸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슬픔으로 우러르는 중생과 하나가 되었으므로 중생들로 하여금 나의 몸과 마음에서 14가지 두려움 없는 공덕을 얻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⑨ 通理

본체가 완전히 드러나면 큰 활용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래서 세간과 출세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正脈의 말을 보자. 초월이란 묶인 끈에서 풀려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장애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 할 수도 있다. 적멸한 본체는 본래 있는 이대로 완전히 밝은 것이다. 다만 범부는 자아에 집착하므로 세간에서 막히게 된다. 법에 집착하므로 출세간에 막히게 된다. 이로 인해 초월할 수 없게 되는 것이며, 두루 밝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6가지 구속이 해소되어 자아가 공하고, 법이 공하며, 공하다는 그것조차 공함을 알게 되었다. 세간과 출세간의 법이 장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초월한다고 말하였다. 그 일이 갑자기 일어난다고 했는데, 적멸이 바르게 나타날 때가 바로 세간과 출세간을 초월하는 일로서 다시 애써 노력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시방의 모든 법이 또한 그러하다. 두루 밝다는 것은 둘로 나누는 일 없이 밝게 비추어 세간과 출세간을 벗어나게 되면 시방의 모든 법이 한 결 같이 자성의 광명으로서 두루 펼쳐져 있고 완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옛 선지식들이 모든 대지가 자기의 광명이라 한 것이며, 어떤 한 법과 광명 속에 있지 않은 것 없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위로는 모든 부처님과 한 몸이 되고 아래로는 중생들과 뿌리를 함께 하게 된다. 그러므로 두 가지 수승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두 가지는 바로 다음에 설명하는 바이고, 수승하다는 것은 방편이나 소승이 미칠 수 없는 자리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수승함을 전체 제목으로 말하고 다음에 따로 나누어 설명하게 될 것이다.

첫째, 출세간을 초월하게 되면 출세간의 법이 장애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위로 부처의 마음과 하나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원인이 결과의 바다를 포함한다는 말이 된다. 부처의 마음은 본래의 오묘한 깨달음과 하나로 만나 있다. 그런데 여섯 가지 번뇌로 인해 본래 저절로 그러한 오묘한 깨달음과 연결되지 못한 것이다. 미혹한 중생의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항상 밝아 본래 이대로 깨달아 있다. 그러므로 결과는 원인으로 근원에 맞닿아 있다. 여래와 자애의 힘을 함께 한다는 것은 부처와 중생이 본래 한 몸이므로 중생으로 인해 같은 몸으로 느끼는 자애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보살은 여러 부처와 한 몸이다. 그래서 모든 부처를 따라서 그 한 몸으로서의 활용을 드러낸다.

둘째, 세간을 초월하므로 세간의 법이 장애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아래로 중생의 마음과 하나로 합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장에서 중생의 마음이라 하지 않은 것은 위에서 부처의 마음과 그와 같이 합하였다는 문장이 있으므로 동일한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생과 슬픔과 우러름이 같다는 것은 중생과 부처의 뿌리가 같아 부처를 우러르며 그 뿌리를 같이 하는 슬픔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보살과 중생은 뿌리를 같이 하므로 중생을 위해 같은 뿌리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있다는 뜻이다.

⑩ 劉道開

깨달음의 원인으로서의 수행이 완전해지면 결과로서의 활용이 일어난다. 무명을 단번에 끊고 진리를 단번에 깨닫는 때이다. 찰나 사이에 홀연히 세간을 벗어나 세간의 있음에 속박되지 않게 되며, 출세간을 벗어나 공의 경계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적조하여 공에 휩싸여 시방세계가 두루 밝을 뿐이다. 그리하여 두 가지의 수승한 공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첫째는 위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본래 오묘한 깨달음의 마음에 합치된다. 부처님과 본체가 같기 때문이다. 또한 여래와 자애의 힘이 같다고 했는데 그것은 부처와 활용이 같기 때문이다. 대체로 본래의 오묘한 깨달은 마음은 사람들이 모두 같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닫기만 하면 위로 부처의 마음과 합치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아래로 시방의 육도중생들과 합치된다. 중생과 그 슬프게 우러르는 일이 같기 때문이다. 대체로 보살이 깨달은 것은 중생들과 동일한 천품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이는 중생들과 근심걱정을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간곡하여 빠지는 일이 없는 것이다. 두 가지 수승함을 얻었다는 것은 이와 같은 뜻이다.

 

2) 제가의 설 요점

이운허는 자비의 悲仰, 즉 아래로 중생과 합치되는 일에 대해서만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일귀, 전종식은 이에 대해 별다른 해석을 내놓지 않고 문장을 번역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고 있다.

이에 비해 개운화상은 六結이 해소되어 감각기관과 대상이 원융무애하게 된 결과 두 가지 수승함을 얻게 되었음을 먼저 확인한다. 그런 뒤 구체적으로 두 가지 수승함의 내용에 대한 해석을 내놓는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뒤에서 서술하게 될 32應身과 14無畏에 대한 언급으로 이어진다. 선화상인 역시 기본적으로 개운화상과 비슷한 해석을 하고 있다.

思坦이 주장한 두 가지 수승함이란 첫째. 마음을 닦아 본성인 진여와 만났다는 뜻이고, 둘째. 부처와 중생이 하나가 되어 중생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여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思坦은 개운화상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수승함의 내용이 32應身과 14無畏가 될 수밖에 없음을 기술하고 있다.

靈耀는 세간과 출세간의 양변을 다 부정하게 되면 즉 부정에 부정을 가하면 긍정이 된다는 중도의 이치로 초월을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양변이 수승하여 空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중도의 본체이고 진제라는 것이다. 보살의 慈悲를 둘로 나누어 慈를 32응신, 悲를 14무외로 설명하는 것은 개운화상, 思坦 등의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

惟則은 眞空妙有의 도리로 세간, 출세간의 초월을 설명하고 있다. 자비를 둘로 나누어 32응신, 14무외로 설명하는 것은 개운화상, 思坦, 靈耀 등과 같다.

通理는 논리적인 문장으로 앞에서 일어난 六結의 해소와 세간ㆍ출세간의 초월이 긴밀하게 연결된 것임을 설명한다. 또한 전체 문장을 상호연관의 관계로 설명한다. 특히 출세간 초월을 부처와 하나로 만나는 일에 연결하고, 세간 초월을 중생과 하나로 만나는 일에 연결하여 그 因果同時를 설명하는 부분은 다른 해석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논리력을 보여주고 있다.

劉道開는 본체(體)와 활용(用)의 문제로 이 문장을 해석하고자 한다. 그래서 부처님과 하나로 만나는 일은 본체가 같기 때문이라 보고, 여래의 자애의 힘이 나타나는 것은 부처와 활용이 같기 때문이라 보았다. 悲仰에 대한 해석 역시 동일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보살과 중생이 동일한 천품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중생과 함께 한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體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중생들과 근심걱정을 함께 한다는 것은 用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通理가 ‘본체가 완전히 드러나면 큰 활용이 저절로 일어난다’는 말로 이 구절을 개관하고 있지만, 그 體用적 해석의 치밀함에 있어서 劉道開가 보다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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