耳根圓通 법문의 시작

창민 스님(불교학박사. 중앙승가강원 사교과 교수)
창민 스님(불교학박사. 중앙승가강원 사교과 교수)

 

Ⅱ. 耳根圓通 법문의 시작

 

1. 觀音과 聞思修

 

본 장에서는 능엄경(제6권)을 분단하여 각 문단별로 원문과 번역문(이운허)을 제시하고, 그 대체적 내용을 개관하며, 해당구절에 대한 다양한 해설을 살펴본 뒤 그 특징과 의의에 대해 고찰하는 순으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爾時,觀世音菩薩, 卽從座起,頂禮佛足, 而白佛言, 世尊! 憶念我昔無數恒河沙劫,於時有佛出現於世, 名觀世音,我於彼佛發菩提心,彼佛敎我從聞思修, 入三摩地.

 

이때 觀世音菩薩이 자리에서 일어나 佛의 발에 頂禮하고 佛께 사뢰었다. “世尊이시여, 제가 생각하니, 옛적 수없는 恒河沙劫 前에 佛이 世上에 나시니 이름이 觀世音이시라, 저는 그 佛에게서 菩提心을 發하였더니, 그 佛이 저를 가르치사 聞, 思, 修로 조차 三摩地에 들라 하시었나이다.”

 

耳根圓通의 도리에 대한 본격적 설법을 시작하는 부분으로서 관세음보살이 과거세에 관세음 부처에게 귀의하여 聞, 思, 修의 법문을 듣게 되었음을 밝히는 내용이다. 이 중 관세음보살의 觀音은 이근원통의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는 표현이며, 聞, 思, 修는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제가의 설을 살펴보고 그 의미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1-1. 觀音

관세음보살의 관음이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자성의 지극한 지혜를 통하여 관해 보면 자성과 소리가 하나가 되어 ‘나’라는 존재도 없고, 듣는 ‘나’도 없게 된다는 의미이다. ‘나’가 없다는 것은 중생 속에 ‘나’가 있고 ‘나’ 속에 중생이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 속에 ‘나’를 비추어보고 ‘나’ 속에서 중생을 비추어 봄으로서 이것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었을 때 그 비춤을 버리고 비추는 그 자체를 ‘昭昭靈靈’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또 이것을 다른 말로 비추어 아는 것이 ‘回光返照’의 수행이고 ‘反聞聞性’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곧 ‘耳根圓通’이라 하고 ‘觀音法門’이라 하며 일명 ‘觀音禪’이라고도 한다. 이에 비해 중생의 소리를 듣고 이에 응신으로 나타나는 구원의 주체를 관세음이라 한다는 보편적인 설도 여전히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한 제가의 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가의 설

① 이운허

[觀世音菩薩] 觀音. 觀世自在. 觀自在. 光世音이라고도 한다. 法華經에는 '如來가 말하시기를 苦惱衆生이 一心으로 稱名하면 菩薩이 卽時에 그 音聲을 觀하고, 모두 解脫을 얻게 하므로 觀世音이라 한다' 하였고, 이 經에는 菩薩이 自釋하기를 '나의 觀聽이 十方에 圓明하므로 觀世音이란 이름이 十方世界에 가득하다' 하였다. [菩提心] 三心 四願에 不外하니, 一은 深心이니 煩惱無盡誓願斷, 法門無量誓願學이요, 二는 悲心이니 衆生無邊誓願度요, 三은 直心이니 佛道無上誓願成이라. 起信論에는 第一 直心은 眞如를 正念함이요, 第二 深心은 無量한 善法을 廣修함이요, 第三 悲心은 無量한 衆生을 濟度함이라 하였다.

 

② 개운화상

소리를 관한다고 한 것은 지혜로 비추어 보는 것이지, 귀의 의식으로 듣는 것이 아니니 ‘흐름에 들어갔으되 처소가 없다’는 것이 곧 지혜로 관하는 것이요, 귀로 듣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③ 일귀

관음이란 세상의 말과 소리를 관하여 圓悟하고 圓應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호칭이다. 소리를 관한다고 한 것은 관하는 지혜로 비추어 보는 것이지 耳識으로 이를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觀하는 흐름에 들어 대상(所)을 벗어났다’고 했으니 이는 바로 지혜의 觀으로 보는 것이지 분별의 識으로 듣는 것이 아님을 가히 알았으리라. 스승으로 삼은 부처님 또한 이름이 관음이라고 한 것은 인과가 서로 부합하고 고금이 하나로 통함을 밝힌 것이다.

 

➃ 전종식

듣고 본다는 것이 耳識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心智로 말과 소리를 듣고 알고 응하는 것이다.

 

➄ 선화상인

觀이란 관찰하는 것을 뜻한다. ‘능히 관찰 할 수 있는 지혜(能觀之智)’로써 ‘관찰하는 경계(所觀之境)’를 관찰하는 것이다. ‘능히 관찰 할 수 있는 지혜(能觀之智)’란 관세음보살이 자성 속에 갖추고 있는 지혜이며, ‘관찰되는 경계(所觀之境)’란 모든 중생의 음성을 말한다.

 

⑥ 懷遠

본다(觀)는 것은 세 가지를 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관세음은 세 가지 세간(三種世間)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오묘한 지혜로 보면 空, 假, 中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주체와 대상을 보는 지혜라는 뜻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천태대사는 이에 대해 주체와 대상이 둘 아닌 것으로 융합되어 있고, 있음과 없음이 함께 드러난다. 바른 자성을 남김없이 비추고, 그 본질과 현상을 살펴본다. 그래서 관세음이라 이름 하는 것이라 했다.

⑦ 錢謙益

인도에서는 ‘阿耶婆吉低輪(avalokiteśvara)'라 하고 한어로는 觀世音이라 한다. 주체와 대상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고, 있음과 없음이 함께 드러난다. 본래의 자성을 끝까지 관조하여 그 본질과 현상을 살피므로 觀이라 했다. 世音이란 보는 대상경계를 가리킨다. 만 가지 형상이 변화하여 서로 다르게 구별되며 다양하게 불린다. 그것은 모두 다양한 고통을 벗어나게 하는데, 보살은 큰 자비로 같은 시기에 두루 구원하므로 觀世音이라 한다. …… 혹 觀自在라고도 하는데, 옛 번역에서는 光世音, 혹은 自在라고도 했다.「천수안대비경」에 觀世音自在라 하였는데 그 뜻이 충분할 듯하다. 그런데 대상을 보는 지혜를 가지고 볼 때 밝게 감응하므로 관세음의 3글자로 그 뜻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⑧ 通理

범어로 ‘阿耶婆吉低輪(avalokiteśvara)' 한어로 觀世音이라 하는데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소리를 관찰하여 괴로움을 구원해준다는 뜻. 둘째, 소리를 관찰하여 돌이켜 듣는다는 뜻이다. 소리를 관찰하여 괴로움을 구원해준다는 뜻은 무엇인가? 법화경ㆍ보문품에 부처님이 無盡意보살에게 대답한 내용이 있다. 만약 중생이 고뇌에 빠져 한 마음으로 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그 즉시 그 음성을 관하여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찰의 주체는 귀의 감각기관(耳根)이고, 관찰의 대상은 세간에서 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부처의 결과를 이루어 타인을 이롭게 한다는 측면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소리를 관찰하여 돌이켜 듣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圓通文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귀의 감각기관을 따라 흐름에 들어가 삼매를 얻었다. 그때 부처님이 모임 중에 나에게 관세음의 이름으로 수기를 내렸다. 이를 통해 世音이라는 것은 세간의 모든 음성을 두루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바르게 관찰할 때에는 그 소리의 대상을 좇아가지 않고, 그것을 일시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듣는 본성을 돌이켜 관찰한다는 뜻이다.

 

⑨ 靈耀

관세음의 觀은 보살에게 본래 있는 대광명장으로 비추어본다는 뜻이다. 世는 32응신으로 두루 나타난다는 뜻이다. 音은 걸림 없는 구변으로 설법한다는 뜻이다. 보살이 중도를 증득하고 본래 자성에 상응하였기 때문에 삼륜공적의 불가사의함으로 무궁한 중생을 교화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觀世音으로 합쳐서 부르면 완전하게 본래 성품에 상응한다는 뜻이다. 만약 觀과 世音으로 나누어 읽으면 보살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여 그들이 부르면 바로 감응한다는 뜻이 된다. 그 음성을 관찰하여 해탈을 얻게 된다고 하면 이 뜻이 된다. 만약 觀世와 音으로 나누어 읽으면 보살이 시방세계의 다양한 상황에 따라 설법을 한다는 뜻이다. 어떤 몸으로 제도를 얻고자 하면 바로 그 몸으로 설법한다는 말이 여기에 속한다. 이 두 가지는 자비로서 고통에서 구제해주는 상황을 가리킨다. 만약 觀音이라고만 부르면 보살이 처음에 부처님의 가르치는 음성을 듣고 마음에 들어가 관찰을 성취한다는 뜻이 된다. 이 때 觀은 주체적으로 보는 지혜를 가리키고, 音은 관찰의 대상경계를 가리킨다.

 

⑩ 曾鳳儀

완전하게 통하는데 있어서 귀의 감각기관이 최고로 좋다. 하나의 길로 깊이 들어가면 여섯 감각기관이 모두 분별없이 청정하다. 그것은 오로지 관세음이 깨달은 바로 극히 완전하고도 오묘한 것이다. 음성인데 듣는다고 하지 않고 본다고 한 것은 관찰의 지혜로 비춰본다는 뜻이다. 귀의 의식으로 듣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여섯 감각기관이 상호 활용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2) 제가의 설 요점

이운허는 고뇌하는 중생이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면 즉시에 그 음성을 관하고 모두 해탈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그 음성을 관하되 귀로 소리를 듣지 말고 마음의 지혜로 관하면, 그 소리가 일어나기 이전의 자성의 소리를 들음으로서 그 소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즉 ‘一味’를 맛보아야만 참 나를 알 수 있고 소리의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운화상, 일귀, 전종식 등은 모두가 현상계의 소리를 분별하는 귀로서 耳識에 기대지 말고 마음의 지혜로 觀하여 자성의 본성을 바로 직시하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그 소리와 내가 ‘一味’ 또는 둘이 아닌 자리 또 ‘昭昭靈靈’한 자리, 그리고 ‘空寂靈知’, 또는 삼라만상의 유정이나 무정이 불성 아닌 것이 없다는 등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선화상인은 ‘관찰되는 경계(所觀之境)’가 ‘모든 중생의 음성’이라고 하면서 그저 ‘관세음보살이 자성 속에 갖추고 있는 지혜’라고만 말하고 있다.

선화상인은 수행적 실천보다 논리적 정합성에 중시하여 이를 이해하고자 한다. ‘모든 중생의 음성’이란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천둥소리, 파도소리, 자연의 소리, 동물소리, 너와 나의 소리 등을 가리킨다. 삼라만상의 대상인 그 소리가 진동으로 울려 퍼지면 그때 耳識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통하여 깊이 듣는 것이다. 그 파동이 나와 하나가 되어 작용하면서, 내 안의 나가 그 대상과 둘이 아닌 하나가 되었을 때, 이것을 지혜의 눈으로 如如하게 직관으로 관조하는 것이다. 이 때 그 대상도 없고 나도 없는 이러한 상태 즉 둘이 아닌 하나의 상태가 된다. 이것을 본성 또는 불성의 작용이라 하고 관음의 내용이 된다.

懷遠은 觀音에 대해 현상을 보되 현상에 머물지 않고, 실상 없음을 보되 그 실상 없음에 머물지 않는다고 했다. 이름을 듣지만 이름에 미혹하지 않고, 형상을 보지만 형상에 빠지지 않는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경계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하였고, 이에 대해 천태대사는 주체와 대상이 둘 아닌 것으로 융합되어 있고, 있음과 없음이 함께 드러나며 바른 자성을 남김없이 비추고, 그 본질과 현상을 살펴본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삼장법사 현장은 소리의 현상에 머물지 않고, 그 대상이 실체가 없음에 머물지 않는다는 입장이 중도를 말함이고, 천태대사 역시 소리의 주체와 실상의 대상이 서로 같은 것이어서 돌이켜 본질과 현상이 중생의 一心이므로 이 자성을 모두 비추고 있다는 것 이것이 같은 중도의 입장을 말함이다.

錢謙益은 ‘관찰되는 경계(所觀之境)’란 모든 중생의 음성을 말한다고 하였는데, ‘능히 관찰 할 수 있는 지혜(能觀之智)’란 관세음보살이 자성 속에 갖추고 있는 지혜이며, ‘관찰되는 경계(所觀之境)’란 모든 중생의 음성을 말한다고 하였다.

通理, 靈耀는 소리를 알아듣는 이것과, 들을 줄 아는 이것을 함께 말하고 있다. 通理는 한자어로 觀世音이라는 말을 두 가지로 해석된다고 한다. 첫째, 소리를 관찰하여 괴로움을 구원해준다는 뜻이고(度他), 둘째, 소리를 관찰하여 돌이켜 듣는다는 뜻으로(自修) 해석하고 있다. 靈耀는 觀音이라고 부르면 이 때 觀은 주체적으로 보는 지혜를 가리키고, 音은 관찰의 대상경계를 가리킨다고 한다. 관음은 ‘소리를 알아듣는 이것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소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들리는 소리는 그 들음을 버리고 듣는 이것을 돌이켜 듣는 일이다. 듣는 소리에 대한 집중도 놓아버리고 아무것도 설함이 없는 들을 줄 아는 이것이 聞性으로 들어가면 이것과 소리는 저절로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回光返照’ 또는 ‘反聞聞性’이라 한다.

曾鳳儀는 완전하게 통하는데 있어서 귀의 감각기관이 최고라는 것은 귀의 의식으로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관찰의 지혜로 비춰 아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면 여섯 감각기관이 모두 귀의 감각기관과 같이 하나로 상호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므로 耳根이 으뜸이라는 것이다.

 

1-2. 聞思修

聞思修는 관음법문을 듣고(聞), 이에 대해 사유하고(思), 도리에 따라 닦는다(修)는 뜻이다. 이에 대한 제가의 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가의 설

① 이운허

[聞․思․修로 조차 三摩地에 들라] 通常의 解釋은 보고 듣고서 얻는 지혜는 聞慧요, 考察하여 얻는 지혜는 思慧요, 고찰을 마치고 定에 들어 修得하는 지혜는 修慧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聞은 耳根中의 聞性이니, 無分別한 如如의 智와 理가 體가 되고, 思는 空과 有에 不着하고 한결같이 反聞하여 外로 聲塵을 脫하고 內로 理智에 冥合하니, 在禪하여 靜習하는 功夫요, 修는 萬行을 通達하여 이 禪觀과 違背하지 아니 함이니, 이른바 咳ㆍ唾ㆍ掉ㆍ背에 定하지 아니하는 때가 없음이라 하였다.

 

② 일귀

聞思修(三慧)는 청정한 無分別性의 가르침을 들음으로 해서 얻어지는 지혜가 聞慧이고, 들었던 가르침을 回光返照하여 空有에 떨어지지 않고 願을 세우는 것이 思慧이며, 이러한 서원을 일상의 삶속에 실천함으로써 얻어지는 지혜가 修慧이다.

 

③ 전종식

聞思修의 聞慧는 무분별의 청정한 가르침을 듣는 지혜이고, 思慧는 들은 가르침을 正念으로 사유하여 願을 세우는 지혜이며, 修慧는 세운 誓願을 일상생활 속에서 닦아 실천하는 지혜를 말한다.

 

➃ 선화상인

聞思修의 聞이란 일종의 듣는 지혜이며, 思란 생각하는 지혜, 思念하는 지혜이다. 이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제6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요히 사고하는 (靜慮)’것을 뜻한다.

 

⑤ 智旭

聞思修는 일반적으로는 3가지 지혜로 해석되지만 여기에서는 약간 다르다. 듣는 감각기관을 관찰의 대상경계로 삼아(聞), 이것을 사유하고(思), 닦고(修) 익혀서 삼매에 들어가는 일을 가리킨다.

 

⑥ 惟則

溫陵道昉은 이에 대해, 귀에 도달하는 것이 들음(聞)이고, 마음에 담는 것이 사유(思)이며, 닦고 익히는 것을 닦음(修)이라 한다고 했다.

 

⑦ 元賢

聞思修는 도에 들어가는 큰 길이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3가지 지혜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뜻은 전혀 다르다. 듣는 지혜(聞慧)란 귀의 감각기관의 듣는 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소리를 따라가며 분별 구분하는 들음이라는 뜻이 아니다. 사유하는 지혜(思慧)란 이 듣는 본성을 돌이켜본다는 뜻이다. 닦는 지혜(修慧)란 공부에 조작이 없다는 뜻으로서, 번뇌에서 벗어나려 조작하지 않지만 그것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미혹을 끊으려 조작하지 않지만 그것을 끊는 일을 가리킨다.

 

⑧ 劉道開

듣는다(聞)는 것은 귀의 감각기관의 듣는 본성을 따르라는 뜻이다. 그것은 많이 듣는다는 뜻의 들음이 아니다. 경전을 듣고 그 뜻을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다. 귀의 의식이나 귀의 시스템이 갖추고 있는 의식을 쓴다는 뜻도 아니다. 사유한다는 것은(思)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 바른 사유를 가리킨다. 일반적 사유나 선악을 생각하는 삿된 사유를 가리키지 않는다. 닦는다(修)는 것은 조작함이 없는 바른 닦음을 뜻한다.

 

⑨ 溥畹

聞思修를 따라 삼매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가르침의 본체가 소리를 듣는데 있기 때문이다. 들음(聞)이란 듣는 지혜(聞慧)를 가리킨다. 자신의 귀로 돌이켜 듣는다는 뜻으로서 소리의 생성과 소멸에 따라 분별을 내지 않는 일을 가리킨다. 오직 그 흐름을 거슬러 가서 자기의 본성을 돌이켜 듣는 것이다. 들음이 없음을 듣는 것이 진정한 들음인 것이다. 사유함(思)이란 사유의 지혜(思慧)를 가리킨다. 밖으로 대상경계를 따라가며 생각하지 않고, 안으로 감각기관을 따라 생각하지 않으며, 그 중에 분별적 사유를 하지 않는 것이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전체가 있는 그대로 모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생각 없음을 사유하는 바른 사유인 것이다. 닦음(修)이란 닦는 지혜(修慧)를 가리킨다. 여러 생애에 누적된 허망한 습기를 갈고 닦으며, 이름과 언어의 종자를 깨끗이 씻어내는 일이다. 이를 통해 미혹함이 깨달음이 되고, 망념이 진념이 되는 것이다. 닦음 없음을 닦는 것이며, 실체 없는 자성을 닦는 일이다.

 

2) 제가의 설 요점

위의 해석들을 다시 들음(聞), 사유함(思), 닦음(修)으로 나누어 그 이해의 경향성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들음(聞)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 들을 聞자에 착안하여 외적인 소리를 듣는다는 해석을 내리는 경우가 있고, 둘째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듣는 일 자체를 돌이켜 밝게 알아차린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우선 일귀, 전종식, 선화상인 등은 들음의 대상을 소리로 상정한다. 일귀는 ‘청정한 無分別性의 가르침을 들음’이라 했고, 전종식 역시 ‘무분별의 청정한 가르침을 듣는 지혜’라 하여 일귀와 완전히 동일한 해석을 가져오고 있다. 선화상인 역시 소리를 대상으로 듣는 일이라 해석한다. 惟則이 인용한 溫陵道昉 역시 ‘귀에 도달하는 것이 들음(聞)’이라 하여 소리를 듣는 일이라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 해석에도 자주 나타나고 있는데, 분별없는 청정한 지혜에서 나오는 가르침을 들음(聞)으로서 분별없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 이에 비해 들음(聞)을 소리라는 대상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듣는 일 자체를 돌이켜 비춰보는 일이라 해석하는 갈래가 있다.

이것을 智旭은 ‘듣는 감각기관을 관찰의 대상경계로 삼는다’고 표현했고, 이운허는 ‘耳根中의 聞性’이라 해석하였으며, 元賢은 ‘귀의 감각기관이 듣는 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소리를 따라가며 분별 구분하는 들음이라는 뜻이 아니다’고 하였다.

또 劉道開는 ‘귀의 감각기관의 듣는 본성을 따르라는 뜻이지, 많이 듣는다는 뜻의 들음이 아니다. 경전을 듣고 그 뜻을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다’ 등으로 표현하였다.

溥畹 역시 같은 차원에서 들음을 ‘자신의 귀로 돌이켜 듣는다는 뜻으로서 소리의 생성과 소멸에 따라 분별을 내지 않는 일을 가리킨다. 오직 그 흐름을 거슬러 가서 자기의 본성을 돌이켜 듣는 것이다.’고 해석하였다. 위의 사유함(思)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 聞→思→修의 차제관계로 보는 해석이 그 하나이고, 둘째, 聞=思=修로 보는 해석이 다른 하나이다.

일귀와 전종식은 사유함을 해석하기 위해 먼저 들음(聞)을 가져온다. ‘들은 가르침을 正念으로 사유하여 원을 세운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귀와 전종식은 입장을 같이 한다. 智旭 역시 ‘들은 이것을 사유한다(思)’고 하여 들음과 사유함과 닦음을 순차적 관계로 해석하고 있다. 惟則이 인용한 溫陵道昉 역시 ‘귀에 도달하는 것이 들음(聞)이고, 마음에 담는 것이 사유(思)이며, 닦고 익히는 것을 닦음(修)’이라 하여 문사수를 차제관계로 해석하였다. 전체적으로 이들은 듣고, 그것을 사유하고, 다시 그 사유하는 내용을 실천에 옮긴다는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聞=思=修의 입장을 취하는 해석들이 있다. 이운허는 ‘空과 有에 不着하고 한결같이 反聞하여 外로 聲塵을 脫하고 內로 理智에 冥合함’으로 思를 해석하였는데, 이것은 ‘無分別한 如如의 智와 理가 體가 된다’고 본 聞의 해석과 내용적으로 같은 차원에 있다.

선화상인은 思를 생각하는 智慧로 보면서도 제6식 차원의 생각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역시 분별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듣는 자성을 돌이켜보는 일과 같은 차원에 있다.

元賢은 ‘사유하는 지혜(思慧)란 이 듣는 본성을 돌이켜본다는 뜻’이라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듣는 자성을 돌이켜 비추어본다는 뜻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聞=思의 관계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劉道開 역시 ‘사유한다는 것은(思)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 바른 사유를 가리킨다. 일반적 사유나 선악을 생각하는 삿된 사유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하여 무분별의 실천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聞이나 修에 대한 해석과 다를 바 없다. 닦음(修)에 대한 해석 역시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우선 문사수를 순차적 관계로 본 입장에서는 닦음의 모양과 내용을 설정한다. 사유의 차원에서 서원을 세우고, ‘그 세운 誓願을 일상생활 속에서 닦아 실천하는 일’이 닦음이라는 전종식의 해석이 그러하다. 일귀, 智旭, 溫陵道昉 등이 이와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음으로 문사수를 동일한 차원의 다른 표현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있다. 듣는 일, 사유하는 일, 닦는 일을 한 결 같이 무분별지를 실천하는 일로 설명한 것이다. 이 경우 들음과 사유와 닦음에 순차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元賢은 닦는 지혜(修慧)를 설명하면서 ‘공부에 조작이 없다는 뜻으로서, 번뇌에서 벗어나려 조작하지 않지만 그것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미혹을 끊으려 조작하지 않지만 그것을 끊는 일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번뇌와 깨달음을 둘로 나누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분별지의 자리에 곧바로 이르는 聞, 思의 차원과 같다. 이운허, 劉道開, 溥畹도 聞=思=修의 입장에서 닦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두 말은 사실은 서로 같은 말을 다른 측면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객관적으로 설명하자면 문사수는 차제관계로 설명되지만, 직접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각 단계마다, 각 찰나마다 문사수가 함께 일어나야 한다.

2. 入流亡所와 動靜二相不生

 

初於聞中 入流亡所, 所入旣寂, 動靜二相 了然不生.

처음에 聞中에서 流에 들어가 所를 벗어나고, 所와 들어감이 이미 고요하매 動과 靜의 二相이 了然히 生하지 아니하며 ……

 

듣는 성품가운데 흐름에 따라 들어가니 소리의 대상(所)이 없어진다는 것은 聲塵의 지배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마음의 평정을 얻어 고요히 쉬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소리의 대상(所)과 들어감(入)이 이미 고요해진다(寂)는 것은 聞性에 들어가 주체와 대상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所와 入이 고요해지니, 움직임(動)과 조용함(靜)의 두 가지 모양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결국 聞性에 들어가면 生滅의 분별이 저절로 멈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1. 入流亡所

入流란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귀의 감각기관은 들려오는 소리를 찾아 밖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번뇌의 근원이다. 이러한 흐름을 돌이켜 흐름을 안으로 돌림으로써 자성을 비춰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돌이켜 듣기를 깊게 하고 回光返照하면 소리로 인한 장애가 모두 저절로 사라진다. 그러므로 흐름에 들어간다는 것은 본래 깨달음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고, 대상이 사라진다는 것은 소리로 인한 장애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제가의 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가의 설

① 이운허

流는 二意가 있으니, 一은 法流니 곧 聞性이라, [들어가]는 소리를 듣던 聞을 돌이켜서 自性을 反聞함이요, 二의 流는 흐른다(注)는 뜻이니 聞을 따라 소리로 가는 것은 外注니 이른바 出流요, 聞을 돌이켜 性을 照하는 것은 內注니 이른바 入流라. 두 解釋이 다 通하지마는, 亦是 一念이 不生하고 回光返照하여 專注하여 自性을 聞하며, 前의 妙境이 湛然하게 밝아서 잠깐도 間斷하지 않아야 하나니, 이것이 禪宗의 所謂 綿密功夫다. 所는 聲塵이요, 벗어나는 것은 脫이니 聞中에서 流에 들어가 所를 벗어나는 것은, 六結中의 第一 動結을 解脫함이다.

 

② 개운화상

자성을 돌이켜 들음이 ‘흐름에 들어간다’ 는 것이고 들어가되 들어간 곳을 알 수 없는 것이 ‘처소가 없다’ 는 것이니, …… ‘흐름에 들어갔으되 처소가 없다’는 것은 대상 물질인 소리를 따르지 않고 자성의 법 바다에 들어가서 들어간 곳이 없어진 것이다.

 

③ 일귀

처음 듣는 가운데 깊이 관조(空觀)하는 흐름에 들어 대상에서 벗어난다.(入流亡所)

 

➃ 전종식

먼저 듣는 가운데서 ‘듣는 흐름에 들어가(能)’ 듣는 경계(所)가 사라지니……

 

➄ 선화상인

돌이켜 자기의 자성을 들으면 처음에는 이 듣는 가운데서 聖人의 法性의 흐름에 들어가게 되며, 그러면 모든 바깥의 육근, 육진의 경계를 잊어버립니다. 이 육근과 육진의 근원이 이미 없어지고 끊어져서 자성의 흐름으로 들어가면 ……

 

⑥ 袾宏

흐름에 들어간다(入流)는 구절에 대해 해설이 다양하다. 그 흐름이 법성의 흐름을 가리킨다는 설, 생사의 욕망의 흐름이라는 설, 등류심을 가리킨다는 설, 사람들이 흐름에 따라 밖으로 나온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이제 이 흐름을 되돌려 들어가는 것인데, 그 흐름을 되돌리는 것이 자성을 돌이켜 듣는 일과 흡사한 것이다. 그런데 앞의 게송에 흐름에 들어가 정각을 성취한다는 구절이 있으므로 그것이 법성의 흐름에 들어감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법성을 가지고 소리의 대상경계를 상대함으로써 소리의 대상경계에 말려들지 않고 법의 성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흐름을 되돌린다는 뜻이므로 여기에서는 법성의 흐름에 대해 말한 첫 번째 설을 따르기로 한다.

 

⑦ 智旭

들어간다(入)는 글자는 그 능동적으로 보는 주체의 지혜를 가리킨다. 중생들은 소리를 따라 돌고 돌므로 의도적으로 등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등지게(法)된다. 이것을 나간다(出)고 말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자성을 돌이켜 들음으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법에 합치된다. 이것을 들어간다(入)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음에 망념을 멈추고 자성을 돌이켜보는 三止三觀법이 이에 해당한다. 흐름(流)이라는 것은 그것이 드러내는 진리를 설명한다. 다음의 문장에 이것은 남김없이(圓) 진실하고, 이것은 두루(通) 진실하며, 이것은 언제나(常) 진실하다고 했다. 바로 자성의 진실한 흐름을 가리킨다. 이 완전하고, 두루 하며, 항상적인 성품은 변함이 없으나 인연을 따르고, 인연을 따르나 변함이 없다. 그래서 흐름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오염된 인연을 따르면 그 흐름이 불완전한 아홉 세계(九界)를 형성하고, 만약 청정한 인연을 따르면 그 흐름이 불세계를 이룬다. 아홉 세계는 생사의 흐름이라 하고, 불세계는 열반의 흐름이라 한다. …… 대상이 사라진다(亡所)고 했는데 여기에서 사라진다(亡)는 것은 전체적으로 탁한 흐름을 가라앉혀 맑게 하며, 허망한 번뇌의 속박을 푸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상(所)이라는 글자는 耳根의 입구에 다섯 겹의 혼탁(五疊混濁)함이 겹쳐 형성된 허망한 속박의 뿌리로서 이것이 미혹하여 법과 등질 때에는 이 진정한 흐름의 이치가 허망한 대상이 됨을 가리킨다. 그런데 밝게 깨닫게 되면 그 허망한 대상의 현상들이 진실한 흐름이 되므로 흐름에 들어가 대상을 잊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⑧ 劉道開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빛을 돌려 돌이켜 비추기를 오로지 하여 자성을 듣는데 이것을 흐름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대체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밖으로 달려 나가는 일을 흘러 나간다(出流)고 말한다. 돌이켜 듣고 성품을 비추는 것은 안으로 흘러드는 일이므로 흐름에 들어간다고 말한 것이다. 없어진다(亡)는 것은 벗어난다는 뜻이고, 대상은 대상이 되는 소리를 가리킨다. 안으로 돌이켜 자성을 듣게 되면 제반 대상이 되는 소리에 전혀 지배되지 않는다. 이것을 대상이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감각기관의 속박은 모두 대상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대상이 사라지면 속박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⑨ 溥畹

다만 그 생사를 일으키는 욕망의 흐름(生死欲流)을 거슬러 빛을 돌려 돌이켜 비춤으로서 자성을 들으면 흐름에 들어가 관음보살과 다르지 않게 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자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현상에 움직여 문득 듣는 작용을 일으켜 소리를 따라 흘러나가고 달려가는 것을 밖으로 나가 흐름을 따른다고 말한다. 만약 소리를 듣는 이 들음을 돌려 자기의 자성을 돌이켜 들을 수 있으면 안으로 들어가 흐름을 돌이킨다고 말한다. 흐름을 돌려 뿌리 끝까지 들어가면 생멸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만약 항상 이렇게 듣는 대상의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현상이 서로 간섭하지 않게 된다면 감각기관이 끌려 다니는 일이 없을 것이고, 그리하여 그 짝이 되는 대상으로서의 소리도 저절로 소멸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능동적으로 들어가는 감각기관이 흐름에 들어가니 감각기관이 고요해질 것이며, 들어가는 대상인 소리가 사라지니 현상이 고요해질 것이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모두 고요해지면 의식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2) 제가의 설 요점

위 해석의 핵심은 흐름에 들어감(入流), 대상이 사라짐(亡所)을 설명하는데 있다. 흐름에 들어갔다는 것은 대상의 차별적 소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듣는 이것을 돌이켜 보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대상으로서의 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은 외적인 소리에 지배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두 공부 상태에 대해 순차적 발전단계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흐름에 들어가는 일이 있은 뒤에야 대상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우선 흐름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 이운허는 흐름(流)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자성을 돌이켜 보는 일, 둘째 밖으로 흘러나가는 작용을 돌이켜 안으로 향하게 하는 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같은 일에 속한다. 이 흐름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별적 생각을 일으키는 일 없이 듣는 이 일을 밝게 비추어 보는 일 자체를 가리킨다.

智旭 역시 흐름을 자성의 흐름으로 해석하면서 이것이 흐르는 물과 같이 불변하는 본질과 인연에 따라 모양을 바꾸는 隨緣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설명함으로서 돌이켜 들어갈 자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비해 劉道開는 智旭 등과 관점을 같이 하면서도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밖으로 달려 나가는 일(出流)과 입류를 대비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溥畹은 入流를 자성을 듣는 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 제가의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出流를 ‘생사를 일으키는 욕망의 흐름을 따라가는 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본래 소리를 따라가는 이유는 그에 대해 시비호오의 판단과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모두 생사를 일으키는 욕망의 흐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개운화상 역시 흐름에 들어간다는 구절을 자성을 돌이켜 듣는 일로 설명한다. 일귀는 정맥소의 관점에 따라 깊이 관조하는 흐름에 드는 일로 설명하기도 하고, 계환해의 관점을 빌려 관법의 흐름에 드는 일로 설명하기도 한다. 모두 수행방법의 실천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전종식은 듣는 흐름에 들어가는 일을 能이라 해석하여 入流亡所 전체를 주관과 객관의 사라짐으로 설명한다. 전체적으로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능엄경에서 제창하는 관음설법의 핵심내용을 담고 있는 入流에 대한 요령 있는 해석이라 보기는 어렵다.

선화상인은 入流를 성인의 법성의 흐름에 들어감(入聖人之法性流)으로 설명하고 있다. 袾宏 역시 入流를 법성의 흐름에 들어감을 뜻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선화상인이 차례로 나열하고 있는 回光返照, 反聞聞性, 入聖人之法性流를 인과관계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병렬관계로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 의미의 분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원규의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자성을 듣는 일과 성인의 법성의 흐름에 들어가는 일을 인과관계로 번역하고 있다. ‘돌이켜 자기의 자성을 들으면 성인의 법성의 흐름에 들어가게 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선화상인 스스로 법성의 흐름에 들어가는 일을 ‘성인의 법성의 흐름’에 들어가는 일로 표현하여 결과를 강조하는 문투를 보여주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체적으로 反聞聞性과 入流를 동일하게 보고 있지만 선화상인은 反聞聞性의 결과 성인의 흐름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대상이 사라짐(亡所)에 대한 제가의 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운허나 개운화상은 대상이 되는 소리에 지배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았다. 특히 이운허는 이것을 動結을 벗어나는 일로 규정하였다. 소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았다는 뜻이 된다. 이운허가 이렇게 동결로부터의 벗어남을 강조한 것은 두 번째 단계인 靜結로부터의 벗어남과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動靜의 두 모양에 완전히 일어나지 않는 단계가 靜結을 벗어나는 일이라 설명하고 있으므로 亡所가 성취된 뒤에 動靜二相不生의 단계가 올 수 있다는 뜻이 강조된다.

袾宏은 入流를 대상경계에 말려들지 않는 길로 보는 경향이 있다. 소리라는 대상경계를 따라가게 될 때 법성을 돌이켜 살펴보는 것을 실천의 길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溥畹은 塵結이 사라진 뒤 根結이 사라진다는 전형적 논의를 수용하지 않는다. 入流가 철저해져서 뿌리까지 들어가면 塵結과 根結이 함께 해소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다만 이렇게 묶어서 설명하다 보니 根結의 해소를 塵結의 해소에 앞서는 것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어 교리적으로 주의를 요한다.

일귀와 전종식은 대상이 사라짐을 대상에서 벗어남, 혹은 듣는 경계가 사라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비해 선화상인은 밖의 대상이 되는 소리(聲塵)를 망각한다는 뜻으로 설명하였다. 다만 인용문에 표시한 바와 같이 정원규의 번역문에서는 대상이 되는 소리를 육근, 육진으로 옮겼는데 명백한 오류에 해당한다. 육진이 사라지는 경계와 육근에 지배되지 않는 단계는 엄연히 다른 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亡所는 動結에서 벗어나는 일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根結로부터의 해탈은 움직임에 지배되지 않는 차원, 고요하다는 관념에 지배되지 않는 차원을 넘어선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動→靜→根→覺→空→滅의 여섯 가지 생멸법이 소멸하는 해탈의 단계에서 육진이 사라지는 것은 2단계에 해당하고, 육근이 사라지는 것은 3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없어진다(亡)는 것은 벗어난다는 뜻이고, 대상은 대상이 되는 소리를 가리킨다. 안으로 돌이켜 자성을 듣게 되면 제반 대상이 되는 소리에 전혀 지배되지 않는다. 이것을 대상이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감각기관의 속박은 대상이 되는 현상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대상이 되는 현상이 사라지면 속박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劉道開 역시 육진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육근의 흔들림이 사라진다는 방식으로 이 차제를 수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智旭은 미혹함과 깨달음의 차이에 의해 이것을 설명한다. 즉 미혹하면 허망한 대상에 지배되고, 깨달으면 허망한 대상 자체가 법의 흐름이 된다는 것이다.

 

2-2. 動靜二相不生

위의 단계에서 대상으로서의 소리가 사라져 動結의 번뇌에서 벗어났다. 여기에서는 靜結의 해소를 말한다. 動靜二相不生은 所入旣寂과 함께 일어난다. 所入旣寂의 所는 위에서 말한 소리의 장애이고, 入은 위에서 말한 밖으로 나가는 흐름을 안으로 돌이켜 들어가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리로 인한 장애가 사라져도 역시 흐름을 안으로 향하게 하는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야 고요한 경계에 머물지 않을 수 있다. 所入旣寂의 旣寂은 動相과 靜相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여 動結과 靜結이 모두 해소되고 소리로 인한 장애가 모두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소리가 일어난다든가 소리가 일어나지 않는다든가 하는 구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므로 動靜二相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뒷 구절과 완전히 동일한 의미가 된다. 이에 대한 제가의 설은 다음과 같다.

 

1) 제가의 설

① 이운허

[所와 들어감이 이미 고요하매 動과 靜의 二相이 了然히 生하지 아니하며] 所인 聲塵과 들어감인 旋轉이, 이미 寂然하고는 靜相이 오히려 남아있나니, 이 靜相까지 了然히 生하지 않게 되면, 이는 靜結을 解脫함이다.

 

② 개운화상

음성이 움직이고 고요함을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들어간 곳이 이미 고요해지면 움직이고 고요함이 생겨나지 않으니라.

 

③ 일귀

대상과 흐름에 들어갔다는 것까지 고요해져서 動靜의 두 가지 상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初住)

 

➃ 전종식

能과 所가 이미 고요해져서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모습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이다.

 

➄ 선화상인

자성은 寂靜하여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가지 모습이 명백하게 생기지 않는다.

 

⑥ 智旭

한 마음은 완전하면서 다양한 모양으로 드러난다(圓妙). 여기에서 일어나는 집중과 관찰을 가지고 듣는 본성이 본래 완전하고, 본래 막힘없이 통하는 것이며, 본래 변함이 없는 것임을 곧바로 보는 것을 말한다. 귀의 감각기관이 만나게 되는 소리와 고요함의 두 장애가 본래 여래장의 오묘한 진여자성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면 소리의 장애도 생겨나지 않고 고요함의 구속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無生의 이치가 분명해지면 그것이 두 모양 중에 있는 것이지, 두 모양을 지우고 나서 무생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소리와 고요함의 두 모양이 완전히 생겨나지 않으면 밝음과 어두움, 통함과 막힘, 안정됨과 변화함, 통합과 분리, 생성과 소멸 등의 모양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겠는가?

 

⑦ 劉道開

위에서는 소리의 구속에서 풀려나는 일을 말했다. 여기에서는 움직이는 소리와 고요함의 두 구속을 함께 제거함을 말한다. 소리가 제거되면 조용함이 드러나는 것은 자연적 이치이다. 여기에 힘을 가해 이 둘을 함께 제거하는 것은 자연스런 형세이다. 대체로 법의 흐름에 들어가면 대상이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비록 대상이 소멸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소멸하기는 쉽지 않다. 또 처음에 법의 흐름에 들어간다고 말하였지만 흐름에 들어가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도록 힘을 쓰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소리와 고요함의 장애가 수시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마음 마음마다 수습하고 항복시키는 것은 진정한 고요함이 아니다. 여기에서 대상으로서의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모든 대상이 다 소멸하는 것이라야 한다. 흐름에 들어갔다는 것은 모든 흐름에 다 들어간 것이라야 한다. 모든 소리의 움직임이 다 고요해지고 수습하고 항복시키겠다는 생각 또한 사라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 대상이 사라지고 흐름에 들어가 두 가지가 모두 고요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상으로서의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이 움직이는 소리가 사라지는 일만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이것이 완전히 고요해지면 소리의 구속이 완전히 사라지고 고요함의 구속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완전히 고요해진 뒤 애써 공부하여 힘을 써야 한다. 돌이켜 듣는 공부를 갈수록 심화시켜 고요함 또한 소멸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 소리와 고요함의 두 장애를 시원하게 모두 벗게 되는 것이다.

 

⑧ 溥畹

소리에 지배되지 않게 되어 여섯 감각기관의 작용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면 소리의 움직임과 고요함이 완전히 일어나지 않게 된다. 또한 듣는 감각기관과 내적으로 들리는 소리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시방의 국토가 그 가운데 모두 현현하게 된다. 그리하여 깨달음과 깨달음의 내용이 공하게 되고 나아가 적멸이 현전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무생법인을 얻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바로 그 자리에서 훌쩍 뛰어넘어 두 가지 수승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소리와 고요함의 장애가 고요해지면 감각기관이 깃들일 바가 없게 된다. 감각기관이 사라지면 여섯 가지 작용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 장애가 고요해지면 국토가 밝고 밝아 유리로 된 세계와 같게 된다. 그 감각기관이 뽑혀지면 몸과 마음의 청정하여 명월의 구슬같게 된다. 그리하여 몸이나 마음이나 모두 상쾌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몸과 세계가 둘이 아니라 오직 하나로서 다양함을 포함하고 전체로서 완전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몸과 마음, 밖으로는 세계가 본래 저절로 그러한 한 마음일 뿐 다른 물건이 별도로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물과 무생물이 한 몸이며, 곳곳이 다 진여법계를 이루게 되니 크게 편안한 무상열반을 획득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⑨ 惟則

들어간 곳이란 위에서 말 한바 들어가게 된 흐름을 가리킨다. 이미 고요해진다는 것은 듣는 감각기관을 곧바로 따라 법성의 흐름에 들어가 본래 성품의 깨달음이 오묘하고 밝으며, 본래 깨달음이 밝고 오묘함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이것이 진정한 아란야로서 모든 것이 소멸한 도량이자 바른 수행의 자리인바 이것을 이미 고요해졌다고 말한다. …… 움직이는 소리와 고요함의 모양은 바로 소리의 장애이다. 움직이면 소리가 있고 움직이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 감각기관을 분명하게 작동하여 이것을 나누어 두 가지 번뇌의 모양으로 다루면 법의 실상을 알 수가 없다. …… 법성의 흐름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들어가 깊은 선정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나와 나의 상대를 잊고, 욕계의 소리로 인한 장애 등과 같은 모양과 이름이 말끔하게 사라져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2) 제가의 설 요점

대상이 되는 소리에 움직이면 動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고, 대상이 되는 소리에 움직이지 않게 된다 해도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자기의식을 내려놓지 못하면 靜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법성의 자리에 되돌아가면(入流) 대상이 되는 소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고(亡所), 들어갔다는 자기의식까지 사라지게 되면 動結과 靜結이 점차적으로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절에 대해 이운허의 해설은 정통교설에 입각하고 있다. 反聞聞性하여 聲塵에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動結을 소멸한 뒤, 다시 그러한 법성의 차원으로 들어가서 나가 있다는 생각까지 내려놓으면 靜結까지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운허는 靜結을 해탈한다고 표현했다.

개운화상은 所入旣寂과 動靜二相不生을 순차적 차원이 아니라 동일한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음성이 드러나는 원리를 움직임과 고요함의 상호작용(音聲, 由動靜顯)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개운화상은 動과 靜을 動結과 靜結로 본 것이 아니라 단순한 움직임과 고요함의 상대적 현상으로 본 것이다. 그런 뒤 反聞聞性하여 소리와 들어갔다는 자기의식조차 사라지면 動과 靜이 하나로 만나게 된다는 방식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고 있다.

다음으로 일귀가 말한 初住는 初地의 다른 표현이라 보아야 한다. 원래 3賢位의 첫 단계인 初住는 發心住로 불리며 10가지 믿는 마음을 닦는 단계이다. 대체로 그것은 四諦의 진리와 삼보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는 일을 포함하여 계정혜를 닦고, 사홍서원을 세우는 등 유위적 수행을 포함하는 단계이다. 그것은 動靜의 구속에서 벗어나 대상과 자아의식을 함께 소멸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일귀가 여기에서 말한 初住는 十地의 初地를 가리키는 말이라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선가에서 보통 말하는 十住는 十地의 다른 표현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초지는 歡喜地라고도 불리는데 그 핵심은 人空과 法空의 도리를 깨닫는데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動靜의 두 모양이 생기지 않는 일과 통한다.

전종식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돌이켜 자성을 살펴보는 일을 能으로 보고 聲塵을 所로 보아 전통적 能所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 능소가 사라져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모습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은 기본적으로는 성립하지만, 역시 六結의 점진적 소멸을 설명하는 능엄경의 맥락을 반영하는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한편 선화상인은 所入旣寂을 간단히 ‘자성의 적정함’으로 바꿔버린다. 이로 인해 전종식의 경우처럼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해설이 나오게 되지만, 역시 動結의 소멸에서 靜結의 소멸에 이르는 점진적 발전을 설명하는 능엄경의 맥락을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다.

智旭은 소리와 고요함의 상대되는 두 모양이 사라지는 단계를 不二中道의 이치로 설명한다. 그리하여 이 단계에서는 밝음과 어두움 등의 상대적 모양이 일어나지 않는 不二中道의 실천이 시작된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智旭의 능엄경 이해는 기본적으로 선적 체험에 바탕하고 있다. 특히 법성과 법상이 둘 아닌 이치(性相一如)에 대한 체험은 그의 전체 저서와 불교실천을 관통하는 힘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분명하지만 능엄경이 전달하고자 하는 단계적 공부에 대한 자세한 설명 대신 선적 원리를 표명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溥畹은 動結과 靜結에서 벗어나 소리의 움직임과 고요함이 완전히 일어나지 않게 되는 차원과 그 이후의 根結, 覺結, 空結, 滅結의 단계를 뒤섞어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動靜二相의 일어나지 않는 단계부터 무생법인을 얻는 일과 크게 구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역시 단계적 설명 대신 둘 아닌 이치를 강조하고자 하는 선적 관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智旭과 통하는 바가 있다.

惟則은 법성의 흐름에 들어가는 일, 소리와 고요함에 구속되지 않는 일을 모두 깊은 선정에서 나와 상대를 잊는 일로 설명하고 있다. 惟則은 염불과 참선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입장에서 모든 단계를 깊은 선정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결국 능엄경이 강조하는 단계적 차원을 모양과 이름이 말끔하게 사라진 선정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智旭, 溥畹과 동일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에 비해 劉道開는 動結에서 해방되었다고 만족하지 말고, 靜結에 묶이지 않도록 가행정진해야 하는 이치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요함이 드러나는 수승한 경계에 묶이지 않기 위해서는 머물지 않고 애써 앞으로 나아가는 정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계적 수행법을 설한 능엄경의 설법 의도를 충실하게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劉道開가 거사로서 불교를 연구한 학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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