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민 스님(중앙승가강원 사교과 교수)

Ⅰ. 서론

 

1. 연구 목적 및 범위

 

능엄경은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의 약칭인데 줄여서 대불정수능엄경, 수능엄경, 또는 능엄경이라 한다. 능엄경의 제목에 대한 뜻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大佛頂의 大란 여래장사상을 밝힌 것으로서 3가지 큼(大)를 말한다. 세가지 큼이란 體․相․用의 큼(大)을 말하며, 佛은 부처님의 三身(法身 · 報身 · 化身)을 말하며, 頂은 부처님의 정수리를 뜻하는 것으로서 최고의 깨달음인 위없는 바른 깨달음(無上正等覺)을 말한다.

如來密因이란 중생의 지견으로는 알 수 없는 여래의 비밀스러운 因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다라니’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修證了義란 수행에 있어서 닦되 닦는다는 마음이 없이 닦고, 증득하되 역시 증득했다는 마음이 없이 증득하는 참된 了義를 말한다. 諸菩薩萬行은 모든 보살이 萬行으로서 육바라밀과 三賢과 十地 등의 단계를 밟아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首楞嚴經의 首楞이란 일체의 모든 법이 究竟 아님이 없으며, 經은 모든 것의 준칙이 된다는 말이다.

이 능엄경은 인도 ‘나란타사’란 절에서 비밀리에 전수해 오면서 왕명으로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금지시켜 왔다고 한다. 그만큼 신비로운 비밀의 뜻을 담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이것이 중국에 전해진 것은 당 중종 신룡 원년(705)의 일로 알려져 있다. 인도의 승려 般刺密帝가 梵本을 가져와서 번역에 착수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다른 경전들이 전래된 뒤 마지막으로 중국에 들어온 것으로 이야기된다.

능엄경은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고에서 論하는 것은 제6권 耳根圓通章이다. 이근원통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수행체계에 대한 과정과 수행경계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耳根圓通章은 능엄경의 전체 핵심을 대변해 주는 최상승의 원통법문이며 그 깨달음을 제시하고 있다.

능엄경의 시작은 다문제일의 아난이 걸식을 하던 중 淫慾을 다스리지 못하고 마등가라는 음녀에게 유혹을 당하여 破戒할 직전에 구출되어 깨달음을 얻기까지 그 과정을 설명한 내용이다. 그 과정에 등장하는 주연인물이 아난과 문수보살이다. 부처님이 계신 자리에서 25인의 대보살들과 아라한이 각기 자신의 깨달음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 이근원통을 제외하고는 모두다 방편에 불과하고, 이근원통이 최고의 깨달음에 이르는 수승한 길이라고 입증을 하면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능엄경은 선과 교의 양종에서 모두 중시하는 경전으로서 불교의 수행에 대한 전면적인 지침을 보여주는 경전이다. 내용적으로 볼 때 그것은 선종, 정토종, 밀교, 율종 등에서 공히 중시하는 중요한 교리를 동시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능엄경은 수행을 닦아나가는데 있어서 發心→믿음(信)→논리적 눈뜸(解)→실천적 수행(行)→진정한 깨달음(證)의 확고한 지위점차를 세워 수행자들을 이끄는 수행지침서로서 그 역할을 하여 왔다.

그 중 耳根圓通章으로 불리는 제6권은 능엄경설법의 핵심 중 하나에 속한다. 이근원통장은 깨달음에 이르는 법문 중에서도 특히 수승한 길로 강조된다. 소리를 듣는 법문이라 불리는 觀音法門의 구체적 내용은 아난을 청법의 대상으로 하여 전개된다. 아난은 본래 법을 듣고 이해하는 데는 총명하였지만 직접 수행을 통한 삼매의 체험은 깊지 못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극복하고 진정한 삼매와 지혜를 얻기 위한 길로 관세음보살은 우선 聞ㆍ思ㆍ修를 통해 삼매(三摩地)에 들어가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다양한 수행의 방식과 차제를 통해 궁극적으로 수능엄 삼매에 들어 구경각을 성취하도록 하는 체계적인 수행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근원통에서는 眼, 耳, 鼻, 舌, 身, 意라고 하는 6근 중에 耳根을 집중적으로 닦아 본성을 깨달으면 나머지 5근이 하나로 만나게 되어 원통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耳根圓通의 수행방법은 외부의 소리를 따라가지 않고 내부의 소리를 듣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소리에 집중(觀)하는 단계가 있고, 다음에는 그 들음을 버리고 듣는 성품자체를 다시 돌이켜 듣는 단계가 있는데 이것을 反聞聞性이라 한다. 이것은 듣는 소리를 따라가기를 멈추고 그것을 듣는 자리를 돌이켜 관찰하는 길을 제시하는 바, 이것을 흔히 回光返照라고도 한다. 觀音은 외면의 소리가 아니라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수행법은 기타의 수행법에 비해 가장 圓通한 것임을 점차로 밝히고 있다.

과거ㆍ현재의 모든 부처님들이 오직 이근원통의 문을 통해 열반에 들었으며, 미래의 수행자들도 이근원통의 문을 통해야만 남김없이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耳根圓通法이 곧 觀音法門이라는 것이다. 관음수행자의 수행이 깊어지면 묘음, 관세음, 범음, 해조음 등의 ‘승피세간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즉 삼매의 초월된 상태에서 내면으로 흐르는 음류를 돌이켜 듣는 수행법이 反聞聞性이다. 이러한 소리의 흐름에서 그 묘음마저 떠난 無心의 경지에 이르러야 진정한 해탈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능엄경에서 제시한 관음수행법은 조사선, 간화선, 묵조선, 염불선 등 기타의 선법으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듣는 자성을 돌이켜 듣는 수행법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정토종의 염불선법에 적극 채용된다. 정토종에서는 ‘염불하는 자 이것이 누구인가(念佛者是誰)’라는 공안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이근원통 수행법의 핵심인 反聞聞性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염불선의 핵심은 소리를 넘어선 듣는 자성에 눈뜨는데 있다. 그런 점에서 염불선과 반문문성은 구조적으로 동일한 바탕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근원통의 법문은 전체 능엄경 법문을 이끌어가는 25원통법문의 한 가지에 속하는데 그 25원통법문은 25명의 보살들이 각각의 자기 수행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六塵, 六根, 六識, 그리고 七大(地, 水, 火, 風, 空, 根, 識)를 합쳐 25가지의 원통법문으로 설명된다. 소리라는 대상경계, 모양이라는 대상경계 등에서 25가지 원통법문은 시작되어 관세음보살이 소리를 통해 깨달았다는 법문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모양과 소리 등 18계, 7대에 속하는 것으로서 번뇌의 출발이 된다. 이 번뇌를 제거하여 자유롭고자 한다면 반드시 모양과 소리 등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25원통의 내용을 도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분 류

수 행 법

성 자(보살)

六 塵

色塵圓通

優婆尼沙陀

聲塵圓通

憍陳那

香塵圓通

香嚴童子

觸塵圓通

跋陀婆羅

味塵圓通

藥王, 藥上法王子

法塵圓通

摩訶迦葉, 紫金光比丘尼

六 根

眼根圓通

阿那律陀

耳根圓通

觀世音菩薩

鼻根圓通

周利盤特迦

舌根圓通

憍梵鉢提

身根圓通

畢陵伽婆蹉

意根圓通

須菩提

六 識

眼識圓通

舍利弗

耳識圓通

普賢菩薩

鼻識圓通

孫陀羅難陀

舌識圓通

富樓那彌多羅尼子

身識圓通

優波離

意識圓通

大目犍連

七 大

地大圓通

持地菩薩

水大圓通

月光童子

火大圓通

烏芻瑟摩

風大圓通

瑠璃光法王子

空大圓通

虛空藏菩薩

根大圓通

大勢至法王子

識大圓通

彌勒菩薩

이 중에서도 가장 수승한 수행법으로 꼽히고 있는 이근원통법은 각 실천현장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설명된다. 이 과정에서 그 깊은 뜻이 전체적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수행실천의 핵심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능엄경의 이근원통장 본문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그것이 다른 수행법과 비교하여 왜 가장 위대하고 최고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첫째, 이근원통이 제시하는 수행체계 전반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근원통은 수행과 깨달음의 전체 과정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업은 의미를 갖는다.

둘째, 이근원통에 대한 제가의 설을 넓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근원통에 대해서는 교학과 선수행의 두 진영에서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해설을 내놓고 있다. 이를 살펴봄으로써 이근원통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셋째, 이근원통과 그 밖의 24가지 원통법문을 비교 고찰해 보고자 한다. 24가지 원통법문과 이근원통법문은 동일성과 차별성을 갖는다. 이에 대한 고찰은 이근원통법문의 성격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넷째, 이근원통과 기타경전의 수행법을 비교하여 이근원통의 객관적 우수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해 능엄경이 갖고 있는 핵심적 가치를 규명해 보고자 한다.

 

2. 선행연구

 

능엄경은 선종을 비롯한 불교의 각 종파에서 중시하는 경전이 능엄경의 이러한 중요성에 착안한 논문들과 저서, 역서, 해설서 들이 다수 발견되는데 이에 대한 개관을 통해 능엄경 연구의 현황을 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한국에서의 능엄경 연구는 노권용의「楞嚴經의 禪思想 연구」, 이봉순의「능엄경의 보살도」, 주성옥의「능엄경 주소를 통해 본 과문의 특징-계환해와 정맥소를 중심으로」, 김월운의「능엄경과 여래장」, 이정휴의「능엄경의 수행과 마장단계」, 김월운의 「능엄경: 경전의 현대적 이해」,

박영희의「禪宗에서의 능엄경의 사상적 위치」, 장운숙의 「楞嚴經의 耳根圓通연구」, 이종찬의「능엄경의 수행체계연구 -발심을 중심으로-」, 조용헌의「능엄경 修行法의 韓國的 受容(耳根圓通과 性命雙修를 중심으로)」, 김진열의 「능엄경연구」 등이 있다.

이 중 노권용의 「능엄경의 선사상 연구」는 중국에서 완성된 선불교에 다양한 대승경전의 정신이 결집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능엄경의 사상이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으므로 이를 규명해보겠다는 문제의식으로 출발한다. 이 연구에 의하면 능엄경은 중국에서 성립된 천태, 화엄, 선종 등에서 적극 수용되었다. 그 중에서 선종에 능엄경이 수용된 경로에 주목하는데, 신수가 측천무후의 ‘내도량’에서 능엄경을 보았다는 사실을 중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선종에 이 경전의 사상이 적극 수용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보당종의 무주는 능엄경의 돈오적 사상을 적극 채용하는데, 논자는 이에 근거하여 보당종의 종조인 智詵이 측천무후에게서 능엄경을 열람했거나 직접 하사받아 無相→無住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

그런데 마조도일이 無相의 도량에서 수행하였으므로 이 경전의 돈오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논자는 홍주종의 作用卽性의 주장이 능엄경에서 온 것이라는 이시이 슈도(石井修道)의 관점을 적극 인용하고 있다. 또한 종밀이 그 돈오점수설의 경전적 근거를 능엄경에서 가져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논자는 선종에서의 능엄경의 위치를 카마다 시게오(鎌田茂雄)의 설을 빌려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능엄경은 차츰 선종의 최초 이론서적일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소의경전으로 확립되었다. 唐代의 불교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 원각경이었던 사실에 비해 송이나 원, 명의 시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은 능엄경이었다고 본다.

 

이 논문은 능엄경이 구체적으로 선사상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의 불교에 대한 영향을 아울러 설명하고 있다. 특히 七處徵心, 眞心, 如來藏의 3부분과 관련하여 그것이 慧에 연결된다는 깊이 있는 분석을 하고 있다. 다만 耳根圓通에 대한 고찰은 발견되지 않는다. 만약 선사상의 흐름을 연 경전이 이것이라면 이근원통장에 대한 고찰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논술이 없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그 점에 있어서 본고는 노권용의 논문과 차별성을 갖는다.

한편 이봉순의 「능엄경의 보살도」는 능엄경을 저본으로 하고, 長水子璿의 首楞嚴經義疏注經과 戒環의 楞嚴經要解, 眞鑑의 大佛頂首楞嚴經正脈疏, 耘虛龍夏의 首楞嚴經註解 및 기타 논문들을 참고하여 능엄경에 나타난 보살도를 고찰한 논문이다.

이봉순은 본론에 들어가면서 능엄경의 제목인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에서부터 보살도가 나타나 있음을 지적한다. ‘如來의 密因이며, 닦아 증득할 了義이며, 菩薩이 行해야 할 萬行을 밝히는 經’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경의 제목을 구성하는 大佛頂, 如來密因, 修證了義, 諸菩薩萬行, 首楞嚴, 經에 대해 상기 다양한 주석서 및 논문들을 참고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이렇게 제목의 의미를 고찰한 뒤에 능엄경의 보살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논의에 앞서 이봉순은 경전에 설명된 수행의 두 가지 전제조건과 수행의 두 가지 방편에 대해 정리하였다. 두 가지 전제조건으로서의 첫째는 因行 때의 마음이 果를 받을 때의 깨달음과 같은가 다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보살이 보리심을 내어 모든 有爲相에서 벗어나려면 번뇌의 근본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의 두 가지 방편은 네 가지 율의를 지키는 것이 첫째이고, 능엄주를 지송하여 마음을 잘 섭수하는 것이 그 둘째라고 설명되어 있음을 밝힌 뒤 이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다. 이렇게 보살도의 전제 조건과 방편을 논한 뒤 본론에서는 보살의 실천수행의 길에 대해 25원통, 사마타, 삼마발제, 선나의 실천을 들면서 그 각각에 대해 자세한 설명과 논증을 가하고 있다. 이 중 25원통의 하나인 이근원통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히 논술하고 있는데 특히 능엄경에서 말하는 妙音, 觀世音, 梵音, 海潮音등에 대해 여러 해설서를 인용하여 자세히 고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도 보다 심화하여 고찰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이봉순은 보살의 수행계위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정맥소의 견해에 따라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사가행, 십지, 등각의 55위로 정리하면서 그 각각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가하고 있다. 이봉순은 능엄경의 보살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지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전의 보살도에 비하여 능엄경은 四種律儀의 엄수 및 修禪法이라는 難行道와 능엄주 지송 및 관음원통에 의지하는 易行道를 회통함으로써 대승보살의 실천수행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것이 능엄경만의 독특한 보살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능엄경의 전체적인 설명과 耳根圓通에 대해서 개략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다만 전체 보살도를 고찰의 대상으로 삼다 보니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렀다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본고가 지향하는 이근원통의 수승한 점과 그에 대한 체계적이고 심도있는 고찰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주성옥의「능엄경 주소(註疏)를 통해본 과문의 특징 -계환해와 정맥소를 중심으로」는 두 가지 중요한 주소를 통해 경전의 과문을 분석하고자 한 논문이다. 이를 위해 논자는 능엄경의 주석서들을 개관한 뒤 이들 주석서에 나타난 교판과 과판에 대해 대략적인 정리를 한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계환해와 정맥소 과문의 구조와 특징을 고찰한 논문이다.

논자는 능엄경에는 다양한 교판과 과판이 나타나는데 이는 경전해석의 권위에 지배되지 않고 자신의 선적 체험과 안목에 기초하여 경전을 해석한 상황과 관련이 깊다고 해석하였다. 계환해와 정맥소 역시 능엄경에 대한 선적 이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경전을 수미일관하는 하나의 구조로 읽으려는 계환해와 경전의 내적 구조를 천착한 정맥소는 이러한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계환해와 정맥소의 과문은 기존의 과문에 의문을 제기하며 단락나누기부터 자신의 관점을 적용시켜 전체를 일관된 체계로 구조화하였다. 능엄경 주석서 과문은 중국불교의 경전주석 전통이 과거 주석가의 주석 틀을 그대로 답습하는 ‘조술’로 일관된 것이 아니라 경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해가는 과정임을 잘 보여준다.

 

계환해와 정맥소는 주성옥이 규정한 바와 같이 능엄경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주석서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 논문은 문헌학적 차원에서 해당 텍스트를 연구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수행의 현장에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은 없다. 각 장에 대한 다양한 선현들의 주석을 빌어 경전의 법문이 어떻게 수행의 현장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 본고의 지향과 그 성격에 있어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김월운의「능엄경과 여래장」 논문에서는 여래장이 능엄경의 독특한 사상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여래장이라는 단어가 대승경전의 곳곳에서 볼 수가 있지만 능엄경만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경전은 드물기 때문이다. 김월운은 삼세의 불보살이 모두 여래장을 구현하였다는 주장을 능엄경제2권 끝부분을 빌어 설명하고 있다.

 

진실로 生滅去來가 본래 여래장의, 상주하고 묘령하며 동하지 않고 두루 원만한 묘한 진여의 성품인 줄을 알지 못 하는구나 ! 성의 진상한 중에서는 거래와 迷悟와 생사를 구현하여도 조금도 얻을 수가 없느니라.

 

생멸거래, 미오 등 모든 상대적인 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그들 모두가 여래장에서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달리 다른 곳에서 찾을 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 경에서 아난존자가 마등가라는 음녀에게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을 미혹으로부터 깨달음의 길로 인도되는 방편을 설명한 것이라 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능엄경을 통하여 여래장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여 진다. 여래장을 때로는 眞見, 妙明등 다양한 명칭을 붙이기도 하나 여래장으로 열반에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은능엄경제6권의 관세음보살의 圓通法門이라고 하면서 삼마지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처음 듣는 가운데서 흐름(流)에 들어 대상(所)을 벗어나고, 대상과 들어갔다는 것 마저 고요해저서 시끄러움과 조용함, 두 모습이 전혀 생기지 않게 되었으며, 이와 같이 더욱 전진하여 듣는 주체와 들을 대상이 다하고, 듣는 주체가 없어졌다는 데도 머물지 않아 …… 적멸이 앞에 나타났다.’는 문장이 그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월운은 이것이 바로 여래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능엄경 제6권에 문수사리보살이, 말세의 중생들에게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길은 관세음보살의 방편이 으뜸이라고 하는 부분을 들면서 이것 역시 여래장에 대한 설명이라 보았다. 여래장의 수행방법을 능엄경을 통하여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능엄경을 여래장 사상으로 일관되게 설명한 김월운의 논문은 분명하게 정리되어 수행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이정휴의「능엄경의 수행과 마장단계」에서는 능엄경의 특징을 ‘마장의 경계’를 상세히 밝힌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경에서는 마장의 경계는 어떠한가, 수행자와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마장의 정체는 어떠하며 어떻게 해야만 마장의 세계에서 벗어나는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규명을 하고 있다. 그것을 능엄경에서는 마장의 다섯 단계로 五陰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고 한다.

 

色陰의 마장은 견고한 망상이 근본이고, 受陰의 마장은 虛名한 망상이 근본이고, 想陰의 마장은 融通한 망상이 근본이고, 行陰의 마장은 幽隱한 망상이 근본이 되며, 識陰의 마장은 虛無한 顚倒 망상이 근본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색, 수, 상, 행, 식을 차례로 닦아 識陰의 마장이 소멸할 때, 비로소 오음의 구속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마장은 오음의 갖가지 망상 때문에 생긴 것이므로 오음의 망상에서 해방될 때 수행자는 대자유인, 대 해탈인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깨달음이란 마장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깨닫기 위해서는 선정과 지혜를 닦고 계율을 철저히 지키며, 주문을 열심히 지송해야 한다는 것이다. 능엄경의 제7권에서 나오는 능엄신주를 지송하되 짧게는 80일, 길게는 4개월을 기한하여 열심히 수행하면 마장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선정과 지혜를 선나와 사마타로 말하고, 선정과 지혜와 주문은 어느 하나만 닦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닦아가야 마장의 경계로부터 벗어난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이정휴의 논문에서는 능엄경이 주장한 마장이 오온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온의 퇴치법은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깨달음에 이르면 자연히 소멸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능엄경에서 설하는 수행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그 수행 중 어떤 경계에 들어설 때 어떤 마장이 있고, 그 때에 신주로서 그 마장을 퇴치하는 방법 등에 대한 기술이나 수행체험이 구체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점에 대해 논의가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월운의 「능엄경:경전의 현대적 이해」의 논문에서는 능엄경의 첫머리에 ‘마등가’라는 요녀가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을 유혹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후 아난이 마등가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을 얻고 또 末世에 태어날 중생들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수행과 더불어 각종마장을 퇴치하는 방법도 함께 닦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경에서 말하는 네 가지 특징은 그 첫째가 사마타(寂靜)이고, 둘째는 삼마(明照)이며, 셋째가 선나(明照不二)이고, 넷째가 助道分 즉 修道를 保助하는 부분이라고 각 논술하였다. 김월운은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참고할 가치가 충분하다. 다만 이 경의 핵심인 耳根圓通 부분에 대한 수행적인 측면에서의 해석과 이와 관련하여 제목처럼 ‘경전의 현대적 이해’로서 누구나 쉽게 현대인이 알 수 있도록 그 수행방법이나 체험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박영희는「禪宗에서의 능엄경의 사상적 위치」에서 능엄경이 선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중요한 경전임을 역사적으로 개관한다. 그리하여 능엄경의 주석서가 唐代에 4인, 宋代에18인, 元代 4인, 明代에 42인, 淸代에 12인이나 되었다는 점, 명대의 경우 화엄경이 4종, 법화경이 12종, 금강경이 16종인데 비해 능엄경의 주석서가 42권으로 가장 많았던 점을 들어 능엄경의 선종사적 위치를 평가하였다. 요컨대 송대, 원대, 명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은 능엄경이었다고 한다.

이후 능엄경은 차츰 선종의 대표적인 所依經典으로 확립되어 선사상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경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논술함으로써 능엄경의 사상적 위치를 개관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 자료에 근거하여 선종계에서 먼저 능엄경을 중시한 것이 신수였다고 추정한다. 박영희는 특히 保唐宗의 법계를 서술한 曆代法寶記(781)에 佛頂經이 인용되어 있는 것에 근거하여 이들에 대한 능엄경의 영향이 현저하다고 논술하였다.

또한 洪州宗의 시조 馬祖道一(709-788) 선사상의 핵심인 ‘作用卽性說’의 근거가 능엄경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능엄경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圭峰宗密(780-841)에 의해서라고 보았다. 종밀은 禪敎一致와 頓悟漸修說을 주장할 때 능엄경의 “이치로는 단박에 깨닫는 것이어서 깨달으면 모두 소멸하거니와 사실로는 단박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차례차례로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돈오점수설을 수립하였다고 지적한다.

박영희는 능엄경이 당대 이후 송, 원, 명을 거치면서 임제종, 조동종, 법안종, 운문종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애독하는 경전이 되었으며, 그들의 소의경전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또한 능엄경이 우리나라 불교에서 갖는 위치에 대해서도 개관하고 있다. 박영희는 본 경전이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大覺國師 義天(1055-1101) 때라고 보았다. 의천이 宋에 들어가 화엄종의 대가인 淨源을 만나 교학을 탁마한 뒤 귀국하면서 수입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하였다.

이후 보조지눌(1158-1210)의 修心訣이나 眞心直說에서 이 경전이 중요하게 인용되고 있으며, 懶翁惠勤(1320-1376)은 이근원통의 경지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조선후기의 선승 仁岳義沾(1746-1796)의 楞嚴經私記와 蓮潭有一(1720-1799)의 楞嚴經私記가 중시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 중 의첨의 楞嚴經私記는 지금까지 불교전문 강원에서 능엄경 연구의 지침서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현대의 退翁性徹(1912-1993)이 능엄경을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성철의 저서 禪門正路評釋, 백일법문, 영원한 자유 등에 능엄경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는 점, 특히 능엄경 10권에 나오는 寤寐恒一의 용어를 오매일여(夢中一如, 熟眠一如)로 표현하면서 그것이 제8아뢰야식의 미세한 망상을 여읜 차원이라 규정하고 그 근거로 “제8아뢰야인 識陰이 다 없어지면 안 밖이 한 번 뛰어 곧 바로 여래지위에 들어간다.”고 하였는바, 이는 능엄경의 10권의 識陰이 滅盡에 대한 설명과 상통하는 것이라고 논술하고 있다. 위와 같이 박영희의 논문은 禪宗에서의 능엄경을 소의경전으로 중시된 경전임을 역사적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장운숙은「능엄경의 耳根圓通 연구」에서 능엄경의 수행법인 二十五圓通法의 내용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말세에는 장애가 많고 수행자의 근기가 같지 않으므로 계율의 수지와 능엄주로써 수행의 助道를 삼을 것을 논하고 있다. 이 논문의 핵심은 耳根圓通으로써 ‘反聞聞性’이다. 즉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듣는 수행이다. 소리의 듣는 성품에 관하여 삼매에 들어가 聞慧 · 思慧 · 修慧와 함께 我空 · 法空 · 俱空을 차례로 증득하여 無生法忍에 오르는 수행이 이근원통이라고 간결하게 기술하고 있다. 장운숙은 능엄경과 화두선의 관계의 긴밀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능엄경을 전거로 한 公案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점, 이것이 修禪者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다양한 예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칠처징심의 현장에 전형적인 看話禪의 수법이 나타나고 있음을 수산주의 의견, 천동굉지의 의견을 들어 논증하고자 한다. 사실 능엄경이 중국에 전래된 이후 그 돈오사상은 이후 조사선의 발전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장운숙의 능엄경과 간화선의 관계에 대한 천착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종찬은 「능엄경의 수행체계연구-발심을 중심으로-」에서 능엄경의 수행체계를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六根을 이중적 성격으로 보는데 육근은 진으로도 망으로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六根이 자기의 본성을 잃지 않으면 根性으로 불리고, 잃었을 때는 그냥 六根으로 불린다고 본다. 그리하여 육근은 번뇌의 근본인 동시에 根性으로 원통의 유일한 길임을 밝히는데 편장을 할애하고 있다.

조용헌의「능엄경 修行法의 韓國的 受容(耳根圓通과 性命雙修를 중심으로)」에서 능엄경의 핵심인 耳根圓通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그는 조선후기의 개운화상이 저술한 正本首楞嚴經環解刪補記을 참고하여 고찰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는 도교수행법과의 비교 고찰이 발견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첫째, 조용헌은 이근원통에 대한 수행법이 고대 인도에서 유래된 수행법이라고 하면서 그 근거로 秘音觀想法을 내세우고 있다. 요가에서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방법인데, 쪼그려 앉아서 두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서 내부의 소리를 듣는 방법이라고 한다. 내부의 소리는 심장에서 나는 秘音에 집중하는 명상법인데 이근원통과 동일한 수행법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소리를 觀한다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논술하고 있다.

둘째, 이근원통의 연원을 중국불교의 전통에서 찾는다면 止觀法이라고 한다. 止觀法은 인도불교 이래로 면면히 내려오던 것을 중국 천태종의 개창조인 天台智顗(538-597)에 의해서 널리 소개 되었다는 것이다. 조용헌은 소리에 집중하는 耳根圓通의 수행법은 觀法의 하나에 속하지만 止觀가운데 사마타인 止法보다는 비파사나 계통인 觀法에 속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조용헌은 耳根圓通法이 곧 止觀法, 또는 定慧雙修라고 보는 점에 대하여 그 수행법에 있어서 서로 어떠한 연관관계가 있는지 설명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觀音을 비파사나 수행법인 觀으로 보는 것이라 논하고 있다.

셋째, 耳根圓通의 수행법을 요가수행과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근원통의 수행법을 손가락으로 두 귀를 막고 내부의 심장에서 나는 秘音을 집중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네 번째 차크라인 ‘아나하타’에서 나는 秘音 나다(nada)에 의식을 집중함으로서 내부의 소리가 외부의 소리를 압도하는 수행법으로 보고 있다. 보통 보름 정도만 하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 진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외에도 쿤달리니(kundalini)라고 부르는 원초적 에너지가 폭발 할 때도 내면에서 들린다고 한다. 그리고 쿤달리니 에너지가 인체의 각 차크라를 통과 할 때 소리가 나며 이때 북소리, 종소리, 파도소리, 플롯소리 등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능엄경 6권에서는 묘음, 관음, 범음, 해조음이라는 표현도 쿤달리니가 통과할 때 들리는 소리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법화경에서도 똑같이 묘음, 관음, 범음, 해조음소리를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 해조음에 관하여는 관음신앙의 3대 도량인 낙산사의 홍련암, 강화도의 보문사, 남해의 보리암이 모두 바닷가의 절벽에 위치한 것도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파도소리는 지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소리가 해조음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해조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묘음, 관음법문은 수행체험이 없는 사람은 쉽게 들을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음보살이 수행한 4가지 소리 가운데 보통사람이 쉽게 접할 수 소리는 해조음이 다름 아닌 파도소리라고 논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능엄경은 관음수행을 전제로 한 것이고, 법화경은 관음신앙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타당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관음수행의 이근원통은 자력적인 수행인데 비해 관음신앙은 타력적인 신앙으로 보아 위 사찰들이 바닷가에 위치한 것도 상당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조용헌의 논문은 이근원통에 대한 전체적인 수행체계를 심도 있게 논술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해조음이 파도소리라고 확신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문제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觀音은 내부의 소리를 觀하는 것이지 외부의 소리를 청각으로 듣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김진열의「능엄경연구」는 능엄경이 능엄주를 중심으로 찬술되었기 때문에 다분히 禪密的 융합을 志向하면서 수행방편의 핵심은 如來의 佛頂神呪(一名 楞嚴呪)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능엄경은 크게 經文과 呪文으로 구별되어 있으며 돈오점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김진열은 능엄경의 촛점을 慧學보다 定學을 중요시 한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능엄경은 戒→定→慧學을 설정하고 있는데, 경 전체는 定學에 크게 비중을 두고 교설되어 있다. 오히려 교설의 비중도는 혜학→정학→계학일 정도로 종래 혜학중심의 교학체계에 반대하고 실천적인 계․정학중심의 修禪체계를 우위에 두고 있다. 아난은 불제자 중에서 多聞第一이지만 그는 번뇌(漏)를 다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마탕가족의 한 처녀에게 홀려 계마저 파하려 하는 위험에 처하였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많이 안다는 홈에서가 아니라 바른 정학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야기된 결과이다. 그래서 능엄경은 바른 정학을 전제하지 못한 아난의 多聞第一(혜학)을 시종일관 꾸짖고 있으며, 오히려 바른 정학이 부족할 바에는 능엄주로써 정학을 보충하여야만 비로소 혜학이 제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정학도 기본적으로 계학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 행위는 한낱 邪道에 떨어지고 만다고 역설하고 있다. 예를 들면 ‘비록 지혜가 많아 禪定이 앞에 나타나더라도 淫心을 끊지 못하면 반드시 魔道에 떨어져서 上品은 魔王이, 中品은 魔民이, 下品은 魔女가 되리라’ 한 것처럼 혜학보다는 정학, 다시 이 보다는 계학을 중요시함으로써 결국 如法한 계학 뒤에 여법한 정학이 생기고 그 다음에 여법한 혜학이 발휘된다는 것을 익히 알 수 있다. 그래서 능엄경은 바른 정학의 定立을 위하여 아난의 혜학을 七處徵心(아난이 일곱 번에 걸쳐 일곱 군데에 마음이 있다고 내보인 것)으로써 그 오류를 지적하고, 다시 바르게 보기(眞見)위하여 인식될 혜학 부분을 詳說하면서 (제1권-제6권)이를 떠받칠 정학을 굳은 계학 위에(제4권 일부, 제7권 일부)상설․강조하고 있다(제7권-10권)그런 점에서 혜학 부분(제1-6권)은 능엄경의 상부구조라면 (계)․정학 교설부분(제7-10권)은 하부구조가 아닐 수 없다 …… 이 경의 촛점은 혜학의 受學보다는 정학의 修禪을 중요시하는 定重慧輕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김진열의 논문은 능엄경의 교학적인 측면에서 개괄적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이 밖에 관음법문을 교화의 방편으로 제시한 靑海의 즉각 깨닫는 열쇠에는 관음의 수행법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언급들이 발견된다.

 

이 소리는 또한 소리가 아니기도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빛입니다. 일종의 소리가 있는 빛입니다. 아니면 그것은 일종의 선율이 있는 빛(Melodious Light), 또는 ‘빛이 나는 소리’라고 말할 수도 있으며 두 가지 다 옳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듣기 좋은 빛’이라고도, 매우 ‘아름다운 소리‘라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빛에도 소리가 있으며 소리에도 빛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관한다.’고 말하며 ‘소리를 듣는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귀로 들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리는 또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막 시작 했을 때 귀를 이용하여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귀가 있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법을 전해주어야 들을 수 있으며 좀 더 높이 수행한 이후에는 귀가 없이도 들을 수 있습니다. 지혜안을 통하여 지혜로 보는 ‘소리’는 밝게 빛나며 아름답고 밝은 빛 무리로 변할 것입니다.

 

耳根圓通이란 내면의 소리를 돌이켜 듣는(觀照) 수행법이다. 이 내면의 소리를 비춘다(照)는 것은 즉 흐름(音流)에 들어가 돌이켜 본다(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에 집중하면 소리가 미세하여 빛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소리로도 들리기도 하나 이것은 내면의 지혜로서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소리 또한 소리가 아니라는 淸海의 법문인데 상당히 설득력 있는 논리이다. 이와 관련하여 淸海는 다음과 같이 소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관음법문의 중요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습관이나 자장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떤 호흡법이나 요가 운동을 통해서 절대로 변화 시킬 수 없다. 왜냐 하면 습관의 양성이라는 것은 두뇌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습관을 변화 시키려면 필히 우리 자신의 두뇌를 변화시켜야 한다. 단지 단전에 집중한다거나 어떤 뼈에 집중한다거나 호흡을 주시하는 것 따위로 불가능하다. 오로지 관음법문만이 가장 궁극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그 소리는 부처의 ‘소리’이고 우리 ‘본성’의 소리이다. 우주 만물이 생성되기 이전에 이미 그 소리는 있었다. 그 소리는 세간의 음을 뛰어 넘는다. …… 마땅히 지혜로서만이 들을 수 있다. 그래서 觀音이라고 하지 聽音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觀音의 소리는 우주 만물이 생성되기 이전의 소리이고 우리 본성의 소리라고 한다. 그 어떤 호흡법이나 요가운동을 통해서도 습관화된 두뇌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 소리에 대한 淸海의 법문이다. 그 이유는 세간의 소리를 뛰어 넘는(승피세간음)소리가 묘음, 관세음, 범음, 해조음 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리의 音流는 내면의 지혜로서만 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聽音이라 하지 않고 觀音이라고 한다는 淸海의 논리는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또한 관음수행과 관련하여 인도의 요가 수행자인 산트 키르팔싱은 수랏 샤브드 요가에서 ‘음류’에 대한 스승들의 깨달음을 적시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빛’과 ‘소리’가 외부의 ‘빛’이나 이 세상의 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내면의 초월적인 빛과 소리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 초월적인 소리와 빛은, 신이 創生활동에 스스로 투입하여 생겨난 가장 원초적인 신의 현현체(primal manifestations of god)이다. 무명의 차원에서 신은 빛도 어둠도 아니요, 소리도 침묵도 아니다. 그러나 신이 형상을 띤 차원에서는 빛과 소리가 그의 원초적 속성으로 나타난다, …… 秘傳 전수자들은 자주색 빛, 정오의 태양빛, 석양의 빛 등에 대해서 또한 플롯, 하프, 바이얼린, 소라고둥소리, 천둥소리, 종소리, 흐르는 물소리 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렇게 샤브드가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하게 현현할지라도 샤브드 자체는 본질적으로 불변이다. 마치 강물이 눈 덮인 산꼭대기에서 솟아나 바다로 흘러들어 갈 때 환경, 모양, 움직임과 외형은 수없이 변화하지만 그것이 ‘물’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내면에서 이 ‘소리로 현현한 생명의 흐름(Audible Life Stream)'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비록 낮은 단계의 흐름일지라도 이것을 근원으로 이끌어 주는 통로로 삼을 수 있다.

 

요가 수행도 내면의 소리를 통하여 초월적인 빛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수행자의 수행깊이에 따라 저마다 빛의 흐름과 소리가 각기 다양하게 들리기도 하나 본질은 같다는 것이 산트 키르팔싱의 심도 있는 주장이다. 관음수행이나 요가수행 역시 내면의 소리를 觀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관성이 있어 보인다. 이 소리와 관련하여 모든 종교의 문헌에도 ‘소리(Word, 말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성인의 깨달음 역시 ‘소리’를 통하여 깨달았다는 것이 일반화된 주장이다.

 

빛과 소리에 관하여 요가수행자인 줄리언 존슨은 그의 스승인 인도의 마하라지 사완싱의 지도를 받아 저술한 스승들의 길은 ‘소리’에 대한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는 ‘말씀’이라 불리는 것은 ‘신’ 창조자와 동일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또 ‘생명의 흐름’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종종 音流라고도 불리지만 인도말로는 단순히 ‘소리’를 뜻하는 삽드(shabd)라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또 로고스(Logos)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거룩한 말씀’은 자신으로부터 뻗어나가 온 우주를 통해 흐르는 이 거룩한 흐름의 물결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신으로부터 방사일 뿐만 아니라 신 자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이야기 할 때는 다만 공기를 진동시킬 뿐이나, 신이 이야기 할 때는 에테르의 진동뿐 만 아니라 그 스스로 진동을 통해 움직인다고 한다. 사실 무한한 공간을 통해 모든 것을 진동 시키는 것은 바로 신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동 소리를 듣는 것은 훈련된 내면의 귀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거룩한 소리는 신성한 에너지일 뿐 만 아니라 창조적이고 매혹적이면서 강력하고, 찬란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리는 음악적인 파동으로 인해 지고의 존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논하고 있다. 또 소리의 흐름이 없으면 모든 생명의 존재가 있을 수 없고 만물은 이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이러한 들을 수 있는 생명의 흐름을 가르치고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진정한 스승일 수가 없다는 것이 줄리언 존슨의 주장이다. 그리고 줄리언 존슨은 소리의 흐름(音流)에 대하여, 이 흐름으로부터 생명을 얻지 않는 살아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으며 살아 있는 모든 영혼을 기쁘게 하는 것은 이 신성한 화음뿐이며 참으로 위대 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리는 본인 스스로가 오랜 수행의 내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설명한 것으로 보여 진다.

여기서 인도의 마하라지 사완싱은 수랏 샤브드 요가의 저자인 산트 키르팔싱과 줄리언 존슨의 스승이다. 산트 키르팔싱은 수랏 샤브드 요가에서 직접 능엄경의 耳根圓通에 대한 觀音法門을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다. 그리고 줄리언 존슨 역시 觀音에 대한 빛과 소리에 대하여 그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도의 요가 수행도 耳根圓通의 수행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능엄경 연구는 불교학적 연구 외에도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한 논문들이 다수 발견되는데 문학적 측면의 연구, 언어학적 측면의 연구 등이 그 예가 된다. 본격적인 불교학적 관점에서의 연구는 段新龍의「楞嚴經如來藏思想硏究」 등 수십 편에 이르지만 역시 이근원통에 대한 별도의 논문은 발견되지 않는다.

창민스님(불교학 박사)
창민스님(불교학 박사)

창민스님 프로필

 

경상대 행정학과 졸

 

동국대 법학과 졸

 

동국대 선학과(석사)

 

동의대 불교학과(불교학박사)

 

현재: 태고종 중앙승가 강원 사교과 교수

 

태고종 총무원 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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