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철학의 태두 헤라클레이토스의 저 유명한 말을 상기해 보자.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고 갈파했다. 당연한 표현이지만, 평범한 가운데 깊은 철학이 들어 있다. 그리스 철학자라고 해서 불교마인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도 강물에서 무상을 깨달았던 것이다. 인도의 지성, 마하트마 간디 옹도 “인간은 강물처럼 흐른다.”라고 했다. 동서의 지성들은 다 같은 지혜의 눈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불타는 이들보다도 무상을 철저하게 인식해서 법인(法印=불변의 진리)의 하나로 확실하게 했다. 무상은 고(苦)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연기론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상이란 진리를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불타는 인류에게 제시했다.

우리 중생이란 순간순간 무상 속에서 살아간다. 1초 전의 ‘일도’가 1초 후의 ‘일도스님’이 아니다. 의학적으로도 인간의 생체 세포는 초를 다투면서 생사를 거듭한다. 세포의 부단한 탄생과 소멸인 것이다. 마음도 염염상속(念念常續)하는 것이지, 마음이 고정불변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왈,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이 불가득이며 三世心이 不可得인데 나는 누구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 아닌가. 출가이후 나의 화두는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란 화두를 들고 씨름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나를 찾는 자세로 정진했으면 한다.

종단의 중진대덕 큰 스님들께서는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여주고 희망을 주었으면 한다. 거친 말과 오직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본분을 잃고 두서없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종단의 앞날이 걱정된다. 종단의 고위직에 있을수록 겸손했으면 하고 종도와 종단을 생각하는 점잖은 언행을 써야지, 수행력도 없어 보이는데 오직 종권만을 생각하는 듯한 일방적인 주장은 종단을 위하는 처방이 아니라고 본다. 자신이 종단을 맡아서 하면 잘할 것 같지만, 막상 맡아서 한다고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역지사지의 사색을 하면서 자신의 주위도 살펴보면서 조고각하의 겸허함을 가졌으면 한다.

비슬산 여래선방에서 일도 합장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