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인시절이 그립다

통도사 강원시절, 백양사에 들려서 포즈를 취하다
영축산 통도사 불교 전문 강원을 수료하고 찍은 졸업기념 사진.
백양사 강원 사교과 수료증
통도사 불교 전문 강원 졸업장

48년 전이다.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백양사 강원을 수료하고 통도사로 옮겨서 불교 전문 강원을 졸업했다. 전회에서도 언급했지만. 서옹스님께서 경봉도인에게 써준 편지를 들고 극락암 호국선원에서 한철을 나면서 통도사 강원에 들렸더니 무조건 대교과에 입학하라고 해서, 이 또한 인연소치란 생각이 들어서 대교(화엄경)를 보게 되었다. 당시 주지스님은 박청하스님이고 강원 강사는 진홍법스님이었다. 홍법스님은 서울 강남 포교로 유명한 정우스님이 은사이기도 하다. 운조당 홍법스님은 1948년 월하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통도사 주지 등을 역임했으며, 1978년 원적에 들었다.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참으로 훌륭한 스님이셨는데, 일찍 입적해서 안타까울 뿐이다. 종파를 초월해서 홍법스님 같은 분들이 승가에 많이 계셔야 불교에 큰 도움이 되고 승가화합을 이루고 불교교세를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인데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홍법스님은 평소에는 자비가 넘치는 분이었지만, 강(講)을 하실 때는 철두철미한 분이었다. 그날 배운 일정분량의 강독(講讀)을 다음날에는 거의 암송하다시피해서 독해(讀解)를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오독해(誤讀解)를 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시 불교계 강원은 해인강원이 학인이 제일 많았고, 다음은 통도사 강원이었다. 나는 백양사 강원 사교과에서 이미 문리가 났었기 때문에 대교를 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그때는 워낙 가난한 시절이라서 용돈이 부족할 때였다. 나만이 아니고 모든 학인들이 넉넉하지가 않을 때였다. 그러나 학구열은 대단해서 아침에 강을 받고 나면 하루 종일 배운 것을 독송하면서 암송하는 것이 일과였다. 나는 그날 배운 것을 노트에 적는 습관이 있어서 매일매일 쓰면서 외우면서 독송하는 것을 반복했다. 붓글씨도 가끔 쓰기도 했으나 서예는 나의 취미가 아니었다. 통도사는 전통적으로 서화(書畫)에 능한 스님들이 많았다.

나는 본사가 백양사이지만, 대교는 통도사에서 봤기에 통도사가 항상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내가 무슨 유명대학을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절집에서는 강원(승가대학)을 졸업하면 인정을 해주고 대우해주는 풍토가 있었다. 사실, 대학을 졸업한 스님들은 환속을 많이 해도 강원 졸업한 스님들은 불문에 오래 남아 있다는 우리 불가의 말이 있다. 전국 본사 강원을 나중에 승가대학으로 아름을 바꿔 걸었지만, 국가로부터 어떤 자격을 인정받는 제도가 마련되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우리 불교계의 공동 책임이요 승가교육이나 자격을 인정을 받는데 무지하고 생각이 고루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나는 그나마 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것이 두고두고 도움이 되고 불문에 있으면서 대교를 마친 것을 부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다. 부처님 은덕으로 공도(空道)를 배우게 되고, 불교철학을 배워서 나의 일생 지침으로 삼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하다는 것을 항상 느끼면서 살고 있다. 통도사에서 몇 년간 공부하면서 일주문을 들락거리면서 일주문 앞 2개의 돌기둥에 구하큰스님께서 쓰신 글귀를 새긴 것을 보면서 항상 출가사문의 본분을 생각하고 있다.

‘이성동거필수화목(異姓同居必須和睦) 방포원정상요청규(方抱圓頂常要淸規)'의 글귀가 그것이다. '각 성들끼리 모여 사니 화목해야 하고, 가사 입고 삭발했으니 규율을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통도사 스님들에게 주는 경구라고 보면 될 듯하지만, 모든 사문들에게 해당되는 경책의 말이다. 일주문 현판 ‘영축산(靈鷲山) 통도사(通道寺)’는 흥선대원군 친필이고, 일주문 가운데 기둥 2곳에 걸린 주련은 남쪽 지방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다. 통도사의 위상을 설명할 때 항상 하는 말이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고 통도사의 사격(寺格)을 높여서 말하는데,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출신으로서도 매우 공감이 가는 말이다.

나의 본사가 백양사이고 현재는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 선원장이란 직함을 갖고 선암사에서 살고 있지만, 젊은 시절 공부를 통도사에서 했기 때문에 통도사가 항상 생각나는 것은 정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개중에는 지금 태고종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무슨 조계종 통도사 이야기인가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젊은 학창시절의 회고담이며 나의 수행일기이다. 학창시절의 지나간 이야기를 회고하면서 ‘나의 수행일기’를 소개하는데 일부에서는 왜, 조계종 운운하면서 토를 다는 분이 있는데,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코멘트다.

비록 현재 종단은 다르지만, 내가 입산 득도했던 본사라든지 젊은 시절 공부했던 본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나로서는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래서 ‘나의 수행일기’가 아닌가. 현재의 나는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 선원장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선암사 재적승려이다. ‘나의 수행일기’ 내용이 선암사 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어떤 분의 생각은 전혀 엉뚱한 견해라고 치부한다.

나의 수행일기를 쓰면서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빼고 나면 뭘 가지고 쓴단 말인가. 크게 보면 다 일불제자이다. 눈을 크게 뜨고 보자. 나에게 대교를 가르쳐주신 홍법스님에게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각령전에 바친다. 내가 《화엄경》을 배우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다고 본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줄여서 《화엄경(華嚴經)》(Avataṃsaka Sūtra) 또는 《잡화경(雜華經)》(Gaṇḍavyūha Sūtra)이라고 한다. 《화엄경(華嚴經)》은 초기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로서 중국과 한국의 화엄종을 비롯한 많은 종파의 핵심 경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화엄경》을 대교(大敎)라고 부른다. 그래서 강원에서도 대교과라고 했다. 사미 사집 사교과는 대교(화엄경)를 배우기 위한 선수과정에 불과할 정도로 《화엄경》은 중요한 경전이다. 《화엄경》의 산스크리트어 원전은 전하지 않으며, 《십지경(十地經)》(Daśabhūmika Sūtra)이 화엄경의 일부 내용을 담고 있어서 산스크리트어로 남아있는 원전으로 추측된다. 한역본으로는 5세기 동진 불타발타라의 《60화엄》과 7세기 당나라 실차난타의 《80화엄》이 있으며, 일부 한역(漢譯)으로는 보현행원품을 옮긴 8세기 실차난타의 《40화엄》이 대표적이다.

전통적으로 《화엄경》은 고타마 붓다가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한 직후에 '부처의 연꽃(佛華)'으로 상징되는 그 깨달음의 경지와 그것의 증득을 가능하게 하는 수행을 그대로 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렇게 믿어져 오고 있다. 《화엄경》은 매우 웅대한 희곡적 구상과 유려한 서술로 법계(法界), 즉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즉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이는 우주, 즉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를 묘사하고 있으며, '진리의 연꽃(法華)의 경전'이라는 뜻의 《법화경(法華經)》 즉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과 함께 대승경전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60화엄》은 7처8회34품(七處八會三四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7처8회는 설법의 장소와 회좌(會座)의 수효이며, 34품은 장 또는 절의 수효이다. 《60화엄》은 보살 즉 대승불교의 수행자의 수행과 그 과보인 10주·10행·10회향·10지·불지(佛地)의 41위를 설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제1품부터 마지막 제34품까지의 《60화엄》 전체가 먼저 완전한 깨달음 즉 불지(佛地)를 먼저 설하고 그런 후 41위를 순서대로 설하여 다시 불지(佛地)에서 끝을 맺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41위는 대승불교에서 널리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는 보살 수행계위인, 《영락경》에서 설하고 있는 10신·10주·10행·10회향·10지·등각·묘각의 52위가 성립되는 바탕이 되었다.

다소 현학적인 소개가 되었지만, 화엄의 대의는 한마디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불교의 수준 높은 철학이다.

나는 이런 훌륭한 대승경전을 나의 소의경전으로 삼아서 지금도 50여년을 항상 곁에 두고 수지 독송하면서 화두를 들고 있다.

<정리=원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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