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 중 시절의 상명선사
세존응화 3천년설을 사용하던 1960년대 백양사 수련대회에서

치의(緇衣)를 입고 응공을 받은 년 수가 어언 60여성상이 다가온다. 탁자 밥을 내려 먹고 목탁 소리 들어가면서 절에서 살고 있는지도 환갑의 연륜이 쌓였으니 참으로 길다고 하면 매우 긴 세월이다. 나는 매우 이른 나이에 불문에 들어가게 됐다. 1960년도이다. 백양사로 소풍을 갔는데, 내가 옛날에 살았던 곳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에 와서 이상하게 백양사가 꿈에 나타면서 내가 승복을 입고 다른 스님들과 어울려서 공부도 하고 밥도 먹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꿈속이지만 나는 하도 신기해서 ‘내가 중인가?’스스로 묻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잠을 깨보니 꿈이었다. 이후로 내 머릿속에는 백양사 생각만 나고 다른 생각은 나지가 않을 정도로 나의 정신은 오직 백양사에 고정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 진학도 하지 않은 채 백양사로 달려갔더니 무조건 받아 주었다. 대개 어린 나이에 절에 오면, 부모 동의를 받아 오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요구도 없이 그냥 받아주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백양사 스님들이 그때 나를 보고 풋 중 같지 않고 구참 같은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행자시절이 빡빡했다. 당시에는 행자들도 많았지만, 절 일을 거의가 행자들이 다 하는 시절이었다. 행자들이 밥도 하고 나무도 하는 그런 시절이라, 육체적으로 참으로 힘든 나날이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재미가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생활하는 것이 나에게는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고 모든 것이 낯설지 않았다. 한참 후에 스스로 인지하게 된 것이지만, 나는 전생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됐다. 숙생의 쌓이고 쌓인 업이 결국 금생에 이르러 쌓여서 다시 절로 들어왔다는 것이 나의 절과의 인연이다. 그때에 백양사에는 당대의 선지식인 송만암스님이 계셨고 율사이신 국묵담스님이 주석하고 계실 때이다. 박장조 스님  이서옹 스님 김석산 스님 같은 선지식 스님들과 함께 살았으니, 나로서는 이런 분들과 같이 대중생활을 한 것을 두고두고 잊지 않고 있다. ‘70년대에는 불이성 법륜사에서 박대륜 종정스님 안덕암 총무원장 스님 이남채 총무원장스님 송정암 법사스님 변설호 대강백 스님 등과 함께 살았었다.

나는 당시 백양사에서 사교과를 마치고 국묵담 스님을 찾아뵙고 공부를 더해야겠다고 했더니, 묵담스님 왈, “상명은 음성이 좋으니 염불의식을 배웠으면 해‘라고 하셨다. 서옹 스님은 ”참선을 해야지“하면서 통도사 경봉 도인에게 추천서까지 써주는 것이었다. 경봉스님을 친견하고 한철을 나면서 참선을 했는데, 통도사 큰 절 강원에서 자꾸 입방하라고 하는 유혹이 있었다. 백양사에 5년간 있으면서 사교과까지 수료하고 통도사 극락암에서 한철 나고 보니,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양사에서의 한 때(가운데 상명 선사)

이렇게 해서 통도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는데, 참으로 그때 승가대학에 들어간 것을 지금 생각하니 너무 잘했다는 결론이다. ‘불입문자’라고 하지만 문자를 알아야 경전도 보고 설법도 할 것이 아닌가. 불입문자(不立文字)라고 하는 것은 진리당체의 본래자리는 문자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부처님의 심인(心印)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지 문자에 담겨 있다는 뜻이 아니다.

편집실에서 행장을 설명하는 상명선사와 원응 주필

<정리= 원응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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