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자.

한국불교태고종 편집국장 지행.>

태고(太古), 원증(圓證), 보허(普虛) 다른 표기 언어 普愚

<개설>

본관은 홍주(洪州). 속성은 홍씨(洪氏). 첫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 법명은 보우(普愚). 홍주(洪州: 현재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홍연(洪延)이며,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한국불교태고종의 종조(宗祖)로서, 불교계의 통합과 정계(政界)의 혁신을 도모하였다.

“다른 문헌에 보면” 경기도 양평군 대원리에서 태어났다.

 

태고 보우 국사 생애와 활동사항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檜巖寺)광지(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행하였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참구하였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한 뒤, 선(禪) 수행에 몰두하였다. 1330년(충숙왕 17) 용문산 상원암(上院庵)에서 관음기도를 하고, 1333년(충숙왕 복위 2) 성서(城西) 감로암(甘露庵)에서 정진하였으며, 1337년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모든 알음알이를 타파한 뒤, 송도(松都)의 전단원(栴檀園)에서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던 중, 1338년 1월 크게 깨달았다. 그 뒤 양근(楊根)의 초당에서 어버이를 봉양하며 1,700칙(則) 공안을 점검하였고, 1339년소요산 백운암(白雲庵)에서 「백운가」를 지었다. 1341년(충혜왕복위 2)중흥사(重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창건하여 5년 동안 머물 때 「태고암가」 1편을 지었다.

 

(양주) 회암사 알아 보기

회암사 왕실 사찰로 보는 증거

1) 사찰 건축양식을 따르면서도 정치적인 공간을 결합한 건물 배치는 회암사를 왕실 사찰로 보는 증거 중 하나다. 남북으로 층층이 단이 있고 남쪽에 회랑을 둔 점은 고려 시대 궁궐 건축양식과 같다.

1)정교하게 다듬고 태극 문양을 새긴 중앙계단.

 

광지대선사(廣智次禪師)

광지대선사(廣智次禪師) 왕지인(王之印 : 1102~1118)의 자는 각로(覺老), 자호(自號)는 영원수(靈源叟)이며, 고려 예종(睿宗)의 아들로 어머니는 후궁 은씨(殷氏)이다. 9세 때 혜소국사(慧炤國師)에게 의탁하여 15세에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8세(1119)에 법주사(法住寺) 주지가 되었다. 정미년(1127)에 삼중대사(三重大師), 임자년(1132)에선사(禪師), 정묘년(1147)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지륵사(智勒寺), 금강사(金剛寺) 등에 머물렀으며, 선학(禪學)과 교관(敎觀)에 해박하고, 고체시(古體詩)에도 뛰어났다. 묘지는 문림랑(文林郎) 임종비(林宗庇)가 지었다.

 

태고암가(太古庵家) 왕사 (王師)

1346년(충목왕 2) 원나라 연경(燕京) 대관사(大觀寺)에 머물 때, 궁중에서 『반야경(般若經)』을 강설하였다. 1347년 7월 호주(湖州) 천호암(天湖庵)에서 석옥(石屋)에게 도를 인정받고, 「태고암가」의 발문과 가사(袈裟)를 받았다. 1348년 귀국하여 중흥사에 있다가, 미원(迷源)의 소설산(小雪山)에서 4년 동안 깨달음 뒤의 수행을 하였다. 이 때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지었다. 1352년(공민왕 1) 궁중에서 설법하였으며 경룡사(敬龍寺)에 있었는데, 홍건적의 난을 피해 소설산으로 옮겼다. 1356년 왕의 청으로 봉은사(奉恩寺)에서 설법하였고, 그 해 4월 왕사(王師)로 책봉되어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1362년 왕은 그를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 있게 하였고, 1363년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로 옮기게 하였다.

 

국사 와 소설산

•그 때 왕에게 총애 받던 신돈(辛旽)을 경계하는 글을 올리고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가서 머물렀다. 1368년신돈의 참언(讒言)으로 속리산에 금고(禁錮)되었는데, 이듬해 3월 왕이 이를 뉘우치고 다시 소설산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1371년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한 뒤 영원사(營原寺)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381년(우왕 7) 양산사(陽山寺)로 옮겼는데, 우왕은 다시 국사로 봉하였다.

•1382년 소설산으로 돌아와서 12월 17일 입적하였다. 나이 82세, 법랍 69세였다.

 

왕사 [王師] . 국사 [國師]

왕사 [王師]

• (1) [역사] 고려 시대, 덕행이 높은 고승(高 僧)에게 주던 최고의 승직(僧職).

  (2) 임금의 스승.

 국사 [國師]

• (1). 고려 광종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국가에서 덕행이 높은 고승에게 주는 최고의 법계를 이르던 말.

  (2). 임금의 스승

 

학문세계와 사상

그는 왕도의 누적된 폐단,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에 대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 하여 공민왕에게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인심을 일변하고 정교(政敎)의 혁신을 도모하기를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민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묻자, 거룩하고 인자한 마음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자 다스림의 근원이니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추어 보라고 하였고, 때의 폐단과 운수의 변화를 살피라고 하였다. 또한 선문구산 (禪門九山)을 통합하여 종파의 이름을 ‘도존(道存)’으로 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는 혼수(混修), 찬영(粲英), 조이(祖異) 등이 있다. 『태고집(太古集)』에는 그의 사상과 경지를 알게 하는 법어와 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2권과 『태고유음 (太古遺音)』 6책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원증(圓證)이다. 중흥사 동쪽 봉우리에 탑을 세워 탑호를 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 하여 영골을 모셨으며, 사리는 양산사, 사나사 (舍那寺), 청송사(靑松寺), 태고암에 분장하였다.

• 참고문헌

•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이능화, 신문관, 1918)

• 「태고보우국사의 인물과 사상」(이영무,『건대사학』5, 1976)

• 「태고보우연구」(한기두,『원광대학교논문집』7, 1973)

 

소설산(小雪山) 세연을 마치다

48세(충목왕 4)때에 본국으로 돌아온 뒤 미원(迷源,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가평군 설악면)[1443년개편] 소설산(小雪山)에 들어가 몸소 밭을 경작하며 지냈다.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52세 때에 경용사에 주석하였으며 56세(공민왕5)때에 봉은사(奉恩寺)에서 개당(開堂)하였다. 그때 왕은 만수가사와 좌구, 수정염주, 침향과 불자(拂子)를 올리고 왕사로 모셨다. 이어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면서 원륭부(圓融府)를 설치하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일을 꾀했다. 1371년(공민왕 20)에는 국사(國師)가 되어 영원사(瑩原寺)에 있었다. 그 뒤 양산사(陽山寺)로 옮겼으며 81세 때에 우왕에 의하여 다시 국사로 책봉되는 등 왕사로서 16년 국사로서 12년 동안 봉직하다가 82세때인 1382년(우왕 8) 12월 24일에 세연을 마치었으니 세수 82세 법랍 69세였다. 시호는 원증(圓證), 탑호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고 했다. 저술로는《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2권이 현존하며, 시문집인《태고유음(太古遺音)》이 있다.

 

태고보우 국사에 대한 연구 성과

선승 태고보우 국사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다. 국사 왕사 종조 중흥조 원융 불교의 실천자 등의 수식어가 그를 따르고 있다. 당시의 지식인인 목은 이색, 권근, 정도전 등이 보우선사의 비문을 찬한 사실, 또한 현대에 이르러 그에 대한 연구 논문만 50여 편에 이르고 있는 사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선사의 삶의 궤적에서 보여지 듯 한국선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기 때문이다. 보우 선사에 대한 연구는 한국 불교의 법맥의 계승자라는 차원에서 한국불교태고종에서는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1940년 보제사(普濟寺)에서 간행된『태고보우국사 법어집(太古普愚國師法語集)』이 기초가 되어 연구되었다. 태고 보우 선사의 어록집은 1940년 보제사에서 출간된 이후 지속적으로 이뤄져 같은 제목으로 3차례에 걸쳐서 국역되었다.『태고보우국사 법어집』(1974년 대륜문도회 간 ․ 이영무 역),『태고집』(1991년 세계사 간 ․ 김달진 역),『태고록』(1995년 장경각 간)등이 그것이다. 그 뒤 1996년 덕암 스님이 원력을 세워『태고보우국사 전서(太古普愚國師全書)』(전 2권) 발간에 착수, 논문 23편과 태고 보우 국사 법어를 국역해냈다.

태고 보우 국사의 전서가 많은 연구가 들에 의해 있으나  한권으로 된 『태고보우국사』를 출간 하기 위하여 관심 있는 연구가들이 서암 ․ 서옹 ․ 진제 ․ 덕암 큰스님의 자문을 받아 5년간 태고 보우 국사의 자취를 국내외에서 취재할 수 있는 행운을 얻어. 5년간 붙잡고 있었던 태고 보우 국사라는 화두에 답하는 글을 정리할 수 있었다.

 

태고 보우 선사의 행화의 자취

태고 보우의 사상은 3단계로 나눠 검토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단절된 법맥의 계승, 둘째는 원융불교사상의 실현, 셋째는 한국불교의 종조 내지 중흥조로 압축할 수 있다.

 

원융불교사상의 실현

• 인도의 불교를 시대적으로 분류하면, 원시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 시대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불교는 하나의 교리를 두고 시대별·종파별로 각각 다른 주장을 펼쳐서 불교를 공부하는 후대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 또한 중국의 불교를 종파불교라고 규정짓듯이, 중국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교리에 대한 각 종파 나름대로의 주장을 펼쳐 종파 사이의 이론과 실천수행의 차이점이 극에 달하는 양상을 보였다.

• 이러한 종파불교의 가르침이 우리나라에도 처음 그대로 전래되었으나, 삼국 통일기를 전후하여 우리나라의 고승들은 보다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이론을 통하여 이들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고승들에 의하여 전개된 새로운 교리통합론을 일반적으로 원융사상이라고 하며, 이 원융사상은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적인 흐름을 형성하여 우리나라 불교를 원융불교 라고 까지 지칭하게 되었다.

• 우리나라에서 원융사상을 주창한 대표적인 고승은 원효(元曉)이다. 원효는 인도 및 중국불교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공(空)과 유(有), 진(眞)과 속(俗), 이(理)와 사(事), 소승과 대승, 아(我)와 법(法) 등에 관하여 그의 여러 저술에서 이와 같은 상대적인 것들이 어느 하나 독립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일(一)이면서 다(多)요 다면서 일의 관계를 취하고 있다는 원융사상을 천명하고 있다.

 

용문산의 암벽석굴에서 12가지 큰 서원을 세우게 된다

 

태고 보우의 탄생지에 대한 정리에 앞서 양평의 불교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양평군은 용문산 또는 미지산을 중심으로 수많은 불적들이 산재해 있다. 특히 태고가 주석하고 열반한 소설산 소설암(小雪山 小雪庵)과 미지산 사나사(彌智山 舍那寺) 등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미지산은 여산신의 출현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다. 미지산을 중심으로 활약한 고승으로는 수미산파로 보리사에서 선풍을 떨친 대경 대사와 여엄(麗嚴)과 양평의 불교를 꽃피운 태고보우 국사와 이후의 용문사 정지 국사를 들 수 있다. 정지 국사의 이름은 지천으로 속성은 김씨이며, 19살에 장수산 현암사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정지 스님을 주목하는 것은 연경 법운사에서 무학(無學)과 같이 지공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에 영향을 끼친 무학 대사 또한 미지산과 깊은 인연이 있다. 태고와 무학 대사는 용문산 윤필암의 암벽석굴에서 수행을 했으며, 특히 태고 보우는 용문산의 암벽석굴에서 12가지 큰 서원을 세우게 된다. 이렇듯 용문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문화는 신라말 에서 조선초까지 이어졌다. 대경 대사 이후 태고보우가 태어났고, 우왕이 또한 보리사가 위치한 현재의 양평 연수리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 후 수선사의 10세 법손 혜명 국사와 그의 수제자 소지 선사 ․ 무학 대사 등이 수행했고, 용문사 상원암 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서기가 방광하기도 했다.

 

태고.보우 국사. 탄생지 ?

• 태고 보우의 행적을 탐구하기 위하여 우선 출가 전의 삶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태고 보우는 고려 충렬왕 27년(1301) 경기도 양평군 대원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으로부터 7백년 전의 양근은 어떠했는가. 본래 양근군은 고구려의 영토였다.

• 태고 보우 스님은 양평 보리사.용문사 등에서 위세를 떨처으며 양평에 불교를 논할때 여염을 들고 그 다음 태고보우 라고 할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양근을 빈양(濱陽)이라 고쳐 기천군(沂川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양평은 미지산을 중심으로 많은 인걸들이 거쳐간 곳이다. 당시 궁예가 후고구려의 원대한 통일을 꿈꾸고 있을 때 신라는 당에 군병을 청하였다. 이에 분개한 궁예는“신라가 군병을 당에게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가히 부끄러운 일이다. 반드시 고구려를 위하여 원수를 갚으리라”하며 후고구려를 세우기에 이른다. 양평은 당시 궁예에게는 중요한 곳이었다. 하지만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써 궁예가 꿈꾸어 온 후고구려 복원은 무너지고 만다. 그런 과정에서 양평은 왕건과 중요한 관계를 갖게 되며, 고려 태조의 공신 함규(咸規)의 고향이 양근인 연유로 태조는 더욱 각별한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태고보우국사 출생지 연구결과

• 원증국사 태고 보우는 “1301년 9월 21일 양근군 대원리(大院里, 지금의 양평군 옥천면)에서 출생하였으니 성은 홍(洪)씨, 본명은 보허(步虛)이며, 시호는 원증이요, 아버지는 홍연(洪延), 어머니는 정(鄭)씨”라고 태고 보우 행장(行狀)에 분명히 적혀있어 양근 출신임을 확실히 해 주고 있다.

• 그러함에도 일부에서는 태고 보우의 출신지가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라고 쓰고 있다,충남 홍성에서는 지금까지도 태고 보우가 자기고장 출신으로 알고 있고, 많은 문헌과 연구가 잘못 이를 인용하고 있을것이라는 연구 결과 이며.

• 태고보우국사 문헌을 연구 하면서 아버지의 고향이 홍주이고(洪州, 지금의 홍성) 아버지가 지금에 양평으로 이주하여 태고보우국사를 탄생하셨을 것이라 정리하고자 한다.

 

법 맥

• 중국 원대 임제종의 고승 석옥청공이 머물렀던 중국 호주시 도량산 만수사에서 편찬하는 사적기 <도량사지>의 도량사 법맥도에 태고보우국사가 석옥청공의 법맥을 이어받았음을 확인하는 내용이 공식적으로 기록된다. 법계도에서는 특히 석옥청공의 법맥이 태고보우를 마지막으로 끊어진 것으로 적고 있어, 석옥의 법맥이 중국에서는 끊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조계종 법맥은 태고 보우가 아닌 나옹 혜근 것이라는 학자 주장”

• 과거칠불은 지난 세상에 출현한 일곱 부처님으로서, 비바시불(毘婆尸佛)을 시작으로 하여 제2 시기불(尸棄佛), 제3 비사부불(毘舍浮佛), 제4 구류손불(俱留孫佛), 제5 구나함모니불(俱那含牟尼佛), 제6 가섭불(迦葉佛), 제7 석가모니불 로서, 이들의 법맥이 차례로 이어져 석가모니불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석가모니28조 배출> 중국법맥(1조 보리달마)
(2조.혜가)(3조.승찬)(4조.도신)(5조.홍인)(6조.혜능)

• 석가모니 이후로는 인도에서 28조가 차례로 배출되었다. 그 법맥은 석가모니불-① 마하가섭(摩訶迦葉)-② 아난(阿難)-③ 상나화수(商那和修)-④ 우바국다(優婆국多)-⑤ 제다가(提多迦)-⑥ 미차가(彌遮迦)-⑦ 바수밀(婆須密)-⑧ 불타난제(佛馱難提)-⑨ 복태밀다(伏馱密多)-⑩ 협(脇)-⑪ 부나야사(富那夜奢)-⑫ 마명(馬鳴)-⑬ 가비마라(迦毗摩羅)-⑭ 용수(龍樹)-⑮ 가나제바(迦那提婆)- 라후라다(羅睺羅多)- 승가난제(僧伽難提)- 가야사다(伽耶舍多)- 구마라다(鳩摩羅多)- 사야다(闍耶多)- 바수반두(婆修盤頭)- 마노라(摩拏羅)- 학륵나(鶴勒那)- 사자(師子)- 바사사다(婆舍斯多)- 불여밀다(不如密多)- 반야다라(般若多羅)- 보리달마(菩提達磨)로 이어진다

• 보리달마를 제1조로 한 중국의 법맥은 제2조 혜가(慧可), 제3조 승찬(僧璨), 제4조 도신(道信), 제5조 홍인(弘忍), 제6조 혜능(慧能)에까지 이어진 뒤, 혜능 으로부터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선종이 널리 전승되었다.

• 중국 임제종의 개조 의현(義玄)의 18대 법손인 석옥(石屋)은 고려의 보우에게 법맥을 전하였고, 보우의 법맥은 혼수(混修)-각운(覺雲)-정심(正心)-지엄(智嚴)-영관(靈觀)-휴정의 순으로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 임제종의 정신은 임제가 말한 &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여덟자에 압축되어 있다.
 

임제정맥 과 국사 계보

태고보우-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는 고려 말의 고승으로 석가세존 제57대손이며 임제정맥(臨濟正脈) 제19대 적손이다.

                              (공민왕)

도의 . 지눌. 보우. 나옹 . 신돈 . 무학

•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 보물 제611호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    - 보물 제749호

  양평 사나사 원증국사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

  양평 사나사 원증국사석종비 - 경기도 유형문   화재 제73호

 

불교 정화 운동

• 법란운동(法亂運動)’ 혹은 ‘정화불사(淨化佛事)’로도 불리며, 대체로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대처승의 배제, 비구승에 의한 종단 재건, 한국불교 전통 재건, 불교 근대화 운동을 내용으로 하는 불교 내 자정운동이다.이 운동의 직접적 계기는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이 전통불교사원에서 ‘보살승은 물러가라’는 요지의 유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본래 보살승은 한국불교의 독신 전통과 달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승려들을 강제 결혼시키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불교정화운동은 우선 일본 불교의 보살승단 영향으로부터 한국 불교의 독신 승단 전통을 복원시키려는 운동이었다.

•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가 있기 전 몇 차례 불교 내부에서 승려들에 의한 자정운동이 진행되었다. 1952년에 수좌이대의가 1949년 6월 공포된 농지개혁으로 인한 사찰경제의 위축, 이에 따른 수좌들의 생존 문제 등의 개선을 건의함으로써 통도사, 불국사 등에서 18개 사찰을  비구 수행 사찰로 양도할 것을 결정했다.그러나 18개 사찰이 양도되지 않자 1953년 비구 수좌들이 선학원에 모여 시정을 모색했고, 다음해인 1954년 5월 이승만의 보살승 축출에 관한 유시가 있자 비구승과 보살승 양측 간의 심각한 대결양상이 나타났다. 또한 종권과 사찰 경제권 문제로 승려들 간의 세력다툼에 대한 사회 우려가 높아갔다. 그러나 1955년 8월 12일, 13일 전국승려대회를 계기로 종권과 사찰 주도권이 비구승에게 넘어왔고 정부도 이를 공인하게 되었으며 1962년 4월 통합종단이 성립되었다.

• 결과

1962년 4월 비구, 보살승 양측이 마침내 불교재건위원회에 합의하면서 재건비상종회를 구성하고 종헌을 제정 공포  했다. 이에 따라 양측의 종단으로부터 종권을 인계받은 통합종단이 성립되었다. 통합종단에서 비구, 보살승양측의 대표가 간부가 되어 공식적인 종단운용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지만 6개월 후 보살승이 종회 구성의 형평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종단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통합종단의 근거가 공인되면서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결 론

한국불교태고종 태고보우-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 고려 고승으로 석가세존 제57대손이며 임제정맥(臨濟正脈)제19대 적손 이다.

자랑스런 태고종은 보우국사의 적손 으로서 지금까지 혹독한 정화운동(淨化運動)’ 혹은 ‘정화불사 로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이 전통불교사원 에서 ‘대처승은 물러가라’ 요지의 유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여 혼돈의 시간이 있기도 하였으나. 본래 대처승은 한국불교의 독신 전통과 달리,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승려들을 강제 결혼시키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1962년까지 대처승의 배제, 비구승에 의한 한국불교 전통 재건, 불교 근대화 운동을 내용으로 하는 불교 내 자정운동으로 인한 태고종은 태고보우국사 숭고한 정신을 이어 받아 자랑스런 홍가사을 명맥을 유지 하고 있으며 한국불교 태고종 제26대 편백운 총무원장님께서 취임 1년 조금 지났지만 그 동안 종도님 들께 큰 고통을 주었던 고질병 같았던종단 채무를 상환하여 채무 빛 으로 부터 종도님 들을 해방 시키는 큰 역할을 하셨으며. 더 나아가서 대한불교 조계종과 통합정신으로 현 원행 총무원장 스님과도 통합은 물론 50여년간 법정 다툼 해오던 선암사 분규 문제부터 해결하고 함께 하자는 굳은 의지를 백운 원장님과 원행 두분 원장님 께서 실천을 위한 노력을 하자고 다짐 하셨다.한국불교태고종은 4천 종도 100만 불자가 하나될수 있도록 변화로운 계획으로 불철주야 총무원장 스님을 비롯하여 소임 스님들께서 최선의 경주를 다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 입니다.태고보우 원증국사 영산문화축제를 통하여 종단의 자긍심 고취 또는 한국불교의 적자 종단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고. 한국불교태고종 종도님 들께 변화 로운 희망을 함께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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