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이 먼, 칠천 만년 그 전에’

큰 죄를 지어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산신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고 살면서 속죄의 시간을 보냈던 것, 드디어 하늘 천상계로 승천의 기회가 열렸다. 하지만 아내 산신의 실책으로 승천의 기회를 놓친 남편 산신은 화가나 아내 산신을 걷어찼으며, 두 아이마저 빼앗아 버렸다는데, 숫마이봉(해발 673m)은 두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암마이봉(667m)은 허리 굽힌 채 굳어버려, 능선을 등산객들에게 허락하고 말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마이산

그 전설이 깃든 숫마이봉과 암마이봉 사이사이로 나무들이 탑처럼 자라고 있는 ‘탑사’의 아침은 고요했다.

‘탑사’의 탑은 불가사의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이는 백 오십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만 탑을 쌓은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다. ‘탑사’의 탑을 쌓은 이갑룡 처사(본명 경의, 호 석정)는 1860년 3월 25일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난 효령대군 16대 손이었다. 16세에 부모를 잃자, 초막을 짓고 3년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인생무상을 느껴 속세를 떠나 25세 때 마이산에 들어가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수도 하던 중, 산신의 계시를 받는다.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 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산신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갑룡 처사가 마이산 탑을 쌓던 시기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동학혁명이 일어나 전봉준이 처형되는 등 뒤숭숭했던 암울한 세상이었다. 이갑룡 처사는 그로부터 30여년이 넘도록 구국일념으로 밤낮 108개의 탑을 소명으로 쌓기에 열중했다.

‘돌을 황금처럼 생각해라’

살아생전 이갑룡 처사가 자주한 말이라니....유불선에 조예가 깊었던 도인이었다는 말처럼, 탑사의 탑은 황금보다 더 귀한 ‘진안’의 ‘지방 문화재35호’가 되었다.

이러하듯 ‘탑사’의 근황을 알고 있던 터라, ‘탑사’ 경내를 들어서는데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때마침, ‘탑사’는 백중49재 기도입재를 올리는 날이었다. 구업을 맑게 하는 진언이 팔십 여 개의 돌탑 사이로 흘러넘친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진성스님의 낭랑한 염불소리에 탑사 경내에 자리한 오방내외 모든 신들이, 마음의 빗장을 열고 걸어 들어온 가엾은 중생들에게 천수천안 관음보살의 미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잠시, 여장을 내리고 앉아 진성스님 기다리는 시간, 지친 몸이 밝고 고운 염불 속에 푹 잠긴 기운을 느낀다.

돌탑과 돌탑 사이로 팔십여 개의 탑들이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는 형상들이다.

커다란 돌덩이에 작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돌에 돌을 포개 얹어 쌓은 석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피라미드식으로 돌 축을 쌓은 뒤, 한가운데 항아리를 묻어 그 안에 쌀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는 자갈과 흙으로 채워가며 양돌과 음돌을 괴어 탑을 쌓은 형태, ‘탑사’의 탑은 솟대의 의미를 가득 품고 있다. 지금 만나고자하는 진성스님은 이갑룡 처사의 4대손이다.

진성스님은 이갑룡 처사의 4대손

2대손인 도생 처사님은 ‘탑사’에서 수도하였고, 3대손 혜명스님과 4대손 진성스님이 마이산 ‘탑사’를 지키고 있었다. 곳곳에 이갑룡 처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아니었다. 아직도 이갑룡 처사는 곳곳의 탑을 쓸고 닦아내며 백년 탑마다에 불화(佛畵)를 그리고 있었다.

음양오행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는 중앙탑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리다가도 항상 제자리에 있다는데, 어찌나 신비한 기운이 도는지, 꼭 불자가 아니어도 경외의 눈으로 올려다본다. 동쪽으로는 일광탑, 서쪽으로는 월광탑, 그리고 그 가운데 약사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행의 의미로 쌓았다는 오방탑(五方塔)의 호위를 받고 있는 천지탑(天地塔)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한 쌍의 부부 탑 같기도 하다. 지팡이를 겨우 의지해 천지탑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노인의 뒤를 따랐다.

‘감사합니다. 언제 또 올라올지 모르겠고, 오늘만큼이라도 내 발로 이렇게 천지탑을 오르게 해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기도가 천지탑 머릿돌에 걸린다. 굵은 능소화 가지가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또 다시 기어올라 바위틈에 뿌리를 내렸다. 바위틈마다 노인의 지팡이처럼 가늘고 긴 줄기들이 곳곳에 둥지를 틀고 주황빛 꽃을 피웠다.

이갑룡 처사의 4대손 진성스님의 모습이 대웅전을 빠져나와 탑 사이로 언뜻언뜻 스치자 서서한 바람이 인다. 이갑룡 처사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을 법도...잠시 숨을 고른다.

‘탑사’의 4대 주지 진성스님은 이갑룡 처사,‘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 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산신의 음성이 마치 자신의 소명과도 같다고 했다.

진성 스님의 약력을 살펴보니,

‘1985년 출가 이후 동방불교대학 졸업했다. 동국대 불교학과를 수료하고 태고종 재무부장, 나누우리 운영이사, 전주 덕진경찰서 경승을 역임했다. 현재 갑룡장학회 이사장, 교도소 교정위원회 중앙협의회 불교분과위원장, 전주교도소 교정협의회 부회장, 한 문화포럼 이사장, 나누우리 봉사단장을 맡고 있다.’

남다른 포교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진성 스님의 모습에서 이갑룡 처사의 소명을 함께 이어가고 있음이 진실로 느껴졌다.

진성스님과 인터뷰 하는 동안 내내 ‘억조창생’ 수많은 백성을 위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런 시선으로 사대부중을 마주하고 다독이는 삶을 걸어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서설(瑞雪), 첫 눈처럼 따뜻하고도 고독하게 느껴졌다.

‘탑 밴드’ 음악 봉사단

서설(瑞雪)처럼 차갑고도 따뜻한 그러면서도 고독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진성 스님은 ‘정말 좋아서, 그래서 위안이 되는 그런 음악 봉사단’이라며 ‘탑 밴드’ 음악 봉사단을 소개했다. 진안 마이산에서 40여분 달려, 전주시에 자리한 음악 연습실은 장마로 수해를 입어 바닥 이곳저곳이 얼룩져 있었다. 난타와 색소폰, 드럼 등 다양한 악기와 음반 기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진성스님의 색소폰 연주가 시작되었다. 두 시간 넘게 백중기도 입재를 하고 나온 지친 모습은 간 곳 없었다. 곧 단원들이 속속히 모여들었다. ‘탑 밴드’ 천순희 단장, 박성균 단원, 김경은 단원, 정해자 단원이 기량을 한껏 뽐냈다. 음악연습실은 음악 봉사단 단원들이 십시일반 모금을 해 마련했으며, 단원모두 음악을 하면서 ‘떡볶이 봉사’로도 유명하다고 했다. 떡볶이 봉사에는 특별소스제조에 특허를 낸 송운스님의 큰 도움을 받고 있다며 이구동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탑 밴드’는 전국을 돌며 ‘나우누리 산사음악회와 진안자원봉사 청소년 잔치, 전주 연꽃축제, 제주도수륙대재공연’ 등 메모함에 일정들이 빼꼭하게 적혀 있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사랑하는 진성스님은 그곳을 방문해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이라고 했다. ‘탑 밴드’ 음악 봉사단 또한 진성스님의 사업에 동참을 하고 있다.

한때 대한민국은 외국의 지원을 받으며 살아야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들어 대한민국의 경제는 도움을 주는 국가로 위상이 격상되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다. 받으며 살아온 것을 갚아야하는 막중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했다.

진성스님은 현재 베트남 호치민 스님과 협력을 하기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한국에 살고 있는 다문화 가족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베트남 스님을 모셔와 면담하고 위로해주는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는 중이다. 서로 언어가 잘 통하지 않으니, 아무리 잘해준다 해도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 어려운 다문화 가족을 위한 힐링 프로그램인 것이다. 진성스님의 계획이 모쪼록 좋은 결실이 맺길 간절히 소망한다. ‘탑 밴드’ 음악 봉사단의 우렁찬 난타의 북소리가 저마다의 가슴에 우담바라로 피어나길 또한 빈다.

저작권자 © 한국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