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고대교육과 불교대학


“힌두에서 주장하는 자아에 대한 영혼의 존재성에 대한 영원성에서, 불교는 아트만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깨달음에 의해서 벗어난다고 봤다.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점이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비단 힌두교만이 아니라 모든 유일신교적 종교와 불교의 상이점이다. 지말(支末)의 유사성은 있을지라도 근본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확연하다.”

인도의 고대교육
  경전어로서의 한문 교육의 전문성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도와 중국의 고대 교육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한문 경전어 교육은 고전어 교육이다. 고대인도의 고전어교육을 살피기 전에 인도철학에 대해서 대강 개관해 볼 필요가 있다. 인도철학은 크게 대별하면 힌두철학 불교철학 자이나철학이다. 인도철학은 기원전 1500년 전에는 베다와 우파니샤드, 기원전 500년은 자이나교 불교 바가바드기타 마누법전, 기원전 300년은 인도힌두 정통철학의 대두, 기원후 200년은 나가르주나와 대승불교, 기원후 600년경은 샹카라차리야(Shankaracharya)와 베단타철학 대두, 기원후 900년 다른 베단타인인 비시샤타바이타(Visishtadvaita)와 드바이타(Dvaita)의 대두, 기원전 800년과 기원후 200년 사이에 자이나와 불교 그리고 샤이바(Shaiva)와 아드바이타(Advaita)는 인도에서 살아남고, 상캬(Samkhya)와 아지비카(Ajivika)는 사라졌다.
  인도고대철학은 정통(아스티카astika)과 이단(나스티카nāstika)의 철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인도정통 육파철학은 1. 나야(Nyaya논리학파),  2. 바이쉐쉬카(Vaisheshika 자연철학파), 3.상캬(Samkhya,  精神原理와 物質原理를 나누는 二元論을 주창하는 학파) , 4. 요가(Yoga), 5. 푸루바 미망사(Purva Mimamsa 祭式을 연구하는 학파)  6.베단타(Vedanta우파니샤드와 베다철학을 강조)이다. 이 육파철학은 상호 비슷한 세 구릅으로 짝지을 수 있다.

  나야-바이쉐쉬카(Nyaya-Vaishesika), 상캬-요가(Samkhya-Yoga), 그리고 미망사-베단타(Mimamsa-Vedanta)이다. 베단타 학파는 또 6개의 지파로 나눠진다. 자이나와 불교는 슈라마나 학파(The shramana schools)인 고행주의로 발전됐지만, 인도의 정통 육파철학에서는 순세파(順世派, Cārvāka, 또는 Lokāyata)와 함께 이단으로 봤다.

  정통(Astika)과 이단(Nastika)은 베다의 권위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갈라진다. 아스티카(astika)는 유신론(theist)적이며 나스티카(nastika)는 무신론(atheist)적이다. 하지만, 베다에 의한 유신론에 속했지만, 상캬(Samkhya)와 초기 미망사(Mimamsa) 학파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불교는 힌두철학과 여러 면에서 철학사상적으로 견해를 같이 하는 공통된 관점을 함께 나누고 있다. 이를테면 業(karma), 원인과 결과에 의한 인과사상, 생사윤회, 해탈자유사상(Moksha)등이 그렇다. 불교가 힌두에서 그대로 수용한 사상이다. 하지만 불교는 힌두사상에서처럼 이런 견해를 영원하다고 보지 않으며, 힌두처럼 고정불변한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욱이 힌두사상의 핵심인 아트만(atman=我)을 불교는 인정하지 않는다. 힌두에서 주장하는 자아에 대한 영혼의 존재성에 대한 영원성에서, 불교는 아트만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깨달음에 의해서 벗어난다고 봤다.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점이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비단 힌두교만이 아니라 모든 유일신교적 종교와 불교의 상이점이다. 지말(支末)의 유사성은 있을지라도 근본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확연하다.

인도 비하르 주에 있었던 인도 고대 불교대학 유적 서기 427년에서 1197년까지 팔라 제국 아래에서 불교의 학습 중심 사원대학으로서 세계역사상 최초의 대학 중 하나였다. 중국의 현장 삼장과 신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유학승들이 와서 공부했다.
   인도 비하르 주에 있었던 인도 고대 불교대학 유적 서기 427년에서 1197년까지 팔라 제국 아래에서 불교의 학습 중심 사원대학으로서 세계역사상 최초의 대학 중 하나였다. 중국의 현장 삼장과 신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유학승들이 와서 공부했다.

  인도의 고대시대 교육은 종교교육이면서 철학교육이었다. 교육방식은 이전에는 구송(口誦)에 의한 종교행위나 철학 그 자체가 교육이었으나, 기원전 3세기부터 구송전통도 유지했지만, 문자화한 텍스트에 의해서 교육이 시행됐고, 종려나무 잎이나 자작나무 표피에 문자를 새긴 교재에 의해서 사원과 공동체 센터에서 집단교육이 이루어진다. 스승과 제자라는 가족적인 안방 교육 시스템에서 학교의 역할을 하는 공동체에서 교육이 행해진 것이다. 특히 경전들이 문자화함으로써 인도의 고대 교육활동은 인도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인도에서 불교의 전통교육을 고찰해야 한다. 특히 기원전 3세기부터 불교는 인도사회에 새로운 교육혁신을 가져온다.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계급만이 받던 교육에서 누구나 교육을 받는 시스템이 서민까지 확대되었다. 민주주적인 교육 시스템이 인도 전역에 퍼진 것이다. 불타 자신은 인도 고대의 브라만이나 지배계급인 크샤트리아의 구루-시샤(guru-shishya)식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루(guru)는 스승(teacher)이며, 시샤(śiṣya)는 제자(disciple)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지식전달은 인도나 중국이나 다 비슷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교육의 역사가 기원전 2천 년부터 존재해 왔다. 그것은 우파니샤드(the Upanishads)에서 드러난다. 우파(upa)는 가까운(near)이고, 니(ni)는 아래로(down)이며, 사드(şad)는 앉는다(to sit)이다. 즉 ‘가까이 앉아서(sitting down near)’라는 의미다. 불타는 기원전 5세기에 생존했던 분이다. 이런 교육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베다를 배웠고, 기타 여러 분야의 지식을 배웠음이 분명하다.
  불타 입멸 후에 바로 구송전통에 의한 결집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런 식의 교육제도가 인도 고대사회에서 존재했었기에 바로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이미 불타 시대에 구루쿨(Gurukul)이라는 교육제도가 확립됐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제도는 ‘구루와 시샤’에 의한 교육시스템이 보다 진일보한 고대교육제도로서 영국이 18세기 신교육제도를 도입할 때 까지 인도의 전통교육 시스템이었다. 브리티시 정부의 기록에 의하면, 이런 교육은 18세기까지 모든 사원 모스크 인도전역의 모든 마을에서 행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교과과목은 읽기 쓰기를 비롯해서 종교, 경전, 철학, 문학, 군사학, 외교, 수학, 의학, 점성학과 역사 등을 교수했다고 한다. 간디(Gandhi)는 이런 전통교육방식과 제도를 아름다운 나무라고 표현했으며, 이 전통교육제도는 브리티시가 파괴했다고 안타가워 했던 것이다. 이 구루쿨 교육제도는 중국의 우 나라 순임금 시절의 상상(上床)이라는 교육제도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 제도이다. 
  구루쿨 교육제도는 기숙사식 도제교육제도이다. 초기에는 브라만과 크샤트리아(Brahmin,  Kshatriya)의 공동체에 속한 계급의 자녀들만이 혜택을 입었으나, 기원전 3세기 불교의 교육제도가 널리 보편화함으로써 대중화되었고, 18세기까지 인도 전역에서 이루어졌던 교육제도요 전통이었다.

날란다 사원 불교대학
  이런 고대인도의 교육환경에서 변화를 가져 온 것은 불교와 자이나가 등장함으로써 근본적인 혁신을 가져왔다. 여기서 주목되는 불교교육기관은 날란다 탁실라 우자인(Ujjain) ) 비카람실라(Vikramaśīla)대학 등이다. 이런 대학들에서는 예술, 건축 미술 논리 수학 문법 철학 천문학 문학 불교 힌두 경제 정치(Arthashastra), 법과 의학 등의 과목이 교수되고 연구되었다. 탁실라(Takshila)는 의학 전문이며, 우자인은 천문학, 날란다는 가장 큰 교육기관으로서 지식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날란다는 전성기 시절에는 학생이 1만 명, 교수가 2천명이었다.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날란다, 비카람실라와 탁실라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날란다 같은 경우에는 중국 스리랑카 한국이나 그 밖의 다른 국제유학승들이 와서 공부했다고 한다. 날란다 대학은 5세기부터 13세기까지가 전성을 이루었으며, 그 유명세는 극동의 신라에까지 전해져서 많은 승려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현장(Xuanzang 玄奘)은 629년에 인도로 출발했다. 645년 귀국할 때 가지 숱한 역경을 이겨내면서 인도전역을 순례하고 돌아왔다. 그는 장안을 출발하여 감숙성 난주를 지나 고비사막을 넘어 천산 서로를 택해서 투루판에 도착한 것이 630년이다. 투루판의 불교왕의 후원으로 그는 쿠차를 경유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처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얀 등에 이르렀다.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사원을 보고 630년 인도에 도착하여 페샤와르와 탁실라를 거쳐서  스왓 계곡에도 가보고 後100년경 쿠샨왕조의 카니시카 왕이 제4차 결집을 한 카시미르를 633년에 떠나 634에는 판잡에 도착한다. 637년에는 룸비니 쿠시나가르 바라나시 바이살리 파탈리푸트라와 보드가야에 이른다. 현장은 수천 명의 학승들과 함께 나란다에서 2년간 논리학 문법 산스크리트와 유가학파의 철학을 배우게 된다. 그는 인도 여러 지역의 불교중심지를 돌아보고 646년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의정(I Ching 또는 Yi Jing, 義淨 635-713)은 의정은 법현이나 현장과 마찬가지로 인도를 찾았다. 그는 인도 동부해안에 도착하여 일 년간 머무르면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그는 나란다로 가는 도중 도적들을 만나서 옷을 다 벗기고 가죽을 벗겨 신에게 희생으로 바친다는 소리에 진흙에 뛰어 들어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하고 나뭇잎으로 하체를 가리고 나란다에 도착, 그곳에서 11년을 머물렀다.
 날란다는 427∼1197년까지의 인도불교교육기관이다.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대학교로 인정받고 있다. 날란다 유적은 고고학자 알렉산더 커닝험(1814∼1893)이 발굴했다. 중국 당나라의 현장과 의정은 날란다 유학승이다. 신라에서는 혜초를 비롯한 여러 승려들이 역시 이곳 날란다에서 견학하고 유학을 했다.
  불타 재세 시에  불타는 몇 차례 이곳 파바리카(Pāvārika)의 망고 숲에서 머물렀다. 우팔리와 대화를 나눈 것은 유명하다. 불타는 노후에 고향으로 가는 길에  마가다의 마지막 여행을 이곳 날란다에서 보내기도 했다. 사리푸타(Sāriputta)의 고향이 바로 이곳 날란다이다. 이곳은 한때 기근이 들었는데, 불타 재세 시에도 기근이 든 해가 있었다고 경전은 전하고 있다. 마하비라(Mahavira)는 이곳을 그의 활동 중심지로 삼았다.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는 이곳 날란다의 파바푸리(Pavapuri)에서 해탈( Moksha)의 자유를 얻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소카 왕은(King Asoka ,기원전250)은 이곳에 사원을 짓도록 했다. 티베트 자료에 의하면 나가르주나(Nagarjuna)가 이곳 날란다 사원에서 가르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날란다 대학은 굽타왕조(Kumaragupta) 시대인 450년에 설립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사원대학 교육기관으로 존재했었다. 날란다는 세계최초의 기숙사대학교이다. 1만 명의 학생과 2천명의 교수를 동시에 수용했으며, 벽과 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8개의 건물과 10개의 사원으로 구성되었었다.
   의정 삼장(義淨 三藏 635∼713)은 날란다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도서관은 9층이며 텍스트로 가득 차 있었으며, 날란다에서는 모든 분야를 커버하여 교수하고 연구했다고 그의 여행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한국 일본 중국 티베트 인도네시아 페르시아 터키에서까지 이곳 나란다로 유학을 왔다고 당나라 현장은 7세기 나란다 대학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날란다 대학의 도서관은 담마구니(진리의 산, Dharma Gunj) 또는  담마간자(진리의 보배, Dharmagañja)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에는 정보나 지식 면에서 세계최고 최첨단 대학이었다. 도서관은 세 개의 빌딩으로 9층 높이로서 라타나사가라(보석의 바다, Ratnasagara), 라트노다디(보석의 대양, Ratnodadhi)과 라타나란자카(보석의 광명, Ratnarañjaka)이라는 3개 동에는 수십만 권의 장서가 소장됐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무슬림의 공격으로 파괴됐는데, 날란다 도서관은 수개월에 걸쳐 불이 났다고 한다. 날란다에서는 수학 천문학 연금술과 해부학 등의 교과과정이 개설되어 있었다.
  날란다의 교과과정은 힌두교 불교의 과목을 총 망라해서 교수했으며, 학생들은 과학 천문학 의학 논리 형이상학 철학 육파철학인 상캬 요가 베다 불교원전 등을 배웠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인도불교에서 마하야나의 승려들은 설일체유부의 지파인 분별설부(Vaibhashika) 와 경량부(经量部,Sautrantika)의 소전을, 唯識 (Chittamatra)과 中観(Madhyamaka)이라는 이 네 가지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7세기 담마키리티(法稱, Dharmakirti)는 인도의 철학적인 논리학의 창시자이며 날란다에서 가르쳤다. 티베트 불교는 날란다에서 많은 것을 얻어갔다. 교학(sutric)과 금강승(Vajrayana)의 전통을 9세기 후반부터 12세기까지 배워갔으며, 베트남 중국 한국과 일본도  날란다 학파의 영향을 받고 자국에서 종파나 교파 학파를 창시했다. 날란다는 대승불교교학의 중심이었지 상좌부는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날란다는 1193년에 화염에 휩싸였다. 이슬람의 침입자 바키티야르 킬지(Bakhtiyar Khilji 아프간 장수)는 날란다에 와서 물었다. 날란다에 《코란》 經이 한권이라도 있느냐고.  없다는 말에 그는 불을 질러 버리고 파괴하면서 수만 명의 승려가 불타 죽고 산자를 참수하고 불교를 뿌리 뽑고 이슬람을  칼로써 전파하려고 했다고, 페르시아 역사가 민하즈(Minhaz 벵갈의 이슬람 역사가)는 ‘the Tabaquat-I-Nasiri’에서 보고하고  있다.

 티베트의 역경승, 창 로싸와(Chag Lotsawa, 1197∼1264)가 1235년 이곳 날란다를 찾았을 때, 90세가 넘은 老僧 교수는 70여명의 제자들에게 교학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타 대학  
  나바 비하라(Nava Vihara) 대학은 발흐(Balkh)의 고대도시에서 가까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의 중아아시아에 있었다. 사원은 옛날 조로아스터교(Zoraster)의 불탄 사원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발흐(Balkh)에 있었던 나바 대학은 나바비하라의 대사원에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불교교육의 중심 대학이었다. 중앙아시아의 불교교육의 중심역할을 했다. 토하리아의 승려인 고샤카(Ghoshaka)가 제 4결집에 참여한 후에 이곳에 와서 설일체유부(Sarvastivada)의 지파인 ‘Vaibhashaka’를 설립하고 아비담마의 주석서를 편집했다.
  푸수파기리 마하비하라(Puspagiri Mahavihara) 대학은 11세기까지 흥성한 대학으로 오리싸 주의 자이푸르의 쿠타크에 있었다. 날란다와 탁실라에 버금가는 고대인도의 3대 고등 불교교육 기관이었다. 현장은 639년에 푸스파기리 마하비하라를 방문했다고 한다.
 불교교육기관들이 무슬림의 공격으로 쇠퇴하자, 11세기에는 무슬림이 델리 럭나우 알하바드에 초.중급 학교를 세워 이슬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중세시대에는 인도와 이슬람국가 사이에는 신학 종교 철학 예술 미술 건축 수학 의학 천문학의 교류가 빈번했으며, 브리티시 의 식민지가 된 후에 브리티시의 신교육제도가 도입될 때 까지 힌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양상을 띠었다. 인도가 브리티시에서 독립한 후에는 인도 亞대륙은 현재 인도는 힌두교,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는 이슬람 국으로 분리됐다. 불교는 자취를 감췄다가 19세기 말부터 서서히 불교유적지가 복원되면서 다시 부흥하고 있다.

  탁실라(Taxila)는 파키스탄의 중요한 고고학적 위치로서 간다라 도시 탁샤실라(또는 탁실라)의 폐허를 포함한다. 기원전 6세기부터 서기 5세기까지 중요한 베다/힌두교 및 불교의 학습 중심지였다. 1980년 탁실라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으로 탁실라는 세 중요한 교차로에 놓여 있었다. 파탈리푸트라에서의 왕도와 박트리아, 카피사 그리고 푸스칼라바티(페샤와르)를 통과하는 북서 통로 그리고 카슈미르와 중앙아시아에서 스리나가르, 만세라 그리고 하리푸르 계곡을 지나 쿤제라브를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로 가는 길이 그것이다. 탁실라는 이슬라마바드의 수도권에서 서쪽으로 35km떨어져 있으며 그랜드 트렁크 도로에서 가까운 판잡의 라왈핀디의 북서쪽에 있다 탁실라(Takshashila)대학은 파키스탄에 있었던 대학으로 前 6세기부터 後 5세기 까지 존재했던 대학이다. 베다와 힌두 그리고 불교(대승)의 학문 중심지였다. 탁실라는 파탈리푸트라로 통하는 왕도와 북서부의 박트리아로 가는 길과 , 페샤와르(Peshawar)의 푸스칼라와티   (Puṣkalāvatī)를 거처 카시미르와 중앙아시아인 실크로드로 연결되는 해발 549미터의 간선도로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탁실라는 힌두와 불교가 공존하는 지역이었다. 탁실라는 베다철학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다. 탁실라는 또한 대승불교가 이곳에서 모양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Radha Kumud Mookerji, 『Ancient Indian Education 』Motilai  Banarsidass. Reprint, 1998.  푸수파기리 대학(Puspagiri University)은 11세기까지 인도에서 불교학 연구의 중심대학이었다. 오리싸 주의 자이푸르와 쿠탁크에 있었다. 푸수파기리대학은 나란다, 탁실라와 함께 인도의 불교고등교육과 연구를 하는 불교중심대학교였다. 당나라 현장 삼장은 639년에 이곳에 들렸으며, 티베트 자료에도 이 대학이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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