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라도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을 만나고 조사를 생각하면 조사를 만난다. 따라서 방거사를 생각하면 살아 숨쉬는 방거사를 만나게 되고 방거사의 道를 만날 수 있다. 제불조사의 도를 진정으로 생각하면 깊은 도를 만날 것이요, 가벼이 생각하면 스쳐 지날 것이다

      방거사와 단하선사

어느 날 방거사가 단하선사를 찾아와 단하선사를 향해서 양손을 펴서 앞뒤로 겹치고 섰다가 잠시 뒤 물러가니 단하선사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방거사가 다시 돌아와 앉으니 단하선사가 방거사를 향해 역시 양손을 펴서 앞뒤로 겹치고 잠시 후 방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방거사가 “나는 들어오고 단하선사는 나가서 아직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단하선사가 “이 늙은이야, 나가고 들어오고 나가고 들어가고 해서 무슨 끝날 기약이 있으리오”하였다.

이에 방거사가 “자그마한 자비심도 없구나” 하니,

단하선사가 이르기를 “나는 끌어와서 논밭에 이르렀는데”하였다.

방거사가 “무엇을 잡아 이끌었는가” 하니,

단하선사가 방거사 머리의 관(冠)을 잡아 일으켜 말하되 “꼭 한 분의 나이 많은 큰스님 같구나.”라고 했다.

다시 방거사가 반대로 머리 관을 가져다 단하선사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말하기를 “하나의 소년 속인과 꼭 같구나”하니 단하선사가 어린애 재롱부리는 소리를 세 번 했다. 이에 방거사가 “아직도 옛 시절 기운이 남아 있도다” 함으로 단하선사가 머리 관을 집어던지고 말하기를 “한 개의 벼슬아치 모자와 꼭 같구나.”     방거사가 어린애 재롱부리는 소리를 세 번 하거늘 단하선사가 “옛 시절의 기운을 어찌 잊으리요” 하였다. 방거사가 손가락을 세 번 튕기고 말하기를 “하늘도 움직이고 땅도 움직인다." 하였다.

여기서도 단하선사와 방거사와 만나 대화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크게 대수롭지 않다. 어쩌면 장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연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심심해서 서로 트집 잡기 놀이를 하는 것 같다. 둘이 만나 무단하게 양손을 펴서 앞뒤로 겹치는 자세를 이쪽이 하니 저쪽에서도 하고 또 서로 들어오고 나가고를 끝없이 한들 이 짓은 아무소용이 없다고 단하선사가 제지한 것은 누구라도 당연했다.

그러나 향상해야 새로운 전개가 시작된다. 방거사는 여기에서 자비심이 조금도 없다고 힐책한다. 부처는 지혜와 자비가 구족한 인격이다. 지혜가 나무의 지주라면 자비는 나무의 가지요 잎과 꽃과 열매이다. 지혜가 건축의 뼈대라면 자비는 건축의 부대시설이다.

수행하여 도를 이루는 것은 지혜의 완성이고 자비는 일체중생을 제도하여 도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하선사가 선지의 추구를 끝없이 몸짓으로 반복하면 소용이 없다하니 방거사가 단하선사에게 자비가 없다한 것이다.

이에 단하선사는 나를 이끌어 논을 갈고 밭을 갈게 한 장본인이 방거사가 아니냐함은 논과 밭의 경작은 수행정진이니 끌거나 끌려감은 도반과 도반사이를 말한다. 또 방거사가 무엇을 잡아 이끌었냐고 한 것의 무엇은 말로 할 수 없고 마음이나 이름조차 할 수 없는 마음이기에 무엇이라 하고 끌었다 해도 맞지 않고 끌리었다 해도 맞지 않음이다.

이 마음에게는 스님도 없고 속인도 없고 늙음도 없고 나이 어린 아이도 없으며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없는 까닭에 단하선사가 속인인 방거사를 보고 나이 많은 큰스님 같다 하고 방거사는 단하선사를 보고 어린 세속의 소년 같다 하였다. 도인은 천진무구하기에 단하선사가 어린 애 재롱부리는 소리를 하니 방거사가 또한 어린 애 재롱부리는 소리를 했다. 여기에 방거사가 손가락을 세 번 튕겼다는 말은 극히 짧은 시간을 ‘탄지(彈指)’ 즉 튕길 ‘탄’ 손가락 ‘지’라 쓰고 1구의 3현 가운데 제일현이 과거, 현재, 미래가 이 탄지에 있다고 한 뜻이다.

이어서 방거사가 하늘도 움직이고 땅도 움직인다 함은 단하선사가 옛 시절의 기운 즉 과거7불에서 석가모니불에 이르러 제대조사의 법이 잊힐 리가 없다하니 탄지를 3번 하므로 생긴 반응이라 할 것이다.

일구하는 법문은 임제종의 개조인 임제의현(臨濟義玄, ?~867) 선사에 의해 주장되어 선(禪)의 종지가 되었지만 일구는 100년 가까운 임제선사의 노스님인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의 법형제인 방거사와 백장선사의 법형제인 석두희천(石頭希遷)의 제자 단하천연 사이에 법거래된 것을 보면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전성기에 선문의 전성기에 크게 유행된 것이라고 본다.

이번 호로써 ‘대선지식 방 거사 고찰’을 마감코자 한다. 방거사 어록 중 약산선사, 제봉선사, 단하선사의 법거래 등 일부만을 소개하였으나 이외에도 백령(百靈)선사, 보제(普濟) 선사, 장자(長자)선사, 송산(松山) 선사, 목계(木鷄) 선사, 대매(大梅)선사, 대육(大毓)선사 측천(則川)선사, 석림(石林)선사, 앙산(仰山)선사 곡은(谷隱)선사와의 거래도 있으며 간경승(看經僧), 화주승(化主僧), 목동(牧童), 좌주(座主)와의 대화, 그리고 자신이 쓴 시게삼수(詩偈三首), 방거사 부인의 회향(回向) 등 방거사가 후학에게 남긴 발자취는 결코 적지 않다.        선에 관심이 있는 분은 부족하나마 연재에서 언급한 방거사의 도력(道力)을 읽어보는 것으로 대개 짐작이 가리라 믿는다.

방거사는 가족과 함께 영원불멸한 마음 하나를 얻기 위해 범인(凡人)의 생활 모든 것을 버린 구도자였고 가족은 구도의 회상(會上)이었다. <한국불교신문>에 실린 글의 명칭을 '대선지식 방거사 고찰' 이라 한 것은 방 거사가 수행 끝에 대선지식이 된 내용을 상고하여 살펴보자 하는데 있겠다.

또한 방거사가 도를 얻은 뒤에 여러 출가 선지식들과 예리한 종지를 나눈 것을 돌아보는 것이 주된 고찰의 내용이었다. 도를 닦는 과정은 개인의 문제지만 도를 성취하여 증득한 결과는 제불조사의 도와 통해야 하고 다른 구도자와 거래되어야 진정한 구도 성취가 되는 것이다.

방거사가 나눈 법거래로 무위의 진리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도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지만 도를 벗어나면 현시대가 있고 말세가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스스로가 만든 대단히 혼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혼란은 우리 마음, 어지러운 생각, 혼란스러운 행동에서 왔다. 이를 수습하지 않으면 다 같이 겪어야 할 인류의 종말이 온다.

엊그제 생을 마친 영국의 세계적인 천체 우주 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박사는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인간이 지구를 떠나야 한다고 했다. 이 시대 이후 인류의 종말을 막고 우리 마음의 혼란을 치료할 유일한 처방이 불교, 특히 방거사가 실행한 조사선에 있다. 방거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무위(無爲) 즉 모든 진리의 실체를 배워야 하고 마음을 비우는 것만이 최고라 하였다. 그리고 그 최고의 자리는 성현이 아니라 범부라 했으며 온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은 영원한 진리를 서로 이야기했다.

우리 태고종은 진리를 구하는데 가장 적합한 종단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가족으로부터 사회, 그리고 인류에 이르는 진리의 길을 실현할 수 있는 종단은 우리 태고종이다. 종단이 넉넉지 못하고 절이 가난한 것은 돈독한 수행의 구비조건이다. 부유는 나태를 부르고 향락에 젖기 쉬운 법이다.

방거사는 도를 닦으려 재산을 물속에 가라 앉히고 대바구니를 짜며 수행정진했다. 방거사의 사형 백장회해 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청규(淸規)를 가풍으로 삼고 일생을 살았다. 우리 종조 태고 화상께서도 태고암에서 청빈하게 사시며 도를 성취하여 중국천지를 진동하게 한 나머지 임제 19대 적손이 되셨다.

안 하면 어렵고, 하면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이 참선이다. 자신을 구하고 인류를 구하는 것이 자리이타(自利利他)이며 개공성불도(皆共成佛道)이다. 우리 종단은 말세를 구제할 조건을 모두 구비하였으니 이를 방관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바로 실행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인류를 구제할 것이다.

방거사는 우리가 사는 현재보다 1200년 전에 중국에 살던 인물이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 도를 구하는데는 시간의 차이도, 거리의 멀고 가까움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제불조사가 상주일체라고 염불을 외운다.

언제 어디서라도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을 만나고 조사를 생각하면 조사를 만난다. 따라서 방거사를 생각하면 살아 숨쉬는 방거사를 만나게 되고 방거사의 도를 만날 수 있다. 제불조사의 도를 진정으로 생각하면 깊은 도를 만날 것이요, 가벼이 생각하면 스쳐 지날 것이다.

끝으로 그동안 이 어리석은 산중 납자의 서툰 이야기를 들어주신 독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쉬이 견성오도(見性悟道) 하시기를 제불조사에게 축원한다. 

   

 지허스님 (순천 금둔사 조실, 원로회의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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