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태고종 무술년 시무식과 하례법회가 전승관 3층 불이성 법륜사 대불보전에서 화기애애하면서도 결의에 찬 분위기에서 엄숙하게 개최됐다. 편백운 총무원장 스님을 비롯한 도광 종회의장스님, 지현 호법원장스님 등 3원장스님을 비롯해서, 원로의장 덕화 스님과 종단의 원로대덕스님들께서도 참석했다. 또한 서울.경기 종무원장스님을 위시한 대부분의 지방종무원장스님과 종단 주요소임자 스님 등이 거의 참석했고, 정해정 태고종 전국 신도 회장과 송태훈청년회장 등도 동참했다. 또한 태고종 주도의 한중불교교류와 남북불교교류를 위한 재중 친선대사 등 내외귀빈이 참석해서 무술년 종단 시무식과 하례법회를 희망과 설렘으로 시작했다.

종단 시무식과 하례법회를 거의 40년 만에 참석한 필자로서는 감회가 새로웠다. 약관 20대 시절에 종단 기관지 『불교』지의 편집국장을 하면서 겪었던 종단의 모습과 큰스님들의 활동과 그리고 그 분들의 승려상 등을 떠올리면서, 시무식을 거행하는 법당에 앉아 있노라니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벌써 노장이 되었다니!”하는 스스로 나도 모르게 탄식을 하면서 숨죽여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나 역시 이제는 종단간부의 한 사람으로서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종단에 대한 이것저것을 생각하느라고 머릿속이 너무 바빴다. 적어도 ‘70년대에 함께 활동했던 분으로는 불과 10여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거의가 새 인물들이었다. 우선 불이성 법륜사의 외형부터가 달라졌다.

일제 강점기 때, 금강산 유점사 경성(서울) 포교당으로 시작한 불이성 법륜사는 금강산이라는 산중불교와 도시 대중 불교를 연결하는 가교의 접점이었다. 또한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한국불교분쟁의 한축을 담당했다. 1970년 태고종이 창종되면서는 태고종의 본부와 같은 역할을 했다.

나는 편집국장으로서, 국묵담 종정, 박대륜 종정, 안덕암 종정, 정보성 종정, 우백암 종정, 최혜초 종정스님 등을 이곳 법륜사에서 친견했고, 기사를 쓰기도 했다. 남허 총무원장, 영지 총무원장, 서봉 총무원장, 운제(이영무) 총무원장, 운산 총무원장, 인곡 총무원장, 인공 총무원장 스님과는 함께 총무원에서 일하기도 했다. 물론 도산 총무원장은 제주에서, 백운 총무원장은 춘천에서 자주 만났고, 너무나 다정한 사이였다. 이밖에도 종단의 요직을 두루 지낸 큰 스님들은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서울 경기 지방을 망라해서 많은 큰스님들과 교분이 있다. 불화(佛畫)의 거장 만봉스님, 어산종장인 송암스님, 벽응스님 등 이루 다 열거하려면 한이 없다. 선암사, 봉원사, 백련사, 청련사(안정사)의 스님 등 다 열거하려면 몇 페이지가 될 것이다.

종단 2세대 스님들로서 백운원장스님 외에도 지허, 수진, 자월, 보운(법진), 상명, 보경(학현), 지홍, 지상 스님 등 일일이 다 열거하려니 너무나 많다. 태고종은 1970년대가 가장 태고종다웠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원묵 원로의원, 지성 원로의원, 지허 원로의원 등도 가까운 사이였다.

* 종단구각을 깨는 혁신절실

거의 40년 만에 종단 총무원의 문턱을 들고 난지 불과 2개월이 채 안 된다. 소감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70년대의 태고종보다 더 후퇴하고 있지 않는가.’하는 우려를 금치 못한다. 물론 외형상으로는 덩치가 많이 커졌다. 4천개의 사암, 거의 1만 명의 승니(僧尼)와 전법사 교임으로 양적으로 많이 성장했음은 인정한다. 다만 6백만 태고 종도에서 3백만으로 줄어든 것은 너무나 큰 비극적인 통계이다. 총무원 자체 청사도 있고, 지방 종무원도 자체 종무원건물이 있고, 종단산하에 많은 종단 기관들이 있고, 종단공공사찰도 100여개가 넘는 것으로 듣고 있다. 종회를 지켜본바, 종회도 J종 못지않게 형식이나 의원들의 면면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필자가 느낀 종단의 모습은 아직도 구각(舊殼=낡은 껍질)을 깨지 못하고 있다는 그 한마디를 토로하고 싶다. ‘70년대의 태고종은 천신만고의 어려움 속에 있었지만, 종단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불교관, 종단관, 승려관 만큼은 확실했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제 태고종은 변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혁신적인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좋은 기회를 놓치겠다는 우려가 든다. 나는 백운 총무원장 스님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면 아는 사람이다. 나에게는 도반이면서 사형이다. 내가 종단에서 활동했던 ‘70년대는 물론이지만, 이후에도 관계의 끈은 계속 이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종단사(宗團事)에는 서로가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 역시 국제 불교와 포교사 양성 활동에 정신이 없어서 종단에 대한 논의는 전연 없었다. 총무원장스님으로 취임한 이후, 종단에 와서 보니 백운 원장스님의 종단에 대한 결의에 찬 소신과 종무행정 집행을 지켜보면서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종단관이 뚜렷하고 태고종의 방향과 진로의 로드맵을 이미 마음속에 작성해서 추동(推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백운 원장스님의 구체적인 종단정책이나 방향을 반복해서 담론할 수는 없지만, 백운 총무원장 스님은 ‘태고종이 이래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진단에서 ‘태고종은 구각을 깨고 밖으로 나와서, 약동하는 종단으로 혁신해야 한다.’라는 소신과 의지를 분명하게 읽었다. 백운 총무원장 스님의 종단을 한 차원 더 업그레이드 시키겠다는 야심찬 그림과 추진은 분명하고 재임기간 동안 반드시 실행할 것이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나는 백운 총무원장 스님은 해 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춘천 석왕사를 잘 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주택 같은 절을 대 가람으로 발전시켰다. 여러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 부단한 추진력과 전법포교활동은 이미 평가를 받았다고 본다. 지역사회에서의 대사회활동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종도들은 너무나 잘 알 것이다. 강원종무원장으로서의 지방 종무행정과 중앙 총무원에서의 부장, 부원장 등 종무행정에 대한 실무경험은 총무원장이 되고도 남는 충분한 경력이다. 거기에다 종단관 불교관 승려관이 투철하고, 뭔가 태고종을 한번 제대로 만들어 보겠다는 강한 신념이다.

*한국불교중흥은 태고종에서

이제 종도들은 시야를 좀 넓게 그리고 거시적인 안목에서 종단을 보는 의식전환과 태도변화가 요청된다. 불과 3개월 만에 종단의 가장 아킬레스건인 부채를 탕감 받았고 원금 상환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도 발목을 잡으려고 구태를 연출하는 몇몇 정치승(?) 들의 작태를 보고 들으면서,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려놓고 흔드는 구태는 일반 세속에서도 쓰지 않는 하책(下策)이다. 《삼국지연의》에서나 있을 법한 술수(術數)이지, 불교집단에서 있어서는 안 될 승가의 화합을 파(破)하는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승가에는 종헌.종법보다 더 중요한 율장(律藏)이 있고, 청규(淸規)가 있다. 율장과 청규가 사문화(死文化)되었다고는 하지만, 절집에서의 종헌.종법은 율장이나 청규보다 하위법임을 알아야 하고 만능이 아니라는 전제아래, 승가전래의 위계질서와 사자상승에 의한 불문율이 우선한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본다.

나는 오늘 시무식과 하례법회를 참관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태고종은 희망이 있는 종단이다.’라는 것을 직감했다. 4천 사암과 1만 명의 승니(僧尼)를 구성원으로 하는 한국불교계의 선두 종단으로서, 1천 7백년 한국불교의 중흥을 책임져야 한다는 역사의식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자각이다. 백운 총무원장스님의 신년사에 담긴 결의에 찬 종단혁신의 소신과 실천의지는 더욱더 추진력이 강화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이제 태고종은 과거의 구태의연한 견해나 사고에 갇힌 패러다임에서 빠져나와야 하고, ‘나만 내 절만 안전하면 된다.’는 프레임(틀)에서 튀어나와서, 대사회적인 종교적인 역할과 책임을 지는 광도중생의 사명을 다하는 출가사문본래의 정신으로 회귀해야 한다. 태고종은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고, 비전이 있는 한국불교계의 선두 종단으로서 부종수교(扶宗樹敎)와 보살도를 구현하는 대승보살행자(大乘菩薩行者)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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