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예수재에 내제된 축제적 성격과 대중문화로의 활용방안

-경제 봉원사와 영제 작약산 광제사예수재를 중심으로-

승범스님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강사)

 

승범스님
승범스님

 

(국문요약)

한국의 불교의식은 불교의 전래와 같이 시작되었을 것이라 여겨지며, 신라대를 거쳐 고려대에까지 내려온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와 조선시대의 ‘수륙재(水陸齋)’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영산재(靈山齋)’ 와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 등이 한국불교의 대표적 의식이며, 이러한 의식에서 축제적인 성격을 가진 최초의 문헌적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 경문왕 6년(866) ‘연등회(燃燈會)’이다.

‘생전예수재’의 유래는 『예수천왕통의(豫修薦王通儀)』에 북인도 유사국 병사왕이 25년 동안 49번에 걸쳐 ‘예수시왕생칠재(豫修十王生七齋)’를 올렸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으며, 한국불교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었음을 조선 중종13년(1518) 강원도 원주의 진사 김위(金渭)의 상소문에 ‘소번재(燒幡齋)’와 1573년 문인 태균(太均)이 간행한 나암보우(懶庵普雨1509∼1565)의 『나암잡저(懶庵雜著)』에 ‘예수시왕재소(豫修十王齋疏)’의 내용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한국은 예로부터 농경사회가 일찍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위로는 신들에 대한 제천행사로부터 아래로는 힘든 노동에 대한 애환을 축제적 양상으로 승화 시켰다. 절기에 따른 세시풍속에서 각 지방마다 고유한 특징을 가진 수많은 축제들이 생겼으며, 고단하고 힘든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환을 많은 축제를 통하여 민중들의 삶에 힘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축제들이 오늘날 각 지역마다 많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 또한 승려들의 수행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축제적 성격의 의식도 민중들과 어우러져 같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구인사 ‘삼회향놀이(영산재뒤풀이 놀이)’통해 알 수 있으며, 간접적으로 부산경남지역의 ‘산 오구굿’이라는 토속적 신앙으로 생전예수재의 축제성을 살펴 볼 수 있다.

‘생전예수재’는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의식으로 가장 축제적 특징을 가진 불교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엄숙한 분위기의 천도의식과(薦度儀式)는 달리 내가 곧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의식이므로 의식의 주체가 되어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전예수재에서도 경남지방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영남의 중심인 밀양지역의 작약산 광제사예수재는 의식설행 중의 '가마(용선)타기'와 소청명부편(召請冥府篇)의 시왕각배(十王各拜)시 '시왕청사의 탑돌이 행렬'이 불교적 사상뿐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오락적 요소가 포함된 ‘화청(和淸)’ 등은 민속학적 사상이 결부되어 축제적 성격을 내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연극과 영화 ‘오구’의 사례를 통하여 생전예수재는 대중문화 예술의 한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다.

불교의식에서 나타나는 축제적 성격은 아미타불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국 민중불교의 중요한 사상적 토대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지며, 불교가 가지는 단편적인 불교만의 문화가 아니라 한국의 전통적 민속 문화와 같은 궤(軌)를 가지고 이어져 내려 왔다는 점은 불교의 문화가 민요나 민속놀이에서 민중들의 놀이적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제어: 봉원사예수재, 작약산 광제사예수재, 반야용선, 가마, 화청, 탑돌이,

 

Ⅰ. 머리말

한국의 불교의식은 불교의 전래와 같이 시작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불교는 종교이므로 의례와 의식은 수반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경전을 전해준 이래로 오늘날까지 불교에서 불교의식은 대중들과 함께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중들의 참여의식은 특히 불교뿐만 아니라 민속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한국은 예로부터 농경사회가 일찍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위로는 신들에 대한 제천행사로부터 아래로는 힘든 노동에 대한 애환을 축제적 양상으로 승화 시켰다. 절기에 따른 세시풍속에서 각 지방마다 고유한 특징을 가진 수많은 축제들이 생겼으며, 고단하고 힘든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환을 많은 축제를 통하여 민중들의 삶에 힘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축제란 무엇인가? 각 민족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행사를 바탕으로 국민 의식을 높이는 의례라 하였으며, 이러한 축제들이 오늘날 각 지역마다 많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 또한 승려들의 수행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축제적 성격의 의식도 민중들과 어우러져 같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구인사 ‘삼회향놀이(영산재뒤풀이 놀이)’통해 알 수 있으며, 특히 생전예수재는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의식으로 가장 축제적 특징을 가진 불교의식이라 할 수 있다. 산 자들을 위한 의식이므로 재의식의 주체는 승려가 아닌 대중이므로 재의식의 성격이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천도의식(薦度儀式)인 수륙재(水陸齋)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엄숙한 분위기의 천도의식과는 달리 내가 곧 주인공이며, 전생의 빚을 갚음으로써 불안한 사후세계(死後世界)에서 안락을 보장 받는 의식이기에 성격이 밝을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의 현재 불교의 재의식은 산사람이나 죽은 사람들의 구원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그러나 기록으로 나타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축제적인 성격 또한 크다고 할 수 있음을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의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신라시대부터 시작한 연등제나 팔관회는 고려시대에 와서는 성대한 국가적인 행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초기에는 유교적 정치이념의 국가체재 내에서도 수륙재가 왕실주관으로 성대히 열렸음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본고는 예수재의 유래와 조선시대 설행 된 예수재의 기록된 문헌을 파악하고자하며, 경제의 봉원사예수재와 영제의 작약산 광제사예수재 등의 진행구성을 서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한국불교의식의 축제성을 나타내는 역사적 기록을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찾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생전예수재의 진행 과정에서의 ‘가마(용선)타기’와 ‘전이운(錢移運)’에 내제되어 있는 축제적 성격과 야간의식인 소청명부편(召請冥府篇)의 시왕각청(十王各請)시에 청사 ‘탑돌이’ 행렬의식에 나타나는 축제적 성격을 찾아보고자 하며, 생전예수재에 내제되어 있는 축제성을 바탕으로 한 대중문화로의 활용방안을 다른 사례를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

본고의 사례인 봉원사예수재와 작약산 광제사예수재를 중심으로 서술한 까닭은 봉원사의 경우 한국 불교의식의 중심이기 때문이며, 작약산 광제사의 경우 부산⋅경남지방만의 축제적 특색을 가진 가마(용선)타기와 화청(和淸)등을 보존하고 있으며, 무형문화재의 등재를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Ⅱ. 예수재의 유래와 진행구성

1. 예수재의 유래

생전예수재는 ‘생전(生前)에 미리(預) 닦는(修) 재(齋)의식’을 뜻하며,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을 신앙적 사상을 바탕으로 『불설관정수원왕생시방정토경(佛說灌頂隨願往生十方淨土經)』, 『불설수생경(佛說壽生經)』, 『불설예수시왕생칠경(佛說預修十王生七經)』 그리고 『예수천왕통의(豫修薦王通儀)』에서 유래를 찾고 있다. 『불설수생경(佛說壽生經)』에 열두 가지의 띠를 따라 사람으로 태어날 때에 누구나 할 것 없이 생명줄을 이어준 돈 수생전(壽生錢)을 명부에서 빌렸으므로 갚아야할 것이라는 내용과 『예수천왕통의』에 북인도 유사국 병사왕이 25년 동안 49번에 걸쳐 예수시왕생칠재(豫修十王生七齋)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열시왕의 종관들과 그에 따른 권속들의 명목(名目)을 몰라 명사들의 숨은 고통을 위로 하지 못해 저승을 다녀온 후 다시금 예수시왕생칠재의 35편을 올바르게 봉행함으로써 이후 미륵대성을 친견하고 수다원(須陀洹)을 증득하여 성자가 되었다는 내용으로 예수재의 유래를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불교에서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에 판각된 예수시왕생칠경판 3종을 보아 예수시왕사상은 고려시대부터 내려 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불교의식에 내제 되어 있는 신앙적 의미는 아미타의 48서원으로 칭명염불만으로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미타정토신앙과 현세이익을 대변하는 관음신앙 그리고 자신의 성불을 포기하는 대신 지옥의 모든 중생구제를 서원한 지장신앙 등은 유교의 피지배 계급인 민중들에게서는 삶의 희망과 위안을 주는 종교이기에 불교가 유지 될 수 있었든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신앙적 사상이 배경이 되어 생전예수재가 성립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록으로 나타나는 ‘생전예수재’라는 이름으로의 의식 설행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었음을 조선 중종13년(1518) 강원도 원주 사람인 진사 김위(金渭)의 상소문에 ‘소번재(燒幡齋)’라는 내용과 그리고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송당대우(松堂大愚)가 집술(集述)한 『예수시왕생칠지재의찬요(豫修十王生七齋儀纂要)』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리고 1573년 문인 태균(太均)이 간행한 나암보우(懶庵普雨, 1509∼1565)의 『나암잡저(懶庵雜著)』에 ‘예수시왕재소(預修十王齋䟽)’, 1648년 간행된 기암법견(奇巖法堅, 522∼1634)의 『기암집(奇巖集)』에 두 개의 ‘생전예수재소(生前預修䟽)’, 1647년 비구 설청(說淸) 등이 스승의 글을 모아 판각한 『편양당집(鞭羊堂集卷)』의 ‘생전소(生前䟽)’와 『시왕소(十王䟽)』, 벽암(碧巖) 각성(覺性)의 문인 지선(智禪)이 1661년 편찬한 『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의 조전점안에 관한 내용인 『예수문조전원상법(預修文造錢願狀法)』, 1710년 간행된 설암추봉(雪嵓秋鵬, 1651∼1706)의 『설암잡저(雪嵓雜著)』에 「서윤섬예수상중소(徐允暹預修上中䟽)」, 1717년 간행된 월저도안(月渚道安, 1638∼1715)의 『월저당대사집(月渚堂大師集)』에 실린 「생전시왕재소(生前十王齋䟽)」, 및 「생전발원재소(生前發願齋䟽)」, 1821년 간행된 함월해원(涵月海源, 1691∼1770)의 『천경집(天鏡集)』에 「예수재소(豫修齋䟽)」, 1786년에 문인 보철(普喆)이 저자인 진허의 입적 후 유고를 개간한 『진허집(振虛集)』의 「희원동지예수대례주별소(熈圓同知預修大禮晝別疏)」,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의 시집 『연담대사임하록(蓮潭大師林下錄)』의 「축시왕소(祝十王䟽)」, 응운공여(應雲空如 1794∼?)의 『응운공여대사유망록(應雲空如大師遺忘錄)』의 「예수함합별문(預修緘合別文)」, 용운처익(龍雲處益, 1813∼1888)의 『다송문고(茶松文稿)』에 시왕생칠재의 내용, 1870년에 간행된 치조환공(治兆幻空)의 『청주집(淸珠集)』의 「예수(預修)」, 금명보정(錦溟寶鼎, 1861∼1930)의 『조계고승전(曹溪高僧傳)』의 「조계종용월선사전(曹溪宗龍月禪師傳)」 등에 생전예수재와 시왕생칠재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으며, 1500년대에서부터 1900년 초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생전예수재는 16세기에는 ‘예수시왕재(預修十王齋)’의 명칭이 17세기에 들어서서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로 ‘생전(生前)’이란 명칭이 생겼으며, ‘생전시왕재(生前十王齋)’, ‘예수대례(預修大禮)’, ‘시왕생칠재(十王生七齋)’, ‘예수재(豫修齋)’등의 여러 명칭으로 사용되었음을 위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2. 절차와 구성

생전예수재는 준비의식과 본 의식으로 구성되며, 준비의식은 지역과 종단의 종풍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지만 본 의식은 안진호의 『석문의범』에 나와 있는 재공편의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豫修十王生七齋儀纂要)를 공통적으로 저본으로 하기 때문에 지역 종단에 상관없이 절차가 공통으로 진행된다.

본의식의 절차는 통서유인편 제일(通敍因由篇 第一)⋅엄정팔방편 제이(嚴淨八方篇 第二)⋅주향통서편(呪香通序篇)⋅소청사자편(召請使者篇)⋅안위공양편(安慰供養篇)⋅봉송사자편(奉送使者篇)⋅소청성위편(召請聖位篇)⋅봉영부욕편(奉迎赴浴篇)⋅찬탄관욕편(讚歎灌浴篇)⋅인성귀의편(引聖歸位篇)⋅소청명부편(召請冥府篇)⋅청부향욕편(請赴香浴篇)⋅가지조욕편(加持澡浴篇)⋅제성헐욕편(諸聖歇浴篇)⋅출욕참성편(出浴參聖篇)⋅참례성중편(參禮聖衆篇)⋅헌좌안위편(獻座安位篇)⋅기성가지편(祈聖加持篇)⋅보신배헌편(普伸拜獻篇)⋅공성회향편(供聖廻向篇)⋅소청고사판관편(召請庫司判官篇)⋅보례삼보편(普禮三寶篇)⋅수위안좌편(受位安座篇)⋅제위진백편(諸位陳白篇)⋅상단의 가지변공편(加持變供篇)⋅중단의 가지변공편(加持變供篇)⋅하단의 가지변공편(加持變供篇)⋅공성회향편(供聖廻向篇)⋅경신봉송편(敬伸奉送篇)⋅화재수용편(化財受用篇)⋅봉송명부편(奉送冥府篇)⋅보신회향편(十五普伸廻向篇)까지구성되어 진행 된다.

봉원사(奉元寺)예수재를 보면, 봉원사는 신라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3년(889)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현 연세대(연희궁) 터에 처음으로 지었던 것인데 이후 고려시대에는 고려 말 공민왕대에 활약한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이 크게 중창한 사찰이며, 서울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번지에 소재해 있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총본산 사찰이다. 그리고 봉원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영산회’를 전승하는 사찰로, 매년 6월 6일 시연회를 하고 있으며, 금년(2017) 7월 5일(윤5월 12일) 생전예수재를 봉행하였다.

금년에 거행된 생전예수재는 삼천불전에서 설행하였으며, 의례는 오전의식과 오후의식으로 구성되었다. 오전의식의 시작은 시련(侍輦)의식에서 시련과 조전점안(造錢點眼)으로 시작하여, 대령(對靈), 관욕(灌浴), 통서유인편 제일(通敍因由篇 第一)과 엄정팔방편 제이(嚴淨八方篇 第二) 그리고 주향통서편(呪香通序篇)의 예수상단(운수단)권공이다. 오후 의식은 중단의 소청사편(召請使者篇)을 시작으로 예수상단의 소청성위편(召請聖位篇), 중단의 소청명부편(召請冥府篇), 중단의 소청고사편(召請庫司篇), 중단의 마구단(馬廐壇), 전시식(奠施食), 봉송의식(奉送儀式)의 순서로 진행하였다.

 

 

작약산 광제사예수재는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에 소재하는 사찰이며, 윤달이 드는 해마다 설행하는 팔공산제 범패전문 불교의식으로 어장은 원봉만진(圓峰滿眞)스님이다.

2016년 10월 14일 거행한 작약산예수재의 진행 과정은 오전의식⋅오후의식⋅야간의식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진행 절차는 오전의식은 예수재의 준비의식으로 조전점안(造錢點眼)⋅대령(對靈)⋅관욕(灌浴)⋅사시불공(巳時佛供)이며, 오후의식으로 신중작법(神衆作法)⋅시주이운(施主移運)⋅예수작법준비(豫修作法準備)와 예수재의 본 의식과 새벽예불을 끝으로 예수재 의식은 끝이 난다.

생전예수재는 법회에 참석한 모든 대중들이 의식의 주체이기 때문에 의식염불의 양이 다른 재의식보다 많기에 법회의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야간의식에서는 설주이운부터 이나 시간에 따라 소청명부편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이는 명부의 세계는 어둠을 뜻하기 때문에 야간에 의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찰은 낮 의식으로 행하기에 축소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작약산예수재의식은 새벽예불을 시작으로 다음날 새벽예불을 끝으로 24시간의 시간 동안 전통 방식으로 설행되고 있다. 그러나 금년인 2017년 6월 23일 봉행한 생전예수재는 경상남도문화재 심사를 겸하였기 때문에 오전과 오후로 시간을 축소하여 거행하였다.

 

 

 

Ⅲ. 의례에 내제된 축제적 성격과 대중문화로의 활용방안

1. 문헌으로 나타나는 축제적 성격의 불교의식

한국불교에서 축제적 성격의 의식은 삼국시대 신라의 연등회와 팔관회로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연등’이란 무명과 무지 그리고 번뇌의 탐진치(貪瞋癡)로 가득 찬 세상을 부처님의 한량없는 대자비와 공덕으로 등불을 밝혀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기리는 의례이며, ‘팔관’은 하루 낮과 밤 동안 절에서 재가신자들이 8계를 지키는 포살의식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는 연등회이며. 기록으로 나타나는 횟수는 2회이며, 신라 경문왕 6년(866) 정월 15일에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보고, 그 자리에서 백관들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다라는 내용과 진성왕 2년(887) 정월 15일, 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구경하였다는 내용으로 정월대보름날 연등행사라는 불교의례가 있었다는 기록이다. 특히 왕이 간등(看燈) 하였다는 것은 밝혀진 등을 보았으며, 백관을 위해 왕이 주관하는 연회를 베풀었다는 것은 큰 잔치가 있었다는 것으로 이것은 왕과 많은 사람들이 황룡사에서 등을 보며 즐겼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재의식(齋儀式)의 성격을 지닌 불교의식 중 최초의 문헌 기록은 ‘팔관회’이다, 우리나라의 팔관회는 신라시대부터 개최되었으며, 호국적인 성격으로 사료에 나타난 신라의 팔관회(八關會)는 네 차례이며, 특히 진흥왕 33년(572년)에 설행 된 팔관회의 내용으로

33년(572)...겨울 10월 20일에 전쟁에서 죽은 사졸을 위하여 바깥의 절(外寺)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열어 7일 만에 마쳤다.

하였다.

이러한 전사한 장병을 위하여 팔관회를 외사(外寺)에서 7일 동안 베풀었다는 내용은 신라의 팔관회는 호국적 성격을 지니며 불교와의 관계가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신라로부터 이어져 고려에 내려와서는 태조의 불교의 정치이념으로 더욱 연등회와 팔관회가 크게 성행을 하였으며, 고려에서 ‘팔관회’가 태조 원년(918) 11월에 처음으로 열린 이후 매년 상례가 되었으나 연등회가 상례화 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훈요십조」에 ‘연등’과 ‘팔관’의 실행에 대한 유훈을 남기고 있어 태조대에 정례화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팔관회와 연등회는 성종에 의해 추진된 중국의 예제의 철저한 도입과 최승로의 개혁안이 채택되면서 연등회와 팔관회의 국가의례상의 지위는 약화되었고 간소화되는 형태로 제재가 가해지다가 성종6년(987)에 팔관회가 폐지되었다. 이때 연등회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나 폐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선왕의 제삿날 전후로 5일간과 모친과 선의왕후의 제삿날 전후 3일간 불공을 드리며 제사기 있는 달에는 도살과 고기반찬을 금한다는 교서를 내린 것으로 보아 생활 속에 자리 잡은 불교의 신앙적 민심은 유지되었다고 보여 진다.

성종사후 현종원년(1010) 윤2월 연등회가 복원 되었고, 그해 11월에 팔관회가 복원되었다. 다음해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로 피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청주의 행궁에서 현종은 연등회를 열고 법적으로 향례화 하였다.

고려시대의 연등회 진행과정은 『고려사(高麗史)』에 잘 나타나 있다. 연등회는 소회일과 대회일 이틀에 걸쳐 설행되었다. 소회일에는 ‘소회좌전(小會坐殿)의식’과 ‘조진배알의식(祖眞拜謁儀式)’이 이루어 졌으며, 대회일에는 임금과 신하들이 주식을 함께 나누는 대연회의식이다.

『고려사(高麗史)』 제29권 志 제23권 禮11 가례잡의(嘉禮雜儀)의 상원연등회의(上元燃燈會儀)에 수록된 소회일의 소회좌전의식을 보면

국왕이 치황의(梔黃衣)8) 차림으로 편차에 나오면 견룡관(牽龍官)9)과 중금(中禁)·도지(都知) 및 궁전 문 안팎에 포진한 위병과 의장병들이 만세를 부르고[山呼] 두 번 절한다. ⋯ 다음으로 온갖 놀음과 기예를 벌이는 사람들이 차례로 궁전 마당으로 들어와 잇달아 놀음판을 벌인 뒤 물러난다. 다음으로 교방(敎坊)에서 주악을 연주하고 무용수들이 들고 나는 것은 모두 평상시의 의례와 같다.

‘소회좌전의식’에서 중요한 점은 백희가무(百戱歌舞)의 공연이다. 인도로부터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수입된 백희가무들은 궁중오락으로 지배층들에 한정되었다가 점차 대중화 되었다. 이는 상원연등행사에서 백희가무 공연은 일반 백성들의 호응도가 큰 중요한 프로그램이 되어 불교의례인 상원연등회가 유락화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일반백성의 행사 참여를 촉발하여 상원연등을 세시풍속으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연등회는 불교적인 행사이다. 그러나 설행시기가 정월보름 또는 2월 보름으로 이는 농경사회의 제천의식과 겸하게 된 것이라 여겨진다. 농경사회에서는 봄을 알리는 상원이 매우 중요하다. 고려는 불교가 가지는 종교적 정치적 영향력은 태조에 의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한해의 시작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므로 ‘연등회’는 불교적인 행사이지만 정치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풍요를 기원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내려와서는 더욱 축제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14년(1432년) 효령대군 이보의 주체로 열린 한강에서의 수륙재 모습에서 가장 축제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효령 대군 이보가 성대하게 수륙재를 7일 동안 한강에서 개설하였다. 임금이 향을 내려 주고, 삼단(三壇)을 쌓아 중 1천여 명에게 음식 대접을 하며 모두 보시를 주고, 길가는 행인에게 이르기까지 음식을 대접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날마다 백미(白米) 두어 섬을 강물 속에 던져서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베풀었다. 나부끼는 깃발과 일산이 강(江)을 덮으며, 북소리와 종소리가 하늘을 뒤흔드니, 서울 안의 선비와 부녀(婦女)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양반의 부녀도 또한 더러는 맛좋은 음식을 장만하여 가지고 와서 공양하였다. 중의 풍속에는 남녀(男女)가 뒤섞여서 구별이 없었다. 전 판관(判官) 길사순(吉師舜)이 글을 올려 〈중지하라고〉 간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면 천여 명의 승려들의 공양뿐만 아니라 길가는 행인에게도 음식을 베풀었으며, 나부끼는 깃발과 일산이 한강을 덮었고, 북소리와 종소리가 하늘을 뒤흔들 정도로 크게 들리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의 축제와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의 왕실주관의 대표적 불교의 축제적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성종이후 불교의 탄압으로 인하여 국가적인 대규모의 재의식은 금지 되었고, 이후 각 사찰에서의 축소된 형태의 재의식으로 이어져 내려와 오늘에 이른다.

오늘날 행하여지고 있는 한국의 불교의식 중에서 영산재(靈山齋), 수륙재(水陸齋),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 등의 의식에서도 많은 인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재의식을 통한 축제적 성격의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영산재는 불교의례 중 한국의 불교문화예술을 종합예술로 표현하면서 철학적ㆍ사상적으로 표상되어 있고 음악학적ㆍ국문학적ㆍ무용학적으로 불교의 심오하고 장엄한 사상적 그 이상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영산재와 수륙재는 불교의 의식적인 면이 강조되고 재가자들의 간접적인 참여로 인한 축제적 성격이 약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현재 대표적인 축제적 성격의 불교의식은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구인사 ‘삼회향놀이’이다. 영산재의식이 끝나고 법회에 참석한 대중들의 뒤풀이 놀이로써 대중들의 흥을 유발하여 즐거운 회향을 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축제적 성격을 가진다 할 수 있으나 불교적인 의식에 포함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전예수재는 재가자 모두가 의식의 주체가 되어 의식구성의 여러 부분에서 축제적인면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생전예수재에서 축제적 성격이 크게 나타나는 의식구성과 성격은 다음과 같다.

 

2. 의례에서 나타나는 축제적 성격

1) 시왕청사 행렬과 조전의식에서 나타나는 축제성

‘시왕각배재(十王各拜齋)’는 ‘대례왕공재(大禮王供齋)’ 또는 ‘각배재(各拜齋)’라고도 하며, 명부시왕에 대한 권공(勸供)이라는 뜻으로, 명부시왕단(冥府十王壇)을 설치하여 명부의 시왕에 대한 의례이다. 대례왕공을 각배(各拜)라고 하는 것은 명부시왕단의 각각의 왕에게 별도의 권공의례를 올리기 때문이다.

작약산예수재에서는 ‘소청명부편(召請冥府篇)’을 시작 할 때에 절 마당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장소에 설치된 초롱등ㆍ창ㆍ칼ㆍ시왕번ㆍ청사번 등의 장엄 앞에 예수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모이게 하여 열 줄로 세운다. 이때의 열(十)줄은 십대왕에게 나아가는 행렬의 인원으로 각 개인의 생년간지를 담당하는 명부의 각 대왕 앞에 줄을 서는 것이다.

 

 

이러한 시왕각청에서 열 대왕의 청사가 시작되면 각 대왕의 호명에 따라 나발ㆍ태평소ㆍ나각(법라)ㆍ태징ㆍ목탁을 든 인례승려들 뒤에 따라서 호명된 줄의 동참자들은 초롱등ㆍ창ㆍ칼ㆍ시왕번ㆍ청사번을 들고 법성게를 동송하면서 반시계 방향으로 3번의 탑돌이를 하거나 법당을 돌아서 시왕단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봉원사 생전예수재 역시 소청명부편에 들어가면 신도들을 법당 밖으로 모이게 하여 시왕을 차례대로 청하면 취타대를 선두로 징을 치는 인례승을 따라 차례대로 법당안 시왕단으로 들어와 예를 올린다.

작약산 광제사의 경우 등, 칼, 창, 번 등의 장엄을 신도들이 직접 들고 따르지만, 봉원사는 취타대 뒤를 따라 시왕단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다르게 나타난다.

초롱등은 행렬의 앞에서 불을 밝히어 안내하고, 창과 칼은 불법을 호위하는 팔부신장으로 행렬을 호위하는 것이며, 시왕번은 내가 가야할 명부의 열 대왕 중 대상이며 청사번은 대왕님을 청하는 글이다. 그리고 탑돌이를 하거나 법당을 도는 것은 불법의 위신력에 의지하고자 하는 염원인 것이다.

시왕청사시 이러한 행렬은 평소 자신의 사후를 관장하는 명부의 왕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것으로 예수재의 목적을 알려주는 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전예수재가 가지는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으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시왕청사의 행렬에서의 탑돌이는 모든 불교의식이나 불교적 축제에서의 탑돌이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찰에서의 탑은 불타께서 입적 후 다비에서 나온 사리를 봉안 하던 곳으로 경배의 대상이 되는 곳이었다. 불교인들은 탑을 돌면서 석존에 대한 경배를 올린 것으로 오늘날 까지 내려 온 것이다. 이러한 탑돌이는 한국불교에서 신앙적 경배와 찬탄의 의미에 더하여 축제적 의미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초파일의 탑돌이 연등 행렬이나 사찰 탑돌이 의식의 대표적인 월정사 탑돌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시왕청사의 탑돌이 행렬은 내가 전생이 지은 업장의 결과로 진 빚을 생전예수재를 통하여 미리 갚음으로써 불확실한 사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부처님과 지장보살의 위신력에 의지하여 떨쳐버리고자 하는 염원인 것으로, 이러한 행렬을 보여줌으로써 불교에 대한 믿음이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는 교화의 한 방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석한 대중들은 의식의 직접적인 참여를 인식시키게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축제의 장을 만들어 종교적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부의 시왕을 청하는 의식은 생전예수재의 핵심적인 부분이므로 작약산예수재에서는 이 의식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봉원사의 경우 신도들의 의식에 대한 직접적인 참여가 가장 크게 일어나는 부분은 시련터에서 행하여지는 조전의식이다. 시련터에서 불⋅보살을 청하는 의식 다음으로 전점안의식이 진행되는데 신도들은 점안을 마친 각자의 오늘 전생 빚을 갚을 금은전의 지전을 머리에 이고 단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탑돌이 형태의 행진을 한다. 이때에 작법승들은 범패에 맞춰 단 가운데의 자리에서 나비 작법과 바라춤을 춘다. 이러한 모습은 봉원사 생전예수재의 가장 장엄한 풍경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2) 가마(용선)타기에서 나타나는 축제적 성격

작약산예수재에서 가마와 용선 타기는 놀이적인 성격을 가진 단순한 놀이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의식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가마와 용선타기의 놀이 의식은 오전 예수의식이 끝나고 점심공양 후, 대중들을 절의 탑 앞에나 마당으로 모이게 하고 가마나 용선을 준비하여 대중들을 한 사람씩 태워 탑을 도는 의식이며, 재가불자들의 직접적인 참여로 인한 예수재 의식에서의 주체가 되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시 여긴다. 이러한 의식 과정에서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작약산예수재에서는 ‘가마(용선)작법’이라 칭하고 있다.

용선은 ‘반야용선(般若龍船)’을 의미하며 반야용선에 대한 기록으로는 금강산 건봉사 사적(金剛山 乾鳳寺 事蹟)의 경덕왕 17년(758년)에 발징법사(發徵法師)가 미타만일회(彌陀萬日會)를 설(設)하였다. 29년만인 병인년(丙寅年 786년)에 쌓은 공(功)이 헛되지 않아 31명이 육신등공(肉身騰空)한 실적(實蹟)이 전사(傳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발징 대화상이 큰 서원을 발하여 31명을 청하여 미타만일회를 설하고 향도(香徒) 1828명을 맺었다... 29년만인 병인년(786년)7월 17일 한 밤중에 아미타불과 관음∙세지 두 보살님이 자금연대(紫金蓮臺)를 타고 문 앞에 이르러 금색 팔을 펴고 염불하는 대중을 맞이하였다. 부처님은 대중을 거느리고 반야선(般若船)에 올라 48원을 부르면서 백련화세계로 가서 상품상생(上品上生)을 명하였다... 또 7일째 되는 한밤중에 아미타불께서 다시 배를 타고 오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본래 세운 원력 때문에 너를 맞이하여 같이 가야겠다.’... 동량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그 발에 절 한 후 배를 타고 서방정토로 왕생하였다.”

백암성총(栢庵性聰)이 지은 『정토보서淨土寶書』 8편의 염불겸송경왕생과(念佛兼誦經往生科)에 반야용선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양(梁)나라때 도진법사(道珍法師)가 열반경을 강의하다가 참선 중에 홀연히 해상(海上)으로 수백명이 보선(寶船)을 타고 지나감을 보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는데, 극락국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같이 왕생하기를 간청하였더니 “법사는 비록 강경은 하고 있으나 미타경(彌陀經)을 읽지 않았으니, 어찌 같이 왕생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강의를 폐하고 염불하여 약 1년 후에 곧 극락왕생 하였다고 한다.

‘반야용선(般若龍船)’이란 어지러운 세상을 넘어 피안의 극락정토에 갈 때 탄다는 배를 말한다. 반야(般若)란 모든 미혹(迷惑)을 끊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힘이나 모든 법을 통달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뜻한다. 이 외에도 반야용선도가 있는데, 이는 망자를 위해 걸었던 그림으로, 그림에는 보통 좌로부터 극락의 주인인 아미타부처, 극락으로 인도하는 깃발을 든 인로왕보살, 반야용선과 망자가 표현되며 슬픔에 젖은 유가족이 그려지기도 한다. 즉 반야용선이 그려진 것은 망자가 아미타 부처가 계시는 서방극락정토에 왕생(往生)하기를 염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마(용선)작법의 전개 과정을 보면 가마(용선) 앞에 태평소, 나각(법라), 광쇠, 징, 목탁을 든 승려들이 서고 뒤로 가마(용선)가 따른다. 그 뒤에는 가마를 탄 불자의 자재들이나 며느리 그리고 친척 등이 서서 따라 간다. 앞에 선 인례승들의 법성게(法性偈)를 동창하면서 나아가고 대중들은 같이 흥을 돋우면서 춤을 추며 가마를 따라간다. 이에 탑을 한 바퀴를 돌면 다음 사람과 교대를 하면서 그날 참석한 대중들을 모두 태운다.

이 의식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말솜씨나 넉살이 좋은 한 사람을 앞세워서 가마와 용선을 타는 사람이나 그의 권속들 또는 친구들에게 가마비의 명목으로 돈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실랑이를 때로는 흥을 북돋우는 역할을 하며 대중들의 앞에서 놀이를 진행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수재에 참석한 모든 대중들이 참여하여 대중들의 서로 간에 흥을 유발시키며 춤과 노래로 전생빚의 청산에 대한 즐거움을 축제의 장으로 승화 시킨다.

이때의 인례승들은 보조 역할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마와 용선 타기는 하나의 놀이로써의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가마와 용선이 가지는 상징성으로 예수재의식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가마는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 편하게 갈 수 있는 이동수단이었으며, 그리고 오늘날에도 배는 육지에서 섬을 오가는 배가 서민들에게는 중요한 이동의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후에 명부시왕으로의 이동수단으로 가마를 그리고 서방정토의 이동수단으로 반야용선을 상징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수행자들은 수행을 통해 사후의 불안감을 이겨낼 수 있지만 재가 불자들은 사후의 일이나 서방정토의 왕생에 대한 염원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수단을 생전예수재를 통하여 간접 체험함으로써 사후에 대한 열망을 기쁨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가마나 용선을 타고서 탑돌이를 하거나 법당을 도는 것은 아미타 정토신앙을 기반 한 한국 민중불교의 중요한 사상적 토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 진다.

 

 

가마나 용선을 타는 행위는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지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부산 경남지방에서만 전해지는 무속에서의 생전예수재와 같은 성격의 ‘산오구굿’에서 유추 할 수 있다.

산오구굿은 나이 많은 노인이 죽은 후 그 영혼이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부산 동래지역을 중심으로 ‘산오구굿’이 전승되고 있으며, 이 굿에는 전정(前庭)밟기(가매타기)가 있다. 이것은 생전예수재에서 가마타기와 같은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오구굿’은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굿이며, 산오구굿은 산자가 죽은 뒤에 갈 극락 행을 기원하는 것으로 망자를 위해 행해지는 오구굿에 비해 밝고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연행이 되는 것이 특징이다 생전에 노인들이 죽은 후 좋은 곳에 가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굿. 주로 경상도 지역에서 전승되는 무당굿이다. 대개 윤달이나 따듯한 봄 또는 백중 무렵에 하였으며 윤달은 부정을 타거나 액이 끼지 않는 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 기능이나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 등에서 불교의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와 비슷하다. 굿을 하는 시기가 윤달이며, 산 사람을 위한 의식 그리고 가마타기와 영산맞이, 탑등놀이 등으로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 한다.

 

3. 생전예수재가 가지는 대중문화로의 활용방안

생전예수재는 종교적인 사상과 신앙심을 고취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귀중한 민속 문화임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현대의 불교적 대중문화 콘덴츠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소재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현적한 과제로 대중포교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에 많은 연구와 과제를 실행하고 있다. 특히 불교의식을 주제로 한 사례를 살펴보면, 의례인 영산재를 무대화한 <니르바나>가 대표적이며, 2011년 4월에 초연한 MBC창사 50주년 특별기획 작품인 뮤지컬 <원효>가 있으며, 2010년 경남 창원에서 초연한 고려대장경 간행 천년을 기념해 제작된 오페라 <대장경>이 있다. 그리고 많은 창작 음악과 무용 등이 공연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연 특별기획으로 제작된 공연으로 대중적인 인지도는 대부분 가지질 못하였다. 또한 무속적이며 민속적인 부분이지만 생전예수재와 맥락을 같이하는 불교적 요소를 담고 있는 ‘산오구굿’을 영화와 연극으로 무대화한 사례 <오구>가 있다.

영산재를 무대화한 <니르바나>는 2000년 성암고서박물관에서 발견한 각필악보와 고려시대, 조선시대 감로탱화에 나타나는 승려의 복식과 무용수의 복식을 고증하여 범패의 각필 악보를 토대로 무대 공연화한 작품으로 2003년 11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초연한 후 폴란드, 오스트리아, 영국, 이탈리아, 그리스, 불가리아 등 주로 외국 공연에 심혈을 기울려 외국에 우리의 우수한 불교문화를 알리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2017년 10월경 인천 공연을 앞두고 있다. 또 뮤지컬 <원효>는 21세기 첨단 테크놀로지와 뮤지컬을 결합시켜 원효의 사상과 이야기를 현대적 재해석으로 전통과 현대의 결합적인 작품이며, 1400년 전의 승려 원효가 파격적인 모습으로 21세기 관객과 만나 앙코르 공연에 들어간 뮤지컬 원효는 사극은 지루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있다. 오페라 <대장경> 조정래의 장편소설 '대장경'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고종 때 대장경 제작 과정에 참여한 필생(붓으로 농사를 대신한다는 뜻으로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장균과 호부상서(고려 시대 호부의 으뜸 벼슬)의 딸 가화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대장경 제작 과정을 담고 있다.

<오구>는 연극 연출가 이윤택이 자신의 연극 <오구>를 스크린으로 옮긴 그의 첫 영화 연출작으로 영화의 배경은 경남 밀양의 시골 마을이다. 남편을 꿈에서 본 황씨 할머니가 ‘산오구굿’을 통해 저승 갈 준비를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서 벌어지는 문상객들이 이야기로 화투를 치는 등 잔칫집과 같은 모습 등의 초상집 분위기로 연출하며 관객을 웃고 울리는 내용이다. 그리고 원작인 연극 <오구>는 지난 1989년 서울연극제에 처음 등장했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매년 서울 정동극장에서 한 달 이상 장기공연을 한 작품으로 평균 객석 점유율 97%라는 기록을 세우며 '귀신 붙은 연극'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위의 사례인 불교가 불교의례 영산재를 무대화한 <니르바나>와 오페라인 <대장경> 그리고 뮤지컬인 <원효>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현대적 콘텐츠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전예수재라는 주제를 가지고 마당놀이, 연극, 영화, 오페라, 뮤지컬 등의 다양한 콘덴츠로 대중들에게 불교문화의 다양성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여 지는 것이다.

 

Ⅳ. 맺음말

불교가 서기 372년 고구려 제 17대 소수림왕 1년에 전진(前蓁)의 왕 부견이 고구려에 부처님의 모습을 조각한 불상과 불교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전을 선물로 보내어 온지 1600여년 되었으며, 신라와 고려의 불교적 정치이념 통해 찬란한 불교문화 유산을 남겼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민중들의 삶에 고스란히 남아 오늘날까지 알게 모르게 많이 내려오고 있음을 역사적 기록과 자료를 통하여 볼 수 있다.

‘생전예수재’는 산 자들을 위한 의식이므로 재의식의 주체는 승려가 아닌 대중이므로 재의식의 성격이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천도의식(薦度儀式)인 수륙재(水陸齋)와는 다르다. 그 이유는 엄숙한 분위기의 천도의식과(薦度儀式)는 달리 내가 곧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의식이므로 의식의 주체가 되어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숙한 분위기의 천도의식과는 달리 내가 곧 주인공이며, 전생의 빚을 갚음으로써 불안한 사후세계(死後世界)에서 안락을 신앙심으로 보장받는 의식이기에 때문에 성격이 밝을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생전예수재에서도 경제인 봉원사 생전예수재와 달리 경남지방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 밀양지역의 작약산 광제사예수재는 일반 대중들의 오락적 요소가 포함된 민속학적 사상이 결부되어 있으며, 의식설행 중에 ‘가마(용선)타기’와 ‘소청명부편(召請冥府篇)’의 ‘시왕각배(十王各拜)’시 시왕청사의 탑돌이 행렬은 예수재의 목적을 알려주는 의식이며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부분으로 ‘화청’과 더불어 축제적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가마나 용선을 타고서 탑돌이를 하거나 법당을 도는 것은 아미타불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국 민중불교의 중요한 사상적 토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소청명부(召請冥府)에서의 탑돌이 행렬은 생전예수재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석한 대중들에게 의식의 직접적인 참여를 인식시키게 하고 축제의 장을 만들어 종교적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불교의식에서의 축제성(祝祭性)을 내제한 생전예수재가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성행을 한 까닭은 영남지방의 강한 불교적 신앙생활과 토속적 신앙생활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는 것을 ‘산오구굿’에서 반증하는 것이며, 불교의 문화가 민요나 민속놀이에서 민중들의 놀이적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본 연구를 통해서 불교의식에서 나타나는 축제성은 불교가 가지는 단편적인 불교문화가 아니라 한국의 전통적 민속 문화와 같은 궤(軌)를 가지고 이어져 내려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오구’의 사례를 통하여 생전예수재의 축제적 성격을 내용의 주제를 가지고 마당놀이, 연극, 영화, 오페라, 뮤지컬 등 다양한 콘덴츠로 대중들에게 불교문화의 다양성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여 지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불교의식이 대중문화 예술의 한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다양한 논의를 통해 연구 되어야 할 것이라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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